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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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과 간략한 내용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야 처음으로 손에 들어본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아, 어쩌면 좀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너무 쉽게 판단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적합한 시기에 손에 든 것일 지도.


책은 한 배교한 가톨릭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라는 이름의 신부가 현지에서 신앙을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던 그의 제자들이 진상을 확인하겠다는 일념으로 직접 일본으로 향했고, 두 명의 신부들이 은밀히 일본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혹한 탄압을 시행 중이던 일본 정부에 의해 결국 잡히고, 그들의 선배이자 스승이 처했던 운명에 똑같이 처하게 된다. 가난하고 무식한 일본의 신자들이 자신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른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배교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명한 선교사의 배교 소식은 로마 교황청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그건 단지 한 사람의 배교가 아니라 “당시 유럽인의 눈으로 보면 세계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은 나라”에 의해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13)이다.


자신들은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멋있는(!) 순교를 선택할 거라고 여기며 일본행을 감행한 젊은 신부들은, 그 땅의 상황에 대해서 놀라고 당황한다. 교묘하게 그들의 배교를 유도하는 일본의 관리들은 신부들을 직접 고문하는 대신, 그들을 의지하고 있던 신자들을 잔혹하게 괴롭히고 죽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과연 옳은 모습일까.


작가가 만들어 낸 이 독한 딜레마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작품 속 로드리고의 선택을 두고서 그가 정말로 배교를 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의견이 분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성화를 밟는 것을 누가 매도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가 모든 세상의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누군가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는 곧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게 될 것이다. C. S. 루이스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우리가 지나치게 먼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심을 두는 반면,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로드리고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을 따르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로드리고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나름의 판단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지 성화를 밟는 것뿐인데 뭐가 그리 어렵겠느냐고 힐난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 어떤 행동은 단순히 신체를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또, 우리의 몸과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무엇도 아니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신념을, 믿음을 꺾으려고 하는 함정을 파는 사람 대신, 그 함정에 빠진 사람을 비난하는 행위 역시 옳지 못하다. 로드리고가 처한 상황은 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 책임을 오롯이 그에게만 돌리는 것도 무자비한 일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침묵에 곤란해 한다. 그분을 믿는 이들이 이렇게 수없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왜 그분은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성경 속 사건들처럼 오늘의 일들에도 그분이 나타나셔서 악인들을 처벌하고 의인들에게 상을 주셔야 하지 않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저 밖에서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통의 신음을 내뱉으며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이들을 구해주시는 게 옳지 않은가.


하지만 이 질문은 결국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한다. 성경 속 욥은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낸 후 하나님의 보상을 받았지만, 로드리고는 스스로 배교했다는 죄책감과 열패감에 빠져 영혼 없는 생활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욥과 같은 보상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서서히 사그라졌을까.


이 역시 독자에 따라 다른 결말을 떠올릴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어떤 의미로) 결말을 직접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게 작품의 완결성을 더욱 높여주는 느낌이다. 재능 있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마무리다.


아마도 이 책과 그 주인공에 관해 내리는 다양한 평가는,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이 갖고 있는 신앙을 드러내는 진술일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또 어떤 모양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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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지음, 홍종락 옮김 / 무근검(남포교회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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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가 아니라 도입을 다룬 몇 페이지만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이 충분히 훌륭해서 꼭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 것이라는 걸 알았다. 도입장에 담긴 내용은 다음 아닌 어떻게 책을 잘 읽을 것인가에 관한 내용들이다. 문학은 그 자체로 덕을 구현하는 하나의 도구가 수 있으며, 어떤 작품을 잘 읽어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덕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오독”에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에 관해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제안한다. 우린 흔히 어떤 전문가들이 소개해 준 책이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비평가들의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종종 그 기준이 책을 읽는 바른 기준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순서를 바꿔보자고 말한다. 즉, 어떤 독자가 특정한 책을 읽고 좋은 영향을 받았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 아니겠느냐는 제안이다.


루이스의 이 주장에는 문학이 갖는 어떤 종류의 힘이 전제되어 있다. 문학은 사람을 좀 더 나은 존재나 상태로 만들 수 있다.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기능을 하는 건 아니다. 또 모든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충분히 좋은 문학을 충분히 제대로 읽어낸다면, 우린 그 안에서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사실 이건 새로운 주장은 아니고, 오히려 책에 관한 매우 오래된 관점이다. 책에서 뭔가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도덕주의적 비평’ 같은 명칭으로 멸시되는 오늘날의 상황이야 말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책은 소설을 소개하면서 그 안에서 한 가지의 덕에 관한 감상/혹은 묵상을 읽어나가는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네 개의 장에서는 분별과 절제, 정의와 용기라는 네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두 번째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덕목을, 마지막 3부에서는 정결과 부지런함, 인내, 친절, 겸손이라는 다섯 개의 천국의 덕목을 다룬다.


