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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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을 읽다가 울컥하였다.

울컥한 대목은 이 대목이었는데, 울컥한 이유는 상상에 맡기겠다.

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와 그 노인의 아내의 묘소가 바로 이웃이다. 묘비를 보니까, 노인의 아내는 40대에 죽었고 자식은 없었다. 노인은 늘 혼자서 아내의 무덤에 왔다. 제사음식도 없고, 절도 하지 않았다. 낫 한 자루와 호미 한 개를 들고 와서 풀을 깎고 잡초 뿌리를 뽑았다. 그 묘지에는 넝쿨이 우거져서 봉분을 덮었다. 걷어내려면 한나절이 걸렸다. 노인은 힘이 부쳐서 자주 쉬었다. 나는 노인의 작업을 거들어주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노인은 무덤을 향해서 나 간다, 라고 말했다.(24쪽)

시동이 걸린 건 장기에서 象상을 잘 쓰던 사람 얘기에서 였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눈물을 찔끔 거리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꺼이 꺼이 울다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울기는 하였지만 마음 속에 애잔함이 남아있다기보다는,

오래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리하여 지금 황홀하고 행복하다.

이게 내가 김훈에게 바라던 글이고, 그런 맞춤한 김훈을 읽으면서 누리는 행복이다.

단정하고 똑 떨어지는 느낌.

입말로 쓰여진 것이 아닌데도,

읽다보면 소리내어 읽고 싶어지고,

그렇게 발음하다보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처음 연꽃이 등장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시각적인 연꽃이 등장하는게 아니라,

소리내어 읽히는 청각이 먼저 오고,

연꽃 내음 후각이 뒤따른다.

그리고는 이내 차례차례로 온갖 공감각이 잘 버무려져서 몰려드는 느낌이랄까,

흡족하게 온 감각기관을 열고 온몸으로 샤워하듯 받아들이면 된다.

 

'호수공원의 산신령'만 하더라도 읽고나면 호수공원을 사뿐사뿐 꽃이 등장하는대로 동선을 밟으며 산책을 한 느낌이 든다.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 어슬렁 거리는 느낌이 아니고,

슬립온 따위를 단정히 꿰어신고 또박또박 한걸음씩 내딛는 느낌이랄까.

모든 꽃이 지는 순간을 어슬렁거릴게 아니라,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듯이 또박또박 한걸음씩 내딛으며 온몸으로 누리고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쩜 이 책은 너무 젊거나 어린 사람들은 읽어도 그 맛을 모를 수도 있겠다.

나도 아들의 일을 겪지 않았으면, 매일 만나는 환자의 많은 부분이 노인인데도 불구하고,

김훈의 노년이 이렇게 깊숙이 이해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호수공원의 산신령' 속 노인이 듣던 레파토리는 남인수와 배호이다.

요즘 내 핸드폰 속 주요재생 목록은 최백호의 '아씨', 정미조의 '개여울', 김진호의 '가족사진' 따위이다.

 

이 글을 인용하며 책을 읽은 소감을 갈음하여야겠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76쪽)

 

매년 만나는 봄이지만 올봄은 유난히 흐드러진다.

그런 흐드러짐이 오히려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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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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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3 15: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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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9-05-02 20:08   좋아요 1 | URL
저만 이 봄에 눈시울이 붉어져 쌌는 건 아닌가보아요. 마음 뎁혀지는 글, 잘 보고갑니다-

sslmo 2019-05-03 15:5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면 봄에 피는 꽃들은 눈시울 붉히지 말라고 대신 붉게 흐드러지는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님의 붉어진 눈시울은 따땃한 햇볕이 어루만져 줄거라 의심치 않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5-02 2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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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3 1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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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0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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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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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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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6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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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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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7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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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7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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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1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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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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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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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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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1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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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면술사 : 마크 트웨인 단편집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3
마크 트웨인 지음, 신혜연 옮김 / 이소노미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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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을 챙겨듣기 위하여 팟캐스트를 검색하다가,

'지.라.시.'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거기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라는 코너 시작 부분에 웃음에 관한 격언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격언 한줄을 마크 트웨인이 담당해도 좋겠다 싶었다.

