아들,젊은 날의 아빠를 만나다

아들 도키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미래에서 아들이 찾아와 젊은 날의 아빠를 만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식의 시간의 비틀림이나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아무래도 이공계 쪽이 전공이어서인지는 몰라도 과학이나 의학등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과 추리소설을 접목해 나름의 독특한 이야기를 펼쳐 일반 대중에게도 과학적인 정보를 딱딱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려주는 게 그의 장기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다 그만의 따뜻함과 애정이 섞여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아들 도키오에서는 내일만이 미래는 아니라는 말을 통해 시간이란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설정으로 먼 미래에서 과거로 타임슬립 해 아빠를 만나는 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다쿠미와 레이코 부부는 아들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런 이유로 슬프기는 하지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옛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다쿠미

그가 한창 젊고 철없던 시절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던 청년 도키오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신이 부모라고 알았던 사람들이 사실 친부모가 아니고 낳아준 여자가 따로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삐뚤어진 다쿠미는 고교를 졸업 후 독립하고 그때부터 제대로 된 일자리가 아닌 수시로 직장을 갈아치우면서 한탕을 노리는 그렇고 그런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도 직장에서 잘린 후 공원을 빈둥거리는 그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가 바로 도키오였다.

그와 몇 마디 나누다 엉겁결에 자신의 집으로까지 데려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 지즈루에게 차이는 모습까지 보이고 만다.

그녀의 변심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다쿠미는 그녀의 행방을 찾지만 이미 살던 곳에서 사라진 후... 게다가 한눈에 봐도 불량해 보이는 남자들이 그녀의 행방을 물으러 온 걸 보고 그녀가 사건에 휘말렸음을 직감한다.

그들을 따돌리고 그녀가 갔을만한 곳 오사카로 간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간 김에 친모를 한 번만이라도 찾아가 보라는 도키오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친모를 찾아가지만 병세가 완연한 그 모습을 보고도 다쿠미는 원망이 깊어 용서할 마음이 없다.

그는 어서 빨리 지즈루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뿐이나 마음은 급하지만 참을성도 부족하고 제멋대로인 성격 탓에 되는 일이 없다.

이런 모습에 도키오는 싫은 소리도 하고 충고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듣지 않았을 말도 도키오에게는 화를 낼 수도 없고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느끼는 다쿠미

지즈루를 구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는 두 사람이지만 다쿠미만 몰랐을 뿐 도키오는 돌아가야만 한다.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한 선택으로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느낀 것도 잠시 도키오는 지금의 아빠를 자신의 아빠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이렇게 끝과 에피소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처음 에필로그에서 유전병을 가진 여자인 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그 결과마저 받아들이기로 한 다쿠미의 모습은 남자로서 진중하고 책임감이 있는 멋진 모습이지만 이후 그가 아내에게 말한 이야기 속 젊은 남자의 모습은 한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던 남자가 미래에서 온 아들 도키오를 만나 조금씩 변해가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면 만약 미래에서 온 도키오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까 싶은데 또 어떻게 보면 미래의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해도 그는 나이 들면서 서서히 변해갔을 것이고 아들이 성장했을 때 만났을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갔달까...

시간은 일직선상에 놓인 게 아닌... 어쩌면 우리는 모르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어딘가에서 서로 맞물려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어쨌든 소설로도 아주 흥미로웠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를 알아본다는 설정 자체도 좋았다.

재미와 감동 두마리 모두를 잡은 책

죽은 오빠로부터 온 엽서

하쿠바산장 살인사건 ㅣ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오빠의 죽음을 조사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은 우리에게도 많은 애정을 받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예전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그의 작풍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어왔는데 이 책을 비롯한 초기작은 시대와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를 소재로 하는 요즘 작품과 달리 개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서 발생된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에 중점을 둔 전통적인 추리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에 사용된 트릭이나 방법을 찾고 용의자를 찾아서 하나씩 의심스러운 점을 소거해 나가다 보면 이윽고 드러나는 범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물론 여기에다 다 끝났다 싶을 때 독자들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치는 반전도 있고 사건 자체가 개인들의 일탈이나 소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흔히 살인사건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동기가 있어 범인을 특정 짓거나 용의자를 찾기가 비교적 어렵지 않아 요즘 게이고가 주로 쓰는 사회파 소설과 비교해 조금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점이 두드러지는데 오빠의 의심스러운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오빠가 죽기 전 머물렀던 산장을 찾아간 여동생과 그 친구가 그곳에서 작년 오빠가 죽었을 때와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를 해보고 사건 전후의 사정을 들어본 후 오빠의 죽음이 누군가에 의한 타살이라는 심증을 찾게 된다.

그렇다면 오빠는 왜 아무런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은 이곳 산장의 객실마다 걸려있는 영국의 동요 마더 구스와 얽혀 조금 복잡해진다.

