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인간이 되었나 - 불, 요리, 폭력, 패션 그리고 섹스를 통해 본 인류 진화에 대한 색다른 탐험
애덤 러더퍼드 지음, 김성훈 옮김 / 반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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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점은 대체 무엇일까? 이런 고민에서 쓴 책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무척 다르기에 최상위 포식자임에도 많은 개체를 유지하고, 지구의 다른 좀을 쥐락펴락 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공통점도 많다. 우선 다른 생물들처럼 동일한 유전암호를 쓴다. 이 암호는 딱 네글자인 A,C,T,G다. 별개의 세포조직에서 생명체를 이룬다는 사실도 같으며, 많은 세포들이 공통의 매커니즘으로 환경에서 에너지를 추출한다는 점도 같다.  

 인간의 독특한 점으로 우선 도구에 주목한다. 도구의 정의는 좀 복잡하다. 동물이 자신의 힘을 연장해서 물리적 작용을 가하는데 사용하는 동물의 몸 외부에 작용하는 사물이란다. 주먹도끼부터 최신 스마폰까지 도구에 들어간다. 인간의 주요 특징으로 도구에 주목 할 만한 것이 동물중 도구를 사용하는 종이 겨우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구를 만들려면 예지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며 또 그것일 정교하게 운동제어 행위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복잡한 도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과 그로 인해 다시 영향을 받는 인간을 생각하면 도구는 인간의 주요 특징중 하나로 봐도 무방할 것 같긴 하다.

 다음은 큰 뇌다. 그런데 인간보다 큰 뇌를 가진 동물은 생각보다 좀 된다. 특히 대왕고래는 뇌무게만 8kg에 달한다. 그래서 체중 대비 뇌의 중량비유로 비교해본다. 이러면 좀 상위권으로 가긴 하지만 여기서도 돌고래들에 밀란다. 거기에 체중대비 뇌의 중량비유로 본다면 그 수치가 보다 나은 남성이 여성들보다 똑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오질 않는다. 그러면 뇌의 밀도나 뉴런의 수다. 이것도 좀 낫긴 하지만 몇몇 미생물은 뉴런의 수가 인간보다 많으며 새의 경우 작은 뇌에도 엄청나게 밀집해있다. 이것이 새가 작은 뇌의 크기에도 우수한 지능을 가진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의 뇌는 제법크지만 그것만으로 특별하다고 보기 어렵단 결론이 나온다. 뇌의 크기와 밀도, 체중대비 상대적 비중, 뉴런의 수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인간은 최고는 아니지만 이 지표에서 모두 최상위권이다. 거기에 진화과정에서 획득한 도구의 제작과 사용이 용이한 손의 형태와 이것을 가능하게 한 직립보행, 거기에 문명을 전달하는 말을 할수 있는 능력,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인간의 뇌를 최고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만일 돌고래에게 말을 할수 있는 능력과 손이 주어졌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독특하게도 성행위다. 모두 동물이 다하는 것이지만 인간만의 독특한 점이라면 인간의 경우 성행위가 지나친 낭비라는 점이다. 성행위의 목적은 마땅히 번식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성행위 대비 번식 성공률이 고작 0.1%에 불과하다. 1000번의 성행위에서 단 한명의 아이만 태어나는 셈이니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따로 없다.

  인간의 성행위가 독특한 점은 스스로 하는 자위행위와 동성애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의외로 이는 동물에게서도 많이 나타난다. 영장류중 80종의 수컷에게서 그리고 50종의 암컷에게서 자위행위가 관찰되었다. 돌고래의 성행위는 더 기가막힌다. 한 수컷 돌고래는 바다장어를 자신의 성기에 감아서 자위를 한다고 한다. 손이 없으니 별짓을 다한다. 돌고래의 성행위는 더 경악스러운데 수컷의 무리들이 암컷 하나를 몰아넣고 집단 강간을 한다. 동물에게 이 표현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저자도 의문을 제기했지만 하여튼 그렇다.