책의 끝부분 편집 여담에 등장하는 "인간에게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웃음"(205쪽)이라는 인용구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여러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책이지만,

내가 고전을 아우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재미없었다.

이 책의 덕목으로 얘기되는 '덜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번역' 이,

내겐 약간 겉돌게 여겨졌다.

책의 처음 등장하는 '최면술사'의 경우, 화자가 어린 남자 아이 정도되는 것 같은데,

내겐 여성의 어투로 읽혔다.

누가 내게 어린 남자 아이와 여성의 어투가 어떻게 다르냐고 한다면 딱 꼬집어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린 남자 아이의 호기로움과는 비교되는 여성의 섬세함을 지녔달까?

암튼 내겐 그렇게 읽혔다.

'최면술사'의 일부이다.

힉스는 타고나기를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덕목이 없었거든요. 몇몇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힉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 대로 얘기했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았고 최대한 살을 덧붙여 얘기했어요. 힉스는 상상력이 형편없었지만 나는 남들보다 갑절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였거든요. 타고나길 차분한 성품인 그와 달리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죠. 반면 나는 내가 본 환상에 사전에 나오는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붓고 혼까지 남김없이 다 털어 넣었답니다.(25쪽)

 

앞의 여덟편은 산문이고, 뒤의 두편은 단편 소설이라는데,

사실 그 경계도 잘 모르겠다.

 

또 하나는 공들여쓴 것 같은 글과 대충 쓴 것 같은 글이 혼재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정도로 글쓰기가 쉬운가, 글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운가, 하는 씁쓸한 생각을 했다.

내가 마크 트웨인에 대해선 1도 모르면서 오늘날의 정서로 옛날 글을 판단하려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태어나기까지 편집과 출판에 들인 공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단정한 하드커버와 띠지, 책배의 파란색 컬러링 따위는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책배의 컬러링은 수작업이라는데,

1쇄독자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2쇄부터는 없어진단다, 아쉽다.

 

암튼, 마크 트웨인은 해학과 기지의 작가로 알려졌는데,

난 이 책에서 해학과 기지의 뉘앙스를 잘 읽어내지 못하였다.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를 쓴 마크 트웨인의 다른 면을 보고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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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한자 - 한문 선생님의 교실 밖 한문 수업
김동돈 지음 / 작은숲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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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뜨문뜨문 읽는다.

예전처럼 두껍고 글자 작은 책을 내처 읽지는 못하고,

한권을 들고 뜨문뜨문 음미하듯 읽는다.

읽었던 곳을 되짚어 읽기도 하고,

거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유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붙잡아 하나의 견해로 확고히 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이다.

 

요즘 읽는 책이 '김승호' 님의 '주역원론'이어서 더 그런 것도 같다.

그동안 '주역은 어려운 것이다'란 인식이 있었는데,

김승호 님의 책을 읽으면서 주역이 쉽고 재밌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런데 주역이 쉽고 재밌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위해선 생각에 매듭이나 뭉친 부분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사고를 가둬두고,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제한하다보면,

그런 제한된 것을 뛰어넘는 것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자연을 '인공'의 반대 개념이냐 '인간'의 반대 개념이냐 따위로 국한 시키지 않고 바라보기에 따라 얼마든지 커질 수 있는 거대한 개념이듯이,

'자연'의 자리에 '주역'을 대입시켜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전작인 '길에서 주운 한자'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책이 나오길 내심 응원하고 기대했었는데,

내 삶이 꿀꿀하다보니 그렇게 그렇게 잊혀졌었다.

얼마 전 저자 분의 서재에 들렀다가 알게 되어 서둘러 구입했다.

저자 분의 서재에서 봤던 내용들이었지만,

책의 형태를 갖추어 나오게 되니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전편을 읽으면서 좀 아쉬웠던 종이의 재질이나 사진의 선명도 따위를 개선하였으며,

한자어를 보기 좋게 배치하여 편집하는 등 책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본문에 한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다른 색을 사용하여 돌출시키고 글이 끝난 뒤에 언급하는 방법을 쓰는데,

한글과 한자를 나란히 사용해도 좋았을 것 같다.

