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폭풍이 부는 날 어느 섬에서 사라졌다. 유서까지 남겨 둔 정황상 자살로 보이는 이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복직을 앞둔 현수(김혜수)가 파견되었다. 남편의 외도와 법정 소송으로 큰 곤욕을 치렀던 그녀는 이 사건을 잘 마무리 하면 복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상사의 말에 섬으로 내려간다.
주민도 많지 않은 작은 섬에서 벌어진 사건에는 별다른 혐의점이 없었고, 소녀는 결국 자살을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녀가 그 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현수는 소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본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만 아무도 관심도, 도움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그런.
그리고 그렇게 끝까지 소녀를 따라가던 현수는, 마침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로부터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현수와 소녀, 그리고 소녀를 섬에서 보듬어준 또 다른 여인 순천댁 사이의 말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모두가 조금씩 성장/성숙한다는 이야기.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면서, 여성들의 고민에 집중하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다. 이런 걸 여성영화라고 하면 되는 걸까. 사실 영화의 도입부와 전개를 보면, 외딴 섬에서 지내는 소녀가 사라지는 과정을 두고 뭔가 음모가 꾸며지는 스릴러인가 싶었지만, 감독은 조금 다른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죽을 것처럼 힘든 날들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진정한 관심과 이해라는 것.
사실 그런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남녀의 성차가 어디 그리 중요할까(실제로 우리나라의 자살자 성비는 남성 쪽이 2.5배 가량 높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을 넘어 분노에 이르고 있다는 말들이 들린다. 코로나 블루에서 코로나 레드로. 온갖 사소한 이유로, 아니 이유조차 없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방임과 학대에 관한 소식도 특별히 더 자주 보도되는 것 같다.
나 하나 살기도 빠듯하니, 다른 사람의 사정까지 봐줄 여유가 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는 세상은 과연 살기에 좋은 곳일지 의문이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도움이 되는가만으로 평가하는 사회는 그 근본부터 흔들리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수많은 사람들의, 제대로 보상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희생 위에 다져진 것이니까.(자녀를 위한 부모의 수고와 친구를 위한 양보, 단지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희생은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한 명의 소녀가 사라졌는데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영화 속 현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 자신의 일에도 무관심할 수 있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소녀가 범죄자 아빠를 두었다고 해서, 소녀가 딱히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소녀가 심리가 불안정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도 영화 속 사람들처럼, 너무 빨리 덮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뉴스에는 날마다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채 며칠이 지나기 전에 또 다른 뉴스에 가려지고 만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문제가 해결되었을 리는 만무한데도 말이다. 슬픔과 괴로움은 서둘러 묻고 잊어버리고, 좀 더 밝고 즐거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적 환상에 세뇌되어버린 결과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서둘러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동안, 정작 소외되는 건 우리 자신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은 수백 대의 CCTV보다 우리를 더욱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런 세상은 한 사람에 대해 조금 더 끈질긴 관심과 기억을 하는 곳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