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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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사장 책을 모두 다 읽었다. 처음 나온 지대넓얕 시리즈 1-2권과 시민의 교양, 열한계단,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까지. 그리고 이번에 더 뭐가 나올게 있나 싶었는데 영화시리즈의 스핀오프처럼 과거로 돌아가 지대넓얕 제로 편이 나왔다. 다루는 시기도 앞으로 당겨져서 축의 시대다.

 채사장의 책은 쉽고 가독성이 무척 높은 편이다. 그래서 책의 주제가 무려 철학과 종교, 경제학, 사회과학, 과학 등 상당히 많은 학문을 총체적으로 다룸에도 대중적이고 판매량이 높다. 무려 200만권을 넘게 팔았다니 대단할 뿐이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종합적인 식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도 쉽게 썼다.

 책은 우주와 인간에서 시작한다. 나도 우주 관련 책을 가끔 보는 편인데, 볼때 마다 느끼는 점은 한결 같다. 신비롭고 광활하며 경이로운 우주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규모를 갖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성과는 그 광활한 우주가 심지어 여러 개일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다중우주론이다. 책에서도 상세히 다룬다.) 이렇게 우주는 스케일이 압도적인데 인간은 고작 우주의 천억개이상의 은하 중 하나의 은하에 속해있다. 그것도 아주 변두리에. 그리고 그것도 항성이 고작 하나뿐인 태양계에 속하고 태양계에서도 크기가 제법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많이 향상되었긴 하지만 이 지구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역시 다루지도 못한다. 이 작은 행성에서 서로간에 아둥바둥거리고 산다.

 이런 인간은 우주에서 정말이지 티끌만한 존재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도,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란 생각도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으론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이 책에서 기발한 생각을 제시한다. 우주라는 존재가 생겨나서 최초로 우주이자 우주의 일부인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고민하며, 더불어 그 과정에서 우주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주의 자기반성과정이 되는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인간이 지구상의 생물과 다른 가치를 지닌 점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식으로 자신에게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게 그런 비슷한 과정을 해준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우주자체로서 우주를 고민함으로써 우주를 가치롭게 하고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우주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주 자체인 인간도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이런 존재론적 의미 부여과정을 하는 것이 인간만이라는 가정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영화에 나오는 다른 외계인들이 이미 그것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한다고 해서 인간만의 값어치가 떨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에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유용한 학문적 발견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값어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역사는 일등만 기억하긴 한다.) 하여튼.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이 올바르려면 적어도 인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그냥 우주에 속하는 부속으로서의 일부가 아니라 우주와 자신은 하나라는 생각을 마땅히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매우 신비롭기도 하고 우리에게 익숙치 않으며 뭔가 잘못되거나 무속적인 생각마저 들게한다. 이는 우리가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사장은 사고중지란걸 하고 우리와 우주가 사실은 하나라는 생각을 해볼 것을 이 책으로 제안한다.

 이런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은 사실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최근 현대과학의 성과가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최신예 성과이면서 인류를 머리아프게 만드는 양자역학이 그렇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둘다 정확히 잴수 없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관찰자의 행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자는 파동이면서도 어떤경우는 입자처럼 느껴지는데 유명한 이중슬릿실험은 광자가 두 가지 성질을 모두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파동같던 녀석이 관찰 행위가 영향을 미치자 입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멀리 떨어진 양자가 동시에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받는 양자얽힘 현상은 의식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한다. 즉, 겉으론 크게 무관해 보이는 나의 나의 의식은 자아, 그리고 세계로서의 우주가 의식수준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인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의 과학적 근거가 된다.

 이런 신박한 생각으로 채사장은 과거 축의 시대에 드러난 인류의 일원론적 생각들을 고찰한다.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사실 우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축의 시대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 개체간의 물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워지고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다. 약탈과 경쟁, 전쟁이 난무했고, 서로간에 속이는 생존경쟁이 과거와 다르게 만연해졌다. 이런 시기 인간종에겐 당연히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축의 시대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불교, 유교와 도교, 기독교, 서양철학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베다와 우파니샤드다. 인도 아리아인에서 비롯한 것으로 베다가 세계의 생성에 관해 신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라면 우파니샤드는 정반대로 세계에 대해 철학적 설명을 하는 책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자아에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순수한 상태인 아트만이 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은 우주의 원리인 다르마에 의해 끝없이 윤회하는 존재이다. 윤회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카르마인데 우리가 아는 업보다. 윤회와 업은 우리가 아는 선악 개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안에서 거스름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자아로서의 나의 행위와 의지가 우주의 그것과 합치할때 윤회를 끊고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범아아일여라 한다.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띤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으니 불교에서는 아트만과 같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자아는 있지만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즉, 뭐라고 언어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우해서는 고성제와 집성제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상태인 멸성제에 도달해야하며 이를 위해서 도성제의 8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팔정도인데 팔정도의 정도는 단순히 바른 것이 아니라 중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중도는 단순히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니며 역시 자아와 세계가 서로 하나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체유심조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도덕경이 등장한다. 도덕경의 도는 우주의 진리이며 덕은 개인의 내면으로 자아다. 도가 우주의 법칙과 질서라면 덕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이처럼 노자는 인간의 근본 심성이 우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그런 면에서 범아일여를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유교는 도교의 이런 탈세속적 측면과는 다르게 보다 급하게 느껴지는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유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인인데 이는 인간사이의 실천덕목이다. 이처럼 유교의 가르침은 현실 가르침으로 실천적 학문으로서 우주와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측면이 상당히 빈약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는 도교 이외에도 불교라는 강력한 철학이 퍼진다. 유교의 학자들은 이런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태극도설은 음양론과 오행론을 접목하여 인간과 세계의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역시 이는 범아일여의 일맥과 상통한다.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생각의 서양에서도 일원론적 생각이 마침내 등장한다. 그것은 칸트에 이르러서였는데 칸트는 이성을 신봉하는 합리론과 경험을 신봉하는 경험론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합리론은 완전한 도구로서의 이성에 대한 증거를 댈수 없었고, 지식의 확장도 설명할수 없었다. 경험론은 완벽한 경험이란 없기에 결국 진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다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을 전제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를 내부로 옮겨다 놓는다. 즉, 눈앞의 외부세계는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삭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범아일여와 상통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나의 감각기관과 의식의 제약하에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칸트는 외부 세계를 기존의 물체와 구분해 물자체로 부른다.     

 이처럼 인류는 현대 양자물리학의 성과와 부합하는 일원론적 생각들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어왔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막혀 우리가 이를 오래도록 잊은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대 과학의 성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서양에 의해 촉발되었고, 일원론적 사고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도 이로 인함이다. 일종의 모순이랄까나. 앞으로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우주에 대해 더욱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록 일원론적 생각을 더욱 강해질 것이란 생각이든다. 우리가 복잡해하는 양자현상이나 양자얽힘등의 여러 문제는 몇차원 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아무것도 아닐수 있다. 3차원의 존재인 우리가 이차원 및 일차원을 거기 그려진 존재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잘 조종할수 있는 것처럼말이다.(소설 플랫랜드에 이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종이 위의 양쪽끝에 그려진 졸라맨 둘은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린 종이를 구부려 그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만나게 할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우주와 일체로서 우리가 속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 우주자체를 이해하고 깨닫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도구와 눈은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일원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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