자주 봐야 눈에도 익고 익숙해지니 말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주역'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보면 '한자'라는 것이,

아니 적어도 내겐, 이 책의 사고와 설명 방식이 주역의 그것을 닮은 것 같다.

아무렇게나 한꼭지를 따라 읽다보면,

주역의 사고처럼 '자연' 그 자체인 저자의 사고를 만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사실 내가 저자 분에게 감동을 받은 건,

104쪽의 '바람 멎으니 꽃 떨어지고'의 근간이 되는 페이퍼였다.

'휴정'의 '독파능엄'을 저자 분이 나름대로 번역을 했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번역도 멋지지만,

저자 분의 번역도 '능엄적으로' 멋졌었다, ㅋ~.

 

이 책이 좋은 것은 '길에서 만난 한자'를 알아보고 익히는 것도 있겠지만,

저자 분을 따라 읽다보면,

저자 분의 사유의 흐름이나 확장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하다보면 내 자신도 사유를 단정하게 가다듬을 수 있고,

사유의 흐름을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확장시켜야 할지,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다.

'후기를 대신하여'를 보니,

댁에 편찮으신 분이 계신가 보다.

내내 마음쓰이시겠다.

하지만 이런 책을 쓰신 분이라면 무게 중심을 잘 잡으셔서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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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26 11:28   좋아요 1 | URL
중고등학교시절 한문 선생님이 무서운 호랑이셨던 지라 덕분에 제 한자 실력은 그때 다 다져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요 글 읽다보니 문득 학창시절 한시를 외워 쓸 수 있던 저의 한자 능력은 어디로 사라졌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ㅋㅋ
집에 정이천의 <주역>이 있는데....... 꺼내볼 생각도 못했는데 덕분에 오늘은 책을 한번 펼쳐볼 것 같아요. ^^

sslmo 2019-04-26 11:58   좋아요 1 | URL
하핫~^^
우리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을테고,
우리가 알아야할 모든 한자는 중고등학교시절 무서운 한문 선생님에게서 배웠을테고, ㅋ~.
4학년 조카를 보니 벌써 한자를 배우더라구요, 깜. 놀.했어요.

제 친구 중에 한시를 써보겠다고 열을 올리던 이도 있었답니다,

저도 주역을 여러 판본으로 다양하게 가지고도 있고,
읽는다고 글자만 눈으로 따라 읽기도 여러번이었는데,
김승호 님의 ‘주역원론‘은 6권짜리여서 분량이 방대해서 그렇지,
내용은 쉽게 이해되는 편입니다.
6권 모두 완독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나무 2019-04-26 12:04   좋아요 1 | URL
6권이요??? 하지만 내용은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고 하니 올해 말쯤이면 완독했다는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보지 않을까 저도 기대해 봅니다. ^^
벌써 점심식사 시간이네요. 맛나고 든든한, 오늘은 쌀쌀하니 따뜻한 점심 드셔요. ^^

sslmo 2019-04-26 12:19   좋아요 1 | URL
부디 완독 페이퍼를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승호 님은 전에 다른 책으로 여러번 만난 적이 있는데,
한자를 안쓰시고 될 수 있으면 한글을 사용하셔서 읽기 수월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 ‘길에서 만난 한자‘도 한문 사용을 지양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따뜻한 점심이라니,
말씀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져 오네요.
님도 따뜻하고 최고로 맛난 점심 드세요~^^

찔레꽃 2019-04-26 15:57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 이번에도 기어코 또 책을 사셨군요. ^ ^ 격려와 충고 감사할 뿐입니다. 말미의 든든한 말씀은 정말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네요. 왜 이렇게 제 마음을 자꾸 씀벅하게 해주시는 거죠? ^ ^

sslmo 2019-04-26 16:23   좋아요 0 | URL
언제고 어느 부분부터 펼쳐서 읽어도 좋을 책을 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책이 얇아서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 이곳에서,
여러분들로부터 위로 받았고,
그렇게 절 다독이며 건너가는 중입니다.
조용히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보태겠습니다.

그런데, 씀벅이라는 말이 너무 예뻐서 여러번 웅얼거리게 되는걸요~^^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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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필이 꽂혀서 보는 드라마는 '눈이 부시게'이다.

