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가서 소고기를 잔뜩 구워먹었다. 남편은 소고기랑 같이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평소에는 맥주만 두 병정도 마시는데, 오늘은 소주까지