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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평점 :
소설은 두 가지 사회적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다. 하나는 어린 여성들에 대한 강간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소년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드라마 ‘소년심판’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걸 인상 깊게 봤던지라, 소설의 첫 장을 열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마지막 장까지 넘겼다.(이번에도 새벽까지 눈을 뜨고 있느라 다음날 종일 피곤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오겠다는 딸이 실종되어 결국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충격을 받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은밀하게 정보를 보내오는 인물(이 인물의 정체와 관련해서 마지막에 반전이 펼쳐진다!), 소년범에 대한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복수, 우연히 만난 아버지를 돕는 인물, 사건을 쫓는 경찰 등 이야기는 흥미롭게 진행된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반복해서 묻는 질문은 ‘정의’다. 정의란 법률로 정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법률이 정의를 반영해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다. 정의라는 건 법률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떤 법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정의다. 법률은 정의에 입각하게 제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어떤 법은 정의라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감각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범에 관한 처벌을 규정한 법이다. 수많은 십대 소녀들을 강간하고 그걸 영상으로 촬영해 지속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잔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범죄자의 나이가 어리니까 형량을 한없이 줄여서 금세 풀어주는 것이 지금의 소년법이다. 이것은 정의로운가?
법은(법을 집행하는 경찰은) 또한 범죄자들이 딸의 죽음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려는 아버지를 막아선다. 이것은 또 옳은 일일까? 책의 말미에 저자는 한 경찰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경찰이란 뭘까?” 히사쓰카가 입을 열었다. “정의의 편인가. 아니지. 법을 어긴 인간을 잡을 뿐이야. 경찰은 시민을 지키는 게 아니야. 경찰이 지키려는 것은 법률이지. 법률이 다치지 않도록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그렇다면 그 법률은 절대적으로 옳은가. 절대 옳다면 왜 그리 자주 개정하지? 법률은 완벽하지 않아. 그 완벽하지도 않은 법률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은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까? 인간의 마음을 짓밟아도 되나?”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교화라는 이름으로 프레임을 바꾸고 있다. 마치 그것이 문명국의 기본덕목이자, 인권을 보장하는 최선의 조치라는 식의 주장이 별다른 의심 없이 세뇌되는 듯하다.
그러나 인권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데서 시작된다. 도덕이나 윤리와 관련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동물에게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다. 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비인간적 대우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범죄자들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제대로 지우지 않으면서, 다시 말하면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대우하면서, 그것이 인권을 위한 조치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대다수의 시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소수의 학자들, 교수들에 의해 정설로 강요되고 있다는 점도 또 다른 문제고.
복수라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나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복수를 응원하게 되는데, 그게 우리 안에 있는 기본적인 윤리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범죄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책 속의 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말이다. 법이 그런 식으로 불균형하게 존재한다면 그로 인한 불안정은 점점 심해질 것이고, 마침내는 법 자체가 흔들릴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처벌에 관해서는 피해자가 당한 고통 만큼이라는 기본적인 원리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법이 설계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도 여러 난점이 존재할 테지만, 최소한 처벌의 목적에서 책임을 지게 하는 것, 즉 응보의 개념을 완전히 지워 버려고, 인간을 마치 로봇처럼 실험설계자들이 마음대로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은 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