김혜자와 한지민이 묘하게 넘나들며 연기를 하는데, 재미있다.

내가 집중을 하고 보게 된 부분은 시계의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혜자는 젊음을 담보로 아빠를 죽음에서 되살릴 수 있었지만,

결국 아빠는 의족 신세가 되었고,

시계를 다시 되돌리면 혜자는 젊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등가로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

시계를 포기하고 현실을 살기로 한 혜자가 안쓰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보는 환자가 노인이 많아서 그런가,

드라마 속 등장하는 홍보관 설정이 흥미로웠다.

드라마 속에서 설정은 홍보관인데,

시설의 럭셔리함으로 따진다면 노인복지관이나 실버센터 수준이다.

명확한 기준 없이 오락가락하는데,

노인복지관은 그런 곳이 아니고,

홍보관 또한 그런 곳이 못 된다.

드라마니까 거칠게 그려낸 설정이었다고 해도,

어색하게 느껴지는건 어쩔 수 없다.

약장사라고 불리우는 홍보관엔 할아버지들이 없다.

그렇다면 노인복지관이어야 할텐데,

노인복지관에서 건강보조식품이나 보험 등을 파는 건 불법일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를 읽었다.

좀 슬프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여든을 넘기며'란 1장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나머지 것들은 부제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을 하기에 꼭 필요한 주제일지는 모르지만,

재미를 느끼기엔 내가 역부족이었다.

르귄 여사의 그 방대하면서도 깊음을 내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해두자.

 

이 책은 르귄이 '주제 사라마구'의 블로그를 보고 영감을 받은게 계기가 되었단다.

 

'블로그는 '쌍방향적'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댓글을 일일이 읽어 답을 해주고 낯선 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걸 당연히 여기'(9쪽)는 것이라서 흥미를 잃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작가는 그가 쓴 이야기와 시 뒤에 숨어서 작가의 글이 작가 대신 그들과 말하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28쪽)

 

물론 노화가 스러져감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극심한 경쟁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라서 현실에 충실하고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찾을 기회가 될 수 있다. 만약 기억력이 온전해서 사고에 활력이 남아 있다면 연륜이 쌓인 지능은 보기 드문 폭과 깊이를 가진 이해력을 발휘한다. ㆍㆍㆍㆍㆍㆍ그런 지능은 오랫동안 특정한 기술이나 예술로서의 기량을 길러온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자꾸 하다 보면 완벽해진다는 말은 실로 옳다. 요령을 깨달아 통달했으니 애쓰지 않아도 하는 일에 멋이 흐른다.(32~33쪽)

 

연륜이 쌓인 지능이 보기드문 폭과 깊이를 가진 이해력을 아무리 발휘한다고 하여도, 노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사는 수밖에 없겠다.

 

사족을 달자면 번역도 그리 맘에 들지는 않았다~--;

김혜자 님은 스물다섯 설정의 한지민을 그대로 재현해 내시는데 정말 멋지다.

루귄여사의 문제를 제기하는 듯 하면서도 재치발랄한 문체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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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03-05 22:29   좋아요 1 | URL
번역에 대해서는 저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작년에 원문을 대충 조금 읽다가 이번에 번역이 나와 반가워서 읽었거든요. 원문의 문체를 많이 못살렸다는 느낌을 받있고 모호한 부분도 많아서 다시 원서 찾아본 부분이 많아요.

sslmo 2019-03-06 09: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런 번역 얘기를 할때는 조심스럽기 마련인데,
저만 그렇게 느낀게 아니라니 묘한 위로가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3-05 23:04   좋아요 1 | URL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문장만을 놓고 보자면, 나이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년‘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기도 해서 전후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sslmo 2019-03-06 09:27   좋아요 1 | URL
이 책에서는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라는 말을 경계해요.
선의를 담아서 늙지 않으셨어요, 나이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따위의 말로 위로하는데,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대요.
그러고보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이를 막론하고 중요하지만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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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에게 필이 꽂히면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두루 섭렵한다.

보통은 내가 필이 꽂히게 만든 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응당 치러야 할 대가쯤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들이는 편이다.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내가 필이 꽂히게 만든 그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좀 빠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김서령 님은 '이야기가 있는 집'으로 처음 만났었다.