 동성애의 경우 인간만의 특징으로 착각하지만 동성애는 자연에도 만연하다. 동성과 성관계를 오히려 더 많이 하는 경우도 쉽게 관찰된다.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성애가 자연계에 만연한 것에 대해 진화학자들은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왔는데 몇가지 단서가 있다. 우선 완전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개체는 드물다는 것이다. 동물의 성적 성향은 완전한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어느 한점에 위치하고 그렇다보니 동성애적 성향이 강한 개체도 이성애를 완전거부하는 경우는 드물어 자손이 남겨졌다는 것이다. 다음은 게이삼촌가설과 할머니가설이다. 벌이나 개미처럼 자신이 번식을 하지 않더라도 유전적 유사도가 높은 형제자매의 번식을 돕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과 유사한 생각이다. 실제로 동성애 남성의 할머니, 고모, 이모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동성행위가 유전적 적합도를 높이는 행위라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도 동성애가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답은 주지 못한다. 애초에 진화엔 목적이 없기에 그냥 생겨난 것이 위와 같은 요인으로 유지되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지니치게 높은 번식 의지에 비해 교미 기회가 적어서, 혹은 암수의 형태적 구분이 아주 극단적으로 완벽하진 않으므로 외모적 유사성에 의한 착각? 일 지도 모를일이겠다.

 마지막은 인간의 진화과정이다. 진화엔 목적이 없고, 방향도 없기에 인간의 진화만이 특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 만들어진 면에는 독특한 우연과 특별한 면이 있다. 우선 우리 유전체의 8%는 우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다. 놀라운 점인데 바이러스는 DNA없이 RNA만으로 자신의 유전체를 다른 생물세포를 통해 복제한다. 이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 유전자체 다른 생물이 꾸준히 침투해온 것이다. 실제로 태반은 4500만년전 감염에 대한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바이러스 유전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반은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 기능의 획득으로 더 잘 기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생쥐는 우리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이는 다른 바이러스로부터 다르게 얻은 것이다. 또한 인간은 염색체가 23쌍인데 다른 영장류들은 대개 24쌍이다. 60-70만년전 아마도 과거 2-3번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선조가 생겨났는데 그래서 지금 인간의2번 염색체는 유독크다. 전체 DNA의 8%나 되고 12개의 유전자가 있다.

 말을 하게하는 FOXP2유전자도 그렇다. 유전자는 복제를 여러개 해두는 경향이 있는데 영장류에서 이 유전체 복제가 유독 쉽게 일어난다. 실제 우리 유전체중 5%가 복제본이며 그 중 무려 삼분의 일이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여기서 다양한 변이가 일어나게 되어 진화가 촉발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FOXP2 유전자가 다른 생물에 비해 많다. FOXP2유전자는 오래된 것으로 다른 동물들이 내는 소리와 연관한다. 인간은 여기에 더 많은 변이가 일어나 말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이 말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목뿔뼈란 다양한 근육과 인대를 연결하는 독특한 뼈가 필요하고 혀가 필요하며 인지, 추상, 묘사능력을 갖춘 섬세한 심리적 기반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말을 듣고 해석할 청각적 장치와 두뇌 장치 말이 전달될 공기가 필요하다. 유전자 하나만으론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책은 다양한 인간의 독특성에 주목한다. 분명 인간이 독특한 것은 분명하나 인간을 그렇게 만든 많은 변화는 진화과정속에서의 우연과 그것을 촉발한 환경, 그리고 여러개가 서로 이를 뒷받침하며 일어났다. 도구는 분명 독특하지만 직립보행으로 인한 손의 독립, 그리고 도구를 쥐고 개발할수 있는 엄지방향의 변화가 필요했다. 거기에 큰 뇌와 도구 발달을 가속화하고 전달할 언어도 필요했다. 이 모든게 생물학적 우연으로 인한 진화기반과 문화가 갖이 작용하여 일어난 셈인 거시다. 결국 인간은 매우 특별하면서도 전혀 특별하지 않은게 책의 결론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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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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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블로그]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의 그림 중 세한도라는 것이 있다. 바로 요것인데, 국보 180호라고 한다. 그림은 썰렁하고 황량하기 그지 없다. 느낌상 겨울이 분명하고, 집이라고 하나 있는데 문하나가 전부고 대충 그린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리고 사람도 동물도 하나 없다.