소개되는 책들도 흥미롭다. “톰 존스의 모험”, “위대한 개츠비”, “두 도시 이야기”, “침묵”, “로드”, “천로역정” 같은 유명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들이 선정되어 있다. 읽어 본 책도 있지만, 이름만 알고 있던 책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 나온 책들은 한 번씩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서 여기에 소개된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매우 노련하게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각각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그 안에 담긴 도덕적 코드를 능숙하게 읽어내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오래된 덕목들에 관해 설명한다. 단순히 소설 속 캐릭터가 이렇게 말했다 정도가 아니라,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관점까지 읽어내니, 소개된 책들을 좀 더 깊이 읽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서도 인용되었던 두 명의 저자인 『덕과 성품』의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C. S. 루이스가 떠오르기도 했다.(이 정도면 개인적으로 최대의 찬사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실려 있는 열두 가지의 덕목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도덕적 가치들이다. 오래된 것을 무조건 낡고 효용이 다한 것쯤으로 여기려는 현대적인 태도를 넘어서려면, 단순히 이런 것들이 얼마가 가치 있는지를 설파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여기에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책 읽기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문학이 단순한 심심풀이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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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 극장
이와이 슌지 지음, 남상욱 옮김 / RYTH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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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인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경우가 좀 있을 것 같다나름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던 일본 영화감독이다이 책은 그가 틈틈이 영화를 한 편 찍고 편집하는 와중에 한 잡지에 기고한 영화 소개 칼럼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 제목인 쓰레기통 극장이 독특해서칼럼 제목들 중에 하나인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다아마도 이 책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소소하게 자신에게 의미있는 영화들을 소개한 작지만 소중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이건 첫 번째에 배치되어 있는작가의 어린 시절 텔레비전 영화 속 드라큘라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는 데서도 살짝 느껴진다.


책은 영화를 소개하지만단순히 영화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추억 이야기를 함께 풀어놓는다아니 오히려 이쪽이 주인 것 같고영화는 대충 가져다 붙인 것 같을 때도 있고..




영화 소개 칼럼 뒤에는 그걸 쓰고 있는 작가의 지금 상황에 관한 글이 주절주절이어진다영화 촬영 현장에서 짬을 내 글을 쓰고 있기도 하고미국까지 넘어가서 편집과 후반작업을 하는 중이기도 하고영화가 완성되어 시사회가 시작되었지만정작 감독 자신은 또 다른 작품을 찍는 중이라 첫 상영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뭔가 소소하고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영화 감독의 이야기를 살짝 엿보는 것 같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 두 번째 부분의 편집을 왜 이 모양으로 했는지 모르겠다본문보다 글씨체도 훨씬 작고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폰트를 사용했다뭔가 덜 정형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나 보다 싶지만폼을 내더라도 책은 읽는 사람 눈이 편하게 하는 게 가장 기본이다내가 편집장이었다면 이런 편집은 무조건 반대했을 듯.



아무래도 연배가 나보다 높은 감독인지라익숙하지 않은 영화도 많다하지만 최신의 책이 늘 좋은 게 아니듯오래된 영화들 중에서도 고전처럼 좋은 영화들은 늘 있는 법이니까영화에 관심이 좀 있다면 즐겁게 볼 수 있을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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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오후의소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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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흥미로워서 뽑아든 책이다. 큰 판형의 그림책이어서 선 자리에서 금세 다 읽어버렸다.



이야기는 깔끔한 한 쥐를 주인공으로 한다.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중 동전을 발견한 쥐는 그 동전으로 양배추를 구입해 작고 예쁜 집을 마련한다. 그러자 많은 동물들이 쥐에게 청혼을 했고, 번번이 거절을 하던 쥐는 하필 노래를 잘 한다는 이유로 작고 약한 고양이와 결혼을 한다.


문제는 그 이후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쥐를 위해, 상처를 꿰맬 실을 구하러 떠난 고양이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거대한 고양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아내의 입에 난 상처의 피를 핥는 순간... 너무 맛있었다.