'김서령의 家', '참외는 참 외롭다' 따위를 읽었던 것 같고,

'여자전'은 좀 묵직한 주제여서 내가 코멘트할 수 있는 깜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황홀했다.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고, 눈으로 먹는건데도 몹시 황홀했다.

내가 좋아하는 박찬일이나 권여선의 '오늘 뭐 먹지?'를 닮은 듯 하면서도 한결 웅숭깊다.

백석의 글들이 적재적소에 인용되는 것도 훌륭했다.

이렇게 야물딱지면서도 단아한 문장이라니.

더 이상 이런 글들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못내 아쉽다.

그동안의 것이라도 곁에 두고 복기하는 수밖에.

 

그렇지만 엄마에겐 실감나지 않았고 다만 강과 물과 바람과 갓 모가 심긴 들판과 논물 위에 내려와 앉은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신행길이 좋았다. 시조모와 시조부, 홀로 된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 둘, 그들의 음식 수발과 옷 수발과 한 해 열세 번이나 지낼 제사를 홀로 감당해야 할 운명을 목전에 두고서도 엄마는 공중에 휘날리는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그 순간 생에 감사했다. 천지가 이토록 고우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71쪽)

 

봄이 오는데,

천변에 꽃들이 흐드러질텐데,

바깥의 날씨가 화창하면 화창할수록 실은 내 마음은 지랄맞았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고마워 하는 마음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애써 다스려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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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9-02-27 17:11   좋아요 1 | URL
아. 저도 대가를 치른적이 있습니다. 세설을 읽고 반해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의 작품을 여럿 샀다가 한 권만 읽고 나머지는 읽지도 않고 알라딘중고로 넘겨 비싼 렛슨비를 지불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 파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간혹 운이 좋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 예를 들면 제 경우엔 시리즈물을 제외하고 볼때 유시민 작가님과 윤성근 작가님 등등이 있습니다. ㅎㅎㅎㅎ

sslmo 2019-02-28 15:31   좋아요 2 | URL
‘저는 일본소설은 버거워서, 정서가 저와는 이상하게겉돌아서, 잘 안 읽게 돼요.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일본 작가는 몇 명 없는데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신들의 봉우리‘를 쓴 ‘유메 마쿠라 바쿠‘예요.
‘신들의 봉우리‘를 읽고 ‘음양사‘ 시리즈를 들였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정서였습니다~^^

유시민 님과 윤성근 님도 좋죠~^^
유시민 님은 요즘 ‘알릴레오‘가 유명한데 아직 찾아들어보진 못했네요~--;

2019-02-27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8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8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9-02-27 17:16   좋아요 1 | URL
님 덕분에 산 <시가 안 써질 때...>를 아직 못 읽고 있어요. 황홀한 책이라니 또 읽고 싶어지네요. 나무꾼 님 취향하고 맞는 부분이 있어서리. ㅎㅎㅎ 제목도 참으로 좋구만요.

sslmo 2019-02-28 16:04   좋아요 0 | URL
아~, 이정록 님 산문집도 완전 좋았는데, 황홀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맞아요, 북극곰 님 저랑 교집합이 좀 있으셨죠.
이 책도 충분히 좋아하실 수 있을 듯~^^

정향극렬주 얘기가 나오면 그것이, 수박 얘기가 나오면 또 그것이,
온통 황홀한 것 투성이예요~^^

hnine 2019-02-27 21:33   좋아요 1 | URL
저도 많이 아쉽습니다. 더 좋은 글을 많이 쓰실 수 있었는데.
참외는 참 외롭다 읽고서 쓴 리뷰에 직접 댓글까지 남겨주셨었는데...
양철나무꾼님 덕분에 이 책 나온 것을 알았네요. 당연히 사서 읽어야죠.

sslmo 2019-02-28 16:07   좋아요 0 | URL
아쉬움을 이루 말로 할 수 있을까요~--;
휘리릭 한번 읽고,
생각 날때 군데 군데 펼쳐서 또 한번 읽고 그래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기어이 ‘참외는 참 외롭다‘ 때의 님처럼 필사를 해봐야 하려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