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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김정선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8년 10월
평점 :
예전에 그분이 이 동네에서 후와 님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울때,
그 분의 서재를 방문하여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들을 읽고 댓글을 남기곤 하였었다.
어느 날은 지하철의 시 한편을 인용하면서 집에 가서 어머니 저녁밥을 지어야 한다는 코멘트를 남기셨다.
그 글을 보고 난 '효녀 후와 님'이라는 댓글을 남겼더니 성별을 정정해 주셨었다.
어쭙잖은 호기심에 저녁밥을 짓는다는 말만으로 성별을 '여자'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지만 표현하지는 못 했었다.
그런데 리뷰 소설이라는 이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을 발견했다.
병원에서나, 어머니를 부축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한의원을 오가는 길목에서나, 이렇게 저렇게 부딪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이구 효자 아들을 두셨네요"라며 말을 건네곤 했다. 처음엔 칭찬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이 말은 말하자면 사회적 은어인 셈이었다. 저런 인간들을 효자나 효녀, 효부라고 칭하자. 그래야 우리 맘이 편하니까.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부모를 간병하는 건 착한 아들이나 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게 만들려는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부모와 자식 간에 개인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103쪽)
소설 속의 상황이 저때쯤이었을 것 같은데,
저 구절을 읽다보니 미안한건 성별을 오해한거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효자라는 굴레를 씌워버린 것 자체를 두고 정중하게 사과할 문제임을 알겠다.
나도 효녀나 효부 따위의 사회적 은어의 무게에 허리가 굽고 무릎이 꺾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건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등장한다.
어머니가 아팠고, 집이 아팠고, 내가 아팠다. 내 아픔만 티가 나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는 아픔처럼 골치 아픈 아픔도 드물다. 마흔이 넘을 때까지 입에 대지도 못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홀짝홀짝 들이켰지만, 나중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투명한 소주잔에 조용히 술을 부었다. 생각없는 기계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105쪽)
나의 현재 상황과 맞물려 깊이 공감하겠다.
아들을 잃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아팠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창의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못했고 조금만 시간이 주어지면 멍때리고 있기 일쑤였다.
나는 괜찮은데(괜찮은지 어떤지조차 모르는데)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황을 거칠게 설명하면 그제서야 수선스럽게 호들갑을 떨었고,
그게 상처를 헤집어 놓아 아팠다.
처음엔 통증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는데,
꿀잠은 덤으로 따라왔다.
오래전 우울감에 시달릴 때 우연히 셰익스피어의 책을 찾아 읽으셨다는데,
이 책엔 다양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곳곳에 인용되고 재편성된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작품들이 이 소설을 통하여 해석되었고 그리하여 한걸음 바짝 다가왔다.
재밌게 읽지는 못 하고 아프게 읽었지만,
우울할때면,
아니 팬텀 사인처럼 나의 어딘가가 아파올때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
나의 어디에도 없는 그 상처를 이 책은 어루만져 줄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너무 늦게 깨달아 미안하다는 말은 시기를 놓쳤지만,
이런 책을 써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다.
그 어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책보다 제대로 위로가 되었다.
이 구절을 옮겨보며 이 글을 끝맺어야겠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행복'은 '사랑'과 달라서 내가 온전히 주도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다'는 동사여서 주어인 내가 그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을 온전히 주재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는 형용사여서 주어인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나는 다만 그 '행복한' 형용, 즉 행복한 그림 안에 들어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땐 행복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사랑과 달리 행복은 내가 추구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상태를 누리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196쪽)
사는 동안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길 수는 있어도 또 다시 행복하긴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구절을 읽으며 행복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아있는 동안 마음껏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