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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지옥이어서,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내 마음이 지옥이어서 어디서 살던지 그곳은 지옥일거라며 자조하면서 지내는 쪽이라,
언제부턴가 '행복하다'거나 '감사할 일이다'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 부질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가혹한 전쟁의 참상에 나도 모르게 '감사할 일이다' 라는 말이 나왔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
오늘 하루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순간에 충실해야 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 책은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를 읽다가 서효인 님의 서평을 보고 읽게 되었다.
1권을 읽으면서 좀 지루했었고 몰입을 하지 못했었다.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되어지는 것들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몰입을 하지 못한 또 한가지 이유는 챕터를 달리하며 마리로르와 베르너 패닝으로 화자가 바뀌는데,
처음엔 화자가 바뀌는 것에만 집중했었는데,
읽다가 중간에 이상하여 확인해 보니 연도도 전ㆍ후로 넘나들었다.
연도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뒤죽박죽인데,
이 두 화자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알게 되자,
책이 재밌다고는 할 수 없고,
아름답게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무엇인가? 벽이 있어야 할 곳인데 그녀 두 손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에서 테이블 다리 하나가 그녀 정강이를 후벼 파는 것이다. 거리에서는 자동차가 으르렁거리고, 하늘에선 나뭇잎이 속닥거린다. 피가 그녀 귓속을 으스스 흘러 다닌다. 층계참에서, 부엌에서, 하다못해 그녀 침대 옆에서도 어른들의 목소리가 절망을 토로한다.(1권 49쪽)
이 구절을 다음 구절과 맞물려 눈이 먼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얘기해도 좋을까?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다른 공감각으로 느낄 수 있고,
그렇게 다른 공감각을 사용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에 비교하여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말을 바꾸어 얘기하면 볼 수 있다는건 축복이고 사랑이다.
튤립 꽃밥 끝에 묻은 꽃가루는 가루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기름 방울 같다. 무언가를 실제로 만진다는 것은 그것-정원의 유럽산 단풍나무 껍질, 곤충 전시관에 있는 표본 핀에 꽂힌 사슴벌레, 제파르 박사의 작업실에 있는, 껍질 안쪽을 세심히 윤나게 닦아 놓은 가리비-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녀는 배우고 있다.(1권 53쪽)
다음 구절은 이 책에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랍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 목소리는 말한다. 뇌는 두개골 속 깨끗한 액체 속에 떠 있지, 빛 속에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뇌가 정신 속에 지어 올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뇌는 색과 움직임으로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 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1권 80쪽)
그러나 거의 매일, 특히 날씨가 푸근할 때, 사는 것은 그를 녹초로 만든다. 나날이 막히는 교통과 거리의 그래비티와 회사의 정책이, 상여금과 수당과 초과 근무 때문에 툴툴거리는 모두가, 서서히 뜨거워져 가는 여름철, 새벽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 폴크하이머는 광고판의 모질도록 눈부신 빛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이런 고독은 병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훤칠하게 열을 지어 선 전나무들이 폭풍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2-411쪽)
이 책을 읽으면서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런 의미에서 고독은 병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저 아래 식물원의 오솔길을 걸어 다니고, 바람은 생울타리를 누비며 송가를 부르고, 미로 입구에서 자라는 크고 늙은 삼나무들은 삐걱거린다. 마리로르는 그 옛날 에티엔 할아버지가 설명해 준 대로, 전자파가 미셸의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는 것을, 그들을 싸고 감도는 것을 상상한다.ㆍㆍㆍㆍㆍㆍ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패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늘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 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와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2권 459쪽)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추천했는지는 모르겠다.
전자파가 떠다니는 그곳으로,
여러종류의 메일과 예약 알림 서비스가 떠다니는 그 경로로, 영혼도 떠다닐지 모른다는 구절을 읽으며,
그래도 삶이 축복이라고 자위하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다.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이 연상되기는 했지만,
내겐 조금은 아쉬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