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겨울이 혹독해도 봄은 온다

[세트] 세상의 봄 상.하 세트 - 전2권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미야베 미유키를 왜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손꼽는지는 작가의 책 한두 권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사회의 부조리한 면이나 사회현상 혹은 사회문제를 소재로 다루는가 하면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글에서는 당시의 시대를 글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자료와 문헌을 조사하고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데 이런 글들을 보면 그녀를 최고로 꼽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눈 그리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과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이 그녀로 하여금 등단 30년이 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내가 그녀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그리는 범죄소설에는 인간미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범죄에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범죄 자체의 잔혹성이나 난폭함보다는 범죄의 동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요즘 유행하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크라임 스릴러나 범죄 동기가 일반인의 시각에선 이해하기 힘든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마를 다룬 소설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 책 세상의 봄도 그렇다.

기타미 번의 6대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의 느닷없는 실각으로 그를 곁에서 돕던 수석 요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는 와중에 한직에서 물러나 외딴 촌에 은거하던 가가미 家 가 그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이혼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비를 돌보고 조용히 살고 있던 가가미 다키는 아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고코인에 요양을 이유로 유폐된 전 가주 시게오키곁에서 수발을 부탁받는다.

그녀가 기억하던 번주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 황폐해지고 약해진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던 것도 잠시 청년의 모습을 한 채 아이 같은 행동과 목소리를 하는 전 번주의 기이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밤마다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도 시게오키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제서야 전 번주의 병을 알게 되는 다키는 그녀를 수발들 사람으로 선택한 이유답게 그 모습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연민하게 된다.

서양의학을 배우고 온 번의 가문醫 차남 시로타 노보루와 어릴 적 시게오키를 곁에서 지켜보고 보살펴왔던 기타미 번의 가로 중 한사람 이시노 오리베 그리고 다키는 본격적으로 시게오키의 병증에 대해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알고자 하지만 오랜 세월을 그렇게 다른 인격체와 함께 해왔던 시게오키의 방어벽은 높기만 해서 좀체 진전이 없는 가운데 우연히 고코인의 상징인 진쿄호의 수풀 속에서 어린아이의 백골을 발견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마침내 시게오키를 괴롭히는 병증의 원인을 찾을 실마리를 쫓아가다 오래전 그 병이 시작되던 때 기타미 번에 있었던 소년들의 실종사건을 찾아내게 되고 그 실종사건과 전 번주의 광증이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뿌리는 생각보다 깊었고 그 밑에는 공포와 수치심이라는 방어벽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깊이 파고들수록 자신들이 믿었던 이를 거부하고 그에게 느껴왔던 경애의 마음조차 한순간에 허무해지게 만드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해지지만 오랜 세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이 혼자서만 이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던 시게오키를 생각하며 고코인의 사람들은 힘을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에 드디어 응답하는 시게오키는 스스로 숨겨왔던 진실을 다른 모습 뒤에 숨지 않고 드러내면서 만천하에 추악하고 냄새나는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취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 사람이 가진 악의에는 바닥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세상의 봄은 아름다운 호수를 둘러싸고 있던 악취나는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번주라는 권력의 정점에서 한순간에 낙오되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시게오키라는 인물이 앓고 있던 병이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한 해리성 장애였고 그 병변의 원인이 극심한 공포에서 자기방어적인 성격으로 형성되기 싶다는 걸 이해한다면 그가 가진 비밀이 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리베를 비롯한 고코인들이 그 원인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근접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상당히 즐거웠다고 과연 어떻게 그 병을 치료할까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암울했지만 그런 무거움을 덜어줄 등장인물 스즈, 고, 다지마 한주로의 때묻지 않은 시선, 강직한 성품과 진심어린 마음은 이야기의 밸런스를 맞추고 세상 다시없을 악의를 끝내 끊어내고 스스로 일어서는 시게오키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리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 길지라도 끝내 봄은 오듯이 마지막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번과 그 번의 정점인 번주 그런 그의 곁에서 대를 이어 목숨 바쳐 헌신하는 가로들 그리고 요닌등 번 내의 복잡한 상하 계통이나 지금의 우리완 다른 이념과 번주를 향한 충성심등은 시대물을 읽을 때마다 늘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않고 헷갈리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내용을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는데 여기에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시게오키의 병의 원인을 추리해가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작가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다운 작품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미야베 미유키의 대단함을 실감했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