마더 구스의 동요가 어떤 암호 역할을 했고 그 암호를 풀었던 오빠가 누군가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암호 자체는 복잡한.... 본격파 정통 추리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범인의 정체나 동기보다 마더 구스의 암호와 밀실의 트릭을 깨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본격 추리 소설답게 용의자를 특정 짓기가 쉽지 않았지만 게이고의 작품답게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사회문제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묵직한 울림이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면 아쉬울 작품이지만 가볍게 트릭을 파악하고 암호를 푼다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만족할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멀리 돌아가는 히나 ㅣ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9월

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동아리 회원들이 일상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담아 인기를 끈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는 고등학생들이 주축이다 보니 사건 자체도 그렇게 심각한 것보다 일상의 미스터리 위주가 많다.

그래서 가벼운듯하면서도 군데 군데에서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이라던가 혹은 기성세대의 시선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건에 접근하는 데서 오는 신선함 같은 게 특징이자 장점으로 작용하는데 이 책 멀리 돌아가는 히나는 사건 위주라기보다 고전부의 아이들이 처음 고등학교를 입학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나 각자의 관계 등 사건 이외에 더 중점을 둔 듯해 앞에 나온 책에 비해 다소 밋밋하고 심심한듯하다.

문제나 수수께끼의 답을 가장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이지만 귀차니즘의 신봉자인 오레키 호타로

호타로의 신조는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하고 해야 할 일은 간략하게이듯 늘 몸을 움직이기 보다 앉아서 수수께끼의 답을 유추하는 쪽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다가와서는 직접적이기보다 그저 신경 쓰여요 라는 말로 호타로를 움직이는 지탄다

그녀는 그저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의문점이나 궁금한 것을 외면하지 못하는 스타일이기도 한데 늘 모든 것을 귀찮아하고 웬만한 건 모른 척 외면할 듯 보이는 호타로는 자신이 왜 그녀의 말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또 다른 인물들인 사토시와 이바라의 관계 역시 오랫동안 이바라가 사토시를 좋아하고 좋아한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사토시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런 둘의 관계로 인한 모종의 긴장감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수제 초콜릿 사건

작년과 마찬가지로 사토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줄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만들었지만 사토시에게 전달되기 전 누군가에게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리방에서 있었던 초콜릿... 그곳을 지난 사람은 고전부 회원 단 4명뿐! 그렇다면 누가 초콜릿을 가져가 이바라의 고백을 방해한 걸까

새해에 들른 신사의 헛간에 갇힌 호타로와 지탄다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면 간단할 일이지만 지역의 유지 집안사람인 지탄다의 입장 때문에 쉬운 방법이 아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구조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이야기를 다룬 새해 문 많이 열려라에서는 얼어죽을것 같은 추위에서도 지탄다의 입장을 위해 쉬운 방법을 버리고 고생하는 호타로의 마음이 본인만 모르고 완전하게 드러났다.

지탄다의 부탁으로 축제에서 그녀의 우산을 쒸워주게 되면서 사토시가 지탄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조금 자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멀리 돌아가는 히나 역시도 별다른 사건은 없다.

그저 왜 정해진 길을 두고 돌아가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정을 알아보는 정도

전체적으로 사건이라 하기엔 약하고 약간의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 그 이면에 고전부 내에서의 관계라든지 조금씩 서로를 의식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어 미스터리나 추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듯...

시리즈의 관점과 재미와는 조금 다른 번외 편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미즈키 히로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3월

그렇지만 일본 역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이나 대우는 천양지차이라 정규직으로 입성하지 못한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정규직 취업에 실패하고 파견직으로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겪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에 스스로 일을 선택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보험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히나코

원래부터 하던 일의 연장이라 곧바로 4명이 일하는 작은 노무사 사무소에 취업해 현장에 투입되지만 그녀가 마주한 클라이언트들의 의뢰 내용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게다가 노무사라는 직업이 노동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을 하는 직업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사회보험 노무사라는 게 의외로 회사와 계약을 맺어 각종 노무와 관계된 일이나 임금 문제, 직원의 고용에 있어 따라오는 각종 허가사항을 대행하는 일을 한다는 것부터 오판을 해서인지 책 내용마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전개를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처음 생각에는 일을 하면서 노동자가 기업으로부터 겪는 온갖 부조리한 일과 부당한 처우에 대해 노동자를 대신해서 기업에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해 통쾌한 한방을 날리거나 시원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이다 같은 스토리를 예상했었는데 그런 식의 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일을 하면서도 몰랐던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혹은 기업이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기업이 행정 위반이나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걸 각성시키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설득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고 그런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받을 수 있는 부당한 대우를 개선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일 뿐 강제성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조차도 기업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책 속에서 히나코가 클라이언트인 기업의 의뢰를 받아서 문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우리 역시 흔히 겪는 문제들이 대부분이기에 이런 전개보다 뭔가 속 시원한 결말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다른 문제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건 그냥 표면상의 문제일 뿐 그 속에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적인 차별, 정시 퇴근할 수 없는 구조 문제 혹은 출산과 육아에 있어 늘 불이익을 당하는 여직원들의 문제 등등

그렇다면 클라이언트인 기업의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하는 사회보험 노무사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라도 이렇게 노사 간에 문제상황이 발생 시 노동자의 편을 들기 힘든데 왜 하필 사회보험 노무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차라리 마음껏 을인 직원의 편에 서서 부당함에 목소릴 내고 억울한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노조를 내세워 기업을 상대로 시원하게 한방 날려주는 편이 휠씬 더 시원함과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을까?