 이번에 본 책은 이 세한도의 탄생배경에 관한 책이다. 김정희의 삶과 이상에 대해 알수 있었던 책으로 자연히 세한도는 그 연장선에 있다. 김정희는 한때 잘나가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영조와 인척지간으로 정조때만해도 가문의 위세가 자못대단했다. 하지만 영조 사후 안동김씨가 득세하고, 자신의 집안이 그 반대 쪽에 위치하면서 수난이 시작된다. 1830년에 아버지는 전라도의 고금도로 그리고 1840년대에는 자신이 무려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모함을 받아 일전에 숱한 고문이 있었으며 그 결과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작마저 박탈된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본인의 목숨을 건지고 제주도로 귀양 간 것이 다행이었다.

 세한도는 귀양생활중 김정희가 남긴 그림이다. 김정희는 젊어서부터 그림과 북학에 관심이 많았다. 1644년 조선이 물심양면으로 사대해온 명이 망한다. 우리는 청에 당했어도 설마 명까지 하던 조선인들에게 명의 멸망은 충격이었다. 특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의 충격이 컸다. 그도 그럴것이 일단 사대하고 배울 대상이 사라졌다.  도덕이나 학문적으로 완벽하다고 느꼈던 나라가 일개 야만민족에게 망한 것이다. 이런 사태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우선 명의 멸망은 도덕적 쇠퇴와 그로인한 사상적 혼란에서 찾았다. 성리학의 피상적인 도학적 공리공론이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후 학문의 흐름은 경학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실용적인 경세의식을 강조한다. 때문에 경학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고증적 방법론이 떠올랐고, 실용적인 연구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다. 조선의 실학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처음에 조선인들은 무관심했다. 청은 야먄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명의 잔존세력이 결국 제거되고 청이 안정화하자 청문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주체는 정조였다. 그는 청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북학이 시작되었고, 청의 주요 지식인들이 사망한 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그들을 공부하던 조선인들에게 그들과 현시대를 함께하며 학문을 연구하자는 병세의식도 자리잡았다. 정조 사후에도 북학의 유행은 가속화하였고, 중국 북경에 다녀오는 연행은 조선 지식사회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게 된다. 인싸의 필수 요소가 된 것이다.

 당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화를 중시했다. 그림과 시를 표현방법만 다르지 하나로 보고 함께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사회는 시를 중시한 반면 그림은 천시했다. 때문에 연행을 통해 서화와 시를 모두 중시한 추사 김정희는 사실상 조선에서 최초로 학예일치를 이룬 사람이 된다. 전통시대 그림은 전문화가나 민간에서 그린 그림과 문인들이 그린 그림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문인들이 그린 문인화는 북종화와 남종화로 구분하는데 남종화는 사물의 형상보다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그래서 당연히 남종화가 된다.

 추사는 연행을 통해 짧은 만남이었지만 옹강경이라는 당대 최고 학자의 제자가 된다. 완원이라는 학자와도 교분을 쌓았다. 추후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학문적 교류가 계속되고 추사의 학문적 깊이는 더해갔다. 추사는 학문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작업을 점차 연구해갔다. 당대의 두부의 시를 알고 싶다면 명청대에서 대표작에서 시작해, 송대, 원대, 그리고 두보로 접근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두보의 아류가 되지 않고,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같은 경지에 오를수 있다고 본 것이다.