결말이 약간 끔찍하다. 옛날이야기들 중에는(이 동화는 스페인의 오래된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의외로 이런 잔인한 면이 있다. 오래된 이야기들에는 각각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되기 마련이다. 한때 이 이야기는 순종적인 여성을 길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이야기에는 ‘잘난 체 하는 쥐’가 주인공이었고, 주인공의 그 잘난 체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라는 명확한 스토리.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이 옛 이야기에 살짝 각색을 더한다. 잘난 체 하던 쥐는 깔끔하고 청결한 쥐로 바뀌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라졌고, 자신을 깔끔하게 가꾸면서 집까지 마련한 능력 있는 존재로 바뀐다. 이야기 속에서 그 쥐가 했던 유일한 잘못은 나중에 자신을 잡아먹을 고양이를 남편으로 선택한 것 뿐. 결국 이야기는 남편의 폭력에 희생된 여성의 구도를 띤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 하는 건, 책에도 실려 있는 작가와 그림작가의 말이다. “고양이 발톱 사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쥐들에게”(글 작가), “이것은 사랑, 학대, 젠더, 사회,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그림 작가) 대충 느껴지지만 작가들은 완전한 페미니즘 동화로 원래의 이야기를 바꿔놓은 셈이다.



다만 이야기가 충분히 잘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여전히 쥐가 남편을 선택한 어리석은 기준(노래를 잘하는 것)을 정하는 데는 누구의 강요나 영향 없이 본인이 정한 것이었다. 또,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건 본성이지 교화의 차원이 될 수도 없는 부분이다. 호랑이에게 토끼와 사이좋기 지내야 하니 풀만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또 다른 폭력인 것처럼.


원래 존재하던 이야기에 어떤 의도를 갖고 지나친 윤색을 가해 원작을 훼손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최근 디즈니에서 만든 인어공주 실사영화를 둘러싼 논란에서 충분히 드러나기도 했다. 젠더와 사회, 폭력과 학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이런 주제는 충분히 다룰만 하다), 좀 더 신선한 새로운 이야기를 잘 만들어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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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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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었던 다른 책에서 이 책이 언급되기에 손에 들게 되었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책이 다른 책을 소개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그 원래의 책이 꽤 좋은 느낌으로 와 닿았다면 그 책이 소개해주는 또 다른 책도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런 식의 독서법은 제법 괜찮은 기회다.


이 책은 겨우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폴 칼라니티가 쓴 일종의 회고록이다. 돈과 명성 같은 목표를 잡기 위해 몰두하던 동기들과 달리 그는 일찍부터 뭔가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이런저런 탐색 끝에 그가 발견한 건 의사라는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의 일을 일종의 소명처럼(당시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해냈다.


오랜 레지던트 생활을 거의 끝내고, 그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이제 안정적인 직장과 보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기가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예상치 못했던 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시작된 투병생활. 중병에 걸린 환자들에게서 가끔 나타나는 초반의 기적적인 회복기를 맞으며 몇 개월간 의사로의 복귀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버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다. 질병은 어느 정도 인과요인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발적인 사건인지라,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삶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기곤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를 꼽자면, 역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사실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사람들에게서는 의외로 삶에 대한 특별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곤 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인간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삶에 대해 좀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존재인가 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단지 암 선고 이후에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구도자 같았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연구”(53)에 천착하면서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가치가 있을까”를 물었다.


결국 그렇게 의사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리고 제법 훌륭한 의사로 일해왔던 것 같지만, 훗날 자신이 환자가 되면서 여전히 자신은 환자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존재였음을 깨닫고 자책한다. 하지만 이런 자책마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나오는 것일 게다.




암에 걸리면서, 작가는 바쁜 일과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 기간 예전에 벗어났다고 느꼈던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날 의학은 과학의 최첨단 어디쯤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과학이 형이상학적인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는 바로 그런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기독교의 오래된 가르침이, 삶의 본질에 관해 무언가를 담고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가 남긴 후기 가운데 반가운 이름이 보인다. 바로 C. S. 루이스다. 그녀는 루이스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후 쓴 책인 “헤아려본 슬픔”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사별은 결혼의 자연스러운 단계 중 하나라는 것. 참 울림이 많은 문장이다.



옛 라틴어 격언 중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삶을 좀 더 잘 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삶과 죽음에 관한 훌륭한 통찰이 많이 담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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