여기서 주인공인 히나코가 병아리라 불리는 사회보험 노무사로 초짜라는 점이 변수로 작용한다.

그만큼 노무사로 일한 경험이 적고 자신 역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견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히나코는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가거나 무시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 남다른 열의와 정성을 보임으로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문제를 발견해 적극적인 중재를 하는 걸로 업무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간다.

그럼으로써 기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보여주고 그 문제에 법적인 조항을 알려줌과 동시에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잡은 책~

아무리 겨울이 혹독해도 봄은 온다

[세트] 세상의 봄 상.하 세트 - 전2권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미야베 미유키를 왜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손꼽는지는 작가의 책 한두 권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사회의 부조리한 면이나 사회현상 혹은 사회문제를 소재로 다루는가 하면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글에서는 당시의 시대를 글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자료와 문헌을 조사하고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데 이런 글들을 보면 그녀를 최고로 꼽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눈 그리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과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이 그녀로 하여금 등단 30년이 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내가 그녀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그리는 범죄소설에는 인간미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범죄에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범죄 자체의 잔혹성이나 난폭함보다는 범죄의 동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요즘 유행하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크라임 스릴러나 범죄 동기가 일반인의 시각에선 이해하기 힘든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마를 다룬 소설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 책 세상의 봄도 그렇다.

기타미 번의 6대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의 느닷없는 실각으로 그를 곁에서 돕던 수석 요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는 와중에 한직에서 물러나 외딴 촌에 은거하던 가가미 家 가 그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이혼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비를 돌보고 조용히 살고 있던 가가미 다키는 아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고코인에 요양을 이유로 유폐된 전 가주 시게오키곁에서 수발을 부탁받는다.

그녀가 기억하던 번주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 황폐해지고 약해진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던 것도 잠시 청년의 모습을 한 채 아이 같은 행동과 목소리를 하는 전 번주의 기이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밤마다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도 시게오키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제서야 전 번주의 병을 알게 되는 다키는 그녀를 수발들 사람으로 선택한 이유답게 그 모습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연민하게 된다.

서양의학을 배우고 온 번의 가문醫 차남 시로타 노보루와 어릴 적 시게오키를 곁에서 지켜보고 보살펴왔던 기타미 번의 가로 중 한사람 이시노 오리베 그리고 다키는 본격적으로 시게오키의 병증에 대해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알고자 하지만 오랜 세월을 그렇게 다른 인격체와 함께 해왔던 시게오키의 방어벽은 높기만 해서 좀체 진전이 없는 가운데 우연히 고코인의 상징인 진쿄호의 수풀 속에서 어린아이의 백골을 발견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마침내 시게오키를 괴롭히는 병증의 원인을 찾을 실마리를 쫓아가다 오래전 그 병이 시작되던 때 기타미 번에 있었던 소년들의 실종사건을 찾아내게 되고 그 실종사건과 전 번주의 광증이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뿌리는 생각보다 깊었고 그 밑에는 공포와 수치심이라는 방어벽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깊이 파고들수록 자신들이 믿었던 이를 거부하고 그에게 느껴왔던 경애의 마음조차 한순간에 허무해지게 만드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해지지만 오랜 세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이 혼자서만 이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던 시게오키를 생각하며 고코인의 사람들은 힘을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에 드디어 응답하는 시게오키는 스스로 숨겨왔던 진실을 다른 모습 뒤에 숨지 않고 드러내면서 만천하에 추악하고 냄새나는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취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 사람이 가진 악의에는 바닥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세상의 봄은 아름다운 호수를 둘러싸고 있던 악취나는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번주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한순간에 낙오되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시게오키라는 인물이 앓고 있던 병이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한 해리성 장애였고 그 병변의 원인이 극심한 공포에서 자기방어적인 성격으로 형성되기 싶다는 걸 이해한다면 그가 가진 비밀이 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리베를 비롯한 고코인들이 그 원인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근접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상당히 즐거웠다고 과연 어떻게 그 병을 치료할까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암울했지만 그런 무거움을 덜어줄 등장인물 스즈, 고, 다지마 한주로의 때묻지 않은 시선, 강직한 성품과 진심어린 마음은 이야기의 밸런스를 맞추고 세상 다시없을 악의를 끝내 끊어내고 스스로 일어서는 시게오키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리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 길지라도 끝내 봄은 오듯이 마지막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번과 그 번의 정점인 번주 그런 그의 곁에서 대를 이어 목숨 바쳐 헌신하는 가로들 그리고 요닌등 번 내의 복잡한 상하 계통이나 지금의 우리완 다른 이념과 번주를 향한 충성심등은 시대물을 읽을 때마다 늘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않고 헷갈리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내용을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는데 여기에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시게오키의 병의 원인을 추리해가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작가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다운 작품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미야베 미유키의 대단함을 실감했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