 추사는 호 가 무척 많았다. 무려 백개에 달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이름에 관한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 현대인은 하나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만 과거의 양반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태어나며 어릴적 이름은 아명이 주어진다. 아명은 대개 깊고 큰 의미보단 다소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이름이다. 그러다 성인식은 관례를 하게되면 우리가 아는 이름이 부모로부터 주어진다. 김정희가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주로 스승으로부터 '자'가 주어지며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그에 걸맞는 '호'를 붙여준다.  자신의 이름이 성인이 되어가며 부모로부터 주어지다가 스승 및 친구 자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이름짓기는 주체성의 확립이자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며 그린 것이다. 그는 유배지로 향할적만 해도 자신의 친우가 안동김씨의 일파중 하나여서 오래지 않아 풀려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유배생활 3년만에 죽자 희망은 사라진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도 하나하나 교류가 끊어져간다. 정계에서 안동김씨들의 위세는 사그라들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자신이 추천했던 이상적이란 역관만이 추사에 최선을 다한다. 연행을 자주다니는 직업이다보니 추사가 원하는 청의 책이나 서화등을 구해준다. 추사는 이상적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에게 준다.

 세한도는 당대 그림들과는 좀 다르게 조선의 종이로 만들어졌다. 황량한 마음을 사치품은 중국 종이에 담을 수 없어서다. 또한 종이를 이어 붙여 길게 그렸다. 나무는 네 그루엔데 노송인 소나무는 종을 알 수 있지만 나머지 3종은 침엽수일 뿐 알수 없다. 소나무나 잣나무등 침엽수가 겨울에도 버티기에 사대부로 부터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오래 사랑받았다. 노송은 보통 추사자신으로 보는데 아직 소나무이지만 오랜 유배로 꺾이고 망가지며 외로움이 느껴진다. 노송의 가지로 제목과 인장이 연결된다. 이런 독특한 인장으로 인장도 세한도에선 작품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상적은 이를 북경에 가져간다. 당대 중국학자들은 워낙 유명했던 추사와 그의 작품 그리고 이들의 우정을 보며 감탄한다. 세한도의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그림이 더욱 쓸쓸히 느껴진다. 세한도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처량함과 그러면서도 아직 굴하지 않음 그리고 친우에 대한 우정이 담긴 그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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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속 마을 활동 -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체험활동으로 배우는 경제 이야기
문경민 외 지음 / 우리교육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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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의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교육현장이 실생활과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 있다. 공부할때마다 학생들은 말한다. 대체 커서 쓰지도 않을 이런 복잡한 공식과 문제, 지식을 어째서 외워야 하냐고. 딜레마가 아닐수 없다. 각 학문은 인간문명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전문화가 되며 각 학문간의 장벽이 생기고 그게 교과로 반영되어 학교현장에서도 분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학생의 발달단계와 맞지 않으며 그들과의 삶에서 멀리 떨어지므로 흥미도를 떨어뜨리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간혹 사회현실의 문제를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을 만들어냈다. 시뮬레이션이나  프로젝트 학습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리고 '교실속 마을 활동'이란 이 책은 우리가 사회의 경제체제를 교육현장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실행한 것인데 마을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평등마을과 자유마을, 공정마을이다. 완전 상응하진 않겠지만 각각 공산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 그리고 평등을 강화한 수정자본주의 경제체제라고 볼 수 있겠다.

 학습의 순서는 평등마을, 자유마을, 공정마을의 순이다. 왜 평등마을이 먼저일까 생각했는데 저자는 평등마을이 운영체제가 가장 단순해 학생이나 교사가 교실 속 마을활동에 적응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실 속 마을엔 법이 있다. 헌법과 기본법, 규정이다. 헌법은 우리가 마을 활동을 하는 주요 가치나 목적이 수록된다. 기본법은 각 경제체제에 대한 이야기와 시스템, 그리고 규정엔 직업과 상금과 벌금, 경제시스템별 규정이 수록된다.

 각 마을엔 실제 경제체제처럼 토지와 노동, 자본이 있다. 토지는 교실이나 아이들의 자리, 노동은 직업과 사업을 통한 노동, 자본은 마을화폐가 된다. 아이들은 마을 화폐를 받는다. 받는 방법은 직업을 통한 노동이다. 각 마을 활동에서 직업을 택해 일하거나, 수업수당으로 교사로부터 임금을 받는다. 그외 교실에서 잘한 일에는 상금을 잘못한 일에는 벌금을 부과한다. 파산한 아이들은 다음 마을활동까지 참여가 중지된다. 그리고 각자가 벌어들인 화폐는 개인의 마을 통장에 기입되며, 감사담당이 이를 점검한다. 회계조작시엔 가장 큰 벌금이 부과된다.

 평등마을에선 공산주의 경제체제인 만큼 직업이 모두에게 주어진다. 즉, 실업이 없다. 그런데 하는일은 모두 다른데 임금이 모두 같다. 장사를 하는 아이들도 물건을 아무리 많이 팔아도 같은 급여를 받게 된다. 세율은 높다. 임금의 20%를 세금으로 내야한다. 토지도 공공개념이라 교사가 자리를 지정해주며 토지의 판매도 금지되고 토지세도 더불어 없다. 그리고 더불어 매일 생활비를 내야한다.

 자유마을에선 토지 경매부터 시작된다. 교사의 진행으로 아이들간 토지 경매을 통해 토지가 낙찰된다. 그런데 토지세는 없다. 토지에 의한 불로소득의 폐해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설계다. 아이들은 친한 아이들끼리 앉고 싶어 큰 돈을 지불하고 자리를 구매한다. 그리고 다른 아이에게 팔기도 한다. 하지만 교실의 자리이기에 반드시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하니 자리를 팔아버린 아이들은 임대를 해야한다. 임대료는 물론 자리주인에게 낸다. 자리 가격의 10%에 달한다. 그리고 교사는 일부러 불로소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아이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고액으로 자리를 구매한다. 물론 양도소득세따윈없다.

 아이들은 직업도 경매로 결정한다. 평등마을 과는 매우 다르다. 수퍼나 문구점을 할때도 평등마을에선 교사가 지급하는 물건만 팔았지만 이젠 집에서 다양한 물품을 갖고 와 팔거나 사업에 이용할수 있다. 사업은 사전에 사업신청서를 내서 교사의 심사를 받고 할 수 있으며 친구를 고용하거나 동업도 가능하다. 아이들은 온갖 사업을 다한다. 수퍼에서 문구점, 만화대여점, 네일아트점, 복권점 등등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아이들은 첫날에 일주일 간의 급여를 받고 세금은 사전에 공제한다. 사업하는 아이들은 매일 번 돈을 정산해 다음날 세금을 낸다. 생활비도 평등마을때보다 크게 오른다. 아무래도 물가가 오를테니 말이다. 빈부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며 사업이 안되는 아이들, 경쟁도 심화한다. 같은 과자라도 아이들의 취향을 잘 파악하면 장사가 잘되며 렇지 않으면 실패한다. 재고도 문제다. 그리고 소비가 느니 이상스레 교실이 상당히 더러워진다.소비 증가로 인한 환경오염 체험인 셈이다.

 공정마을로 들어간다.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 자유마을에서 벌어들은 돈으로 순위를 정한 후, 그 순위에 맞게 돈을 차등지급한다. 빈부격차는 여전하지만 상당히 해소된다. 토지는 여전히 거래가 가능하지만 토지세가 매일 판매금액의 10%가 부과된다. 무거운 토지세에 불로소득을 노리긴 어려워지며 토지거래도 줄어든다. 다만 생산과 소비활동의 장려를 위해 임금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특이점은 공공사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돕는 활동 같은 것을 기획해 공공사업으로 창업이 가능하고 이경우 교사가 월급을 지급한다. 또한 파산자를 구제하는 은행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은행은 파산자에게 일정금액만큼만 대출을 허용한다.

 이 경제활동에 참여한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로 평등마을 보다는 자유마을을 선호했으며 불로소득이나 환경파괴에 대한 분노노 상당했다. 공정마을로 이동하며 애써 번돈이 크게 무효화 되었을땐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짜내거나 부모님이 사업을 위해 물건을 대주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는 애들도 많았다. 부모님이 여러 물건을 사줘서 창업하는 것도 사실 금수저 흙수저 체험이 아닐런지.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자본주의의 핵심인 은행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인게 아쉬웠다. 평등마을은 그렇다 쳐도 자유마을 부터는 사업을 위한 대출기능 정도를 해줬으면 어땠을지 싶다. 그리고 이걸 확장해서 여러반이 마을 활동을 동시에 한다면 좋을 듯하다. 화폐 계산의 복잡성은 있겠지만 보다 큰 규모의 경제를 느낄수 있을 것이고 반마다 화폐를 다르게 한다면 환율의 경험도 가능할 것이다. 처음엔 1대1이지만 옆반의 물건과 사업이 더 재미난다면 환율은 금방 오를 것이니 말이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하면 이 활동에 필요한 모든 양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경제교육에 관심이 있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실제적이고 도움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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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1-21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 선생님이신지요? 그러시다면 이 책 읽는 분에게 항상 응원합니다. ^^

2020-01-21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래학교
EBS 미래학교 제작진 지음 / 그린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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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두고, 학교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건 전 세계적 현상이라 한국과 노르웨이, 인도, 싱가폴 네개의 나라 학생과 교사가 만나 미래학교를 만들고 그 결과물을 엮은 책이다. ebs책이니 다큐로도 나왔을 텐데 아직 보진 못했다.

 네 명의 교사는 고민했다. 수업은 어떤 교과를 할 것이며, 교육목표는 무엇인지, 교육과정은 어떻게 구성할 것이며, 미래 기술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리고 몇명의 학생을 가르칠 것인지에 관해서다. 답은 하나하나 정해졌다. 언어는 당연히 공용어인 영어, 장소는 주최측이자 IT 강국인 한국, 학생은 각 나라의 학생을 3명씩 총 12명을 선발, 교과는 STEM에 사회과와 예술등 인문적 요소를 추가한 한국의 STEAM을 교육목표는 미래 역량은 3C로 창의성, 협업, 의사소통이었다.

 교육과정 디자인이 다소 어려웠는데 미래 역량의 배양을 목표로 강의는 최소화하고 학습들이 스스로 협업하여 배워가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3C와 더불어 메타인지 능력과 PISA지수의 향상도 목표로 삼았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무엇을 아는지와 모르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는 능력이다. 자기주도적 학습과 비슷하다. PISA지수는 PISA에서 계발할 것으로 교과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다. 향후 해당 교과의 미래 학업성취도와 가장 관련이 높은 지수이며 한국학생들이 성적과 무관하게 대체적으로 이게 낮다.

 기술 수준은 3D 프린팅이나, 드론, 코딩을 적절히 활용했다. 하지만 미래 교육의 목표는 이런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런 기술과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다룰 컴퓨팅 사고력을 목표로 했다. 이런 부분의 한국과의 차이인데 한국의 부모들은 대개 이 기술자체의 습득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차례로 진행된다. 수학에서는 일상생활과의 관련성을 위해 지수함수 그래포와 수요공급곡선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수학과는학생들이 나이가 다르고 수준차가 많이 나 개별적인 상태파악이 힘들었는데 인공지능 학습을 통한 개별맞춤형 교육이 인상적이었다. 인공지능 학습은 중간정도 수준의 학생에게 가장 큰 효과를 보였다.

 다른 교과들도 비슷하게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워낙 역량달성을 위해 융합적으로 시도되니 교과간의 경계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미래의 성적표는 각 교과당 점수로 나타내는 객관식 시험이 아니고 해당역량을 달성하는 프로필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주목할 부분이다.

 수업을 마친후 학생들은 미래 역량 부분에서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향상되었다. 처음엔 미래학교에 대해서 높은 기술 수준을 배우는 것을 기대하거나, 아주 어려운 것을 배우는 것을 기대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미래 역량 자체를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함께 달성하는 과정을 거쳐나가면서 이를 획득해나갔다. 결국 미래 학교의 미래 수업이라는 것은 역량달성을 목표로 미래 기술을 도구로 활용해 학생들이 서로 협력하여 달성을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이를 교사가 개개인 혹은 협동과정을 돕는 것으로 보인다.

 무척 어려운 과제지만 이미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들이다. 책의 내용이 다소 얇아 자세한 수업과정을 알수 없어 아쉽다. 다큐를 보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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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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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사장 책을 모두 다 읽었다. 처음 나온 지대넓얕 시리즈 1-2권과 시민의 교양, 열한계단,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까지. 그리고 이번에 더 뭐가 나올게 있나 싶었는데 영화시리즈의 스핀오프처럼 과거로 돌아가 지대넓얕 제로 편이 나왔다. 다루는 시기도 앞으로 당겨져서 축의 시대다.

 채사장의 책은 쉽고 가독성이 무척 높은 편이다. 그래서 책의 주제가 무려 철학과 종교, 경제학, 사회과학, 과학 등 상당히 많은 학문을 총체적으로 다룸에도 대중적이고 판매량이 높다. 무려 200만권을 넘게 팔았다니 대단할 뿐이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종합적인 식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도 쉽게 썼다.

 책은 우주와 인간에서 시작한다. 나도 우주 관련 책을 가끔 보는 편인데, 볼때 마다 느끼는 점은 한결 같다. 신비롭고 광활하며 경이로운 우주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규모를 갖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성과는 그 광활한 우주가 심지어 여러 개일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다중우주론이다. 책에서도 상세히 다룬다.) 이렇게 우주는 스케일이 압도적인데 인간은 고작 우주의 천억개이상의 은하 중 하나의 은하에 속해있다. 그것도 아주 변두리에. 그리고 그것도 항성이 고작 하나뿐인 태양계에 속하고 태양계에서도 크기가 제법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많이 향상되었긴 하지만 이 지구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역시 다루지도 못한다. 이 작은 행성에서 서로간에 아둥바둥거리고 산다.

 이런 인간은 우주에서 정말이지 티끌만한 존재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도,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란 생각도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으론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이 책에서 기발한 생각을 제시한다. 우주라는 존재가 생겨나서 최초로 우주이자 우주의 일부인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고민하며, 더불어 그 과정에서 우주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주의 자기반성과정이 되는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인간이 지구상의 생물과 다른 가치를 지닌 점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식으로 자신에게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게 그런 비슷한 과정을 해준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우주자체로서 우주를 고민함으로써 우주를 가치롭게 하고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우주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주 자체인 인간도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이런 존재론적 의미 부여과정을 하는 것이 인간만이라는 가정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영화에 나오는 다른 외계인들이 이미 그것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한다고 해서 인간만의 값어치가 떨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에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유용한 학문적 발견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값어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역사는 일등만 기억하긴 한다.) 하여튼.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이 올바르려면 적어도 인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그냥 우주에 속하는 부속으로서의 일부가 아니라 우주와 자신은 하나라는 생각을 마땅히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매우 신비롭기도 하고 우리에게 익숙치 않으며 뭔가 잘못되거나 무속적인 생각마저 들게한다. 이는 우리가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사장은 사고중지란걸 하고 우리와 우주가 사실은 하나라는 생각을 해볼 것을 이 책으로 제안한다.

 이런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은 사실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최근 현대과학의 성과가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최신예 성과이면서 인류를 머리아프게 만드는 양자역학이 그렇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둘다 정확히 잴수 없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관찰자의 행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자는 파동이면서도 어떤경우는 입자처럼 느껴지는데 유명한 이중슬릿실험은 광자가 두 가지 성질을 모두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파동같던 녀석이 관찰 행위가 영향을 미치자 입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멀리 떨어진 양자가 동시에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받는 양자얽힘 현상은 의식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한다. 즉, 겉으론 크게 무관해 보이는 나의 나의 의식은 자아, 그리고 세계로서의 우주가 의식수준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인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의 과학적 근거가 된다.

 이런 신박한 생각으로 채사장은 과거 축의 시대에 드러난 인류의 일원론적 생각들을 고찰한다.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사실 우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축의 시대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 개체간의 물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워지고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다. 약탈과 경쟁, 전쟁이 난무했고, 서로간에 속이는 생존경쟁이 과거와 다르게 만연해졌다. 이런 시기 인간종에겐 당연히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축의 시대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불교, 유교와 도교, 기독교, 서양철학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베다와 우파니샤드다. 인도 아리아인에서 비롯한 것으로 베다가 세계의 생성에 관해 신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라면 우파니샤드는 정반대로 세계에 대해 철학적 설명을 하는 책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자아에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순수한 상태인 아트만이 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은 우주의 원리인 다르마에 의해 끝없이 윤회하는 존재이다. 윤회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카르마인데 우리가 아는 업보다. 윤회와 업은 우리가 아는 선악 개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안에서 거스름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자아로서의 나의 행위와 의지가 우주의 그것과 합치할때 윤회를 끊고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범아아일여라 한다.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띤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으니 불교에서는 아트만과 같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자아는 있지만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즉, 뭐라고 언어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우해서는 고성제와 집성제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상태인 멸성제에 도달해야하며 이를 위해서 도성제의 8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팔정도인데 팔정도의 정도는 단순히 바른 것이 아니라 중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중도는 단순히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니며 역시 자아와 세계가 서로 하나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체유심조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도덕경이 등장한다. 도덕경의 도는 우주의 진리이며 덕은 개인의 내면으로 자아다. 도가 우주의 법칙과 질서라면 덕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이처럼 노자는 인간의 근본 심성이 우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그런 면에서 범아일여를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유교는 도교의 이런 탈세속적 측면과는 다르게 보다 급하게 느껴지는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유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인인데 이는 인간사이의 실천덕목이다. 이처럼 유교의 가르침은 현실 가르침으로 실천적 학문으로서 우주와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측면이 상당히 빈약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는 도교 이외에도 불교라는 강력한 철학이 퍼진다. 유교의 학자들은 이런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태극도설은 음양론과 오행론을 접목하여 인간과 세계의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역시 이는 범아일여의 일맥과 상통한다.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생각의 서양에서도 일원론적 생각이 마침내 등장한다. 그것은 칸트에 이르러서였는데 칸트는 이성을 신봉하는 합리론과 경험을 신봉하는 경험론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합리론은 완전한 도구로서의 이성에 대한 증거를 댈수 없었고, 지식의 확장도 설명할수 없었다. 경험론은 완벽한 경험이란 없기에 결국 진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다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을 전제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를 내부로 옮겨다 놓는다. 즉, 눈앞의 외부세계는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삭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범아일여와 상통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나의 감각기관과 의식의 제약하에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칸트는 외부 세계를 기존의 물체와 구분해 물자체로 부른다.     

 이처럼 인류는 현대 양자물리학의 성과와 부합하는 일원론적 생각들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어왔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막혀 우리가 이를 오래도록 잊은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대 과학의 성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서양에 의해 촉발되었고, 일원론적 사고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도 이로 인함이다. 일종의 모순이랄까나. 앞으로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우주에 대해 더욱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록 일원론적 생각을 더욱 강해질 것이란 생각이든다. 우리가 복잡해하는 양자현상이나 양자얽힘등의 여러 문제는 몇차원 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아무것도 아닐수 있다. 3차원의 존재인 우리가 이차원 및 일차원을 거기 그려진 존재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잘 조종할수 있는 것처럼말이다.(소설 플랫랜드에 이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종이 위의 양쪽끝에 그려진 졸라맨 둘은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린 종이를 구부려 그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만나게 할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우주와 일체로서 우리가 속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 우주자체를 이해하고 깨닫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도구와 눈은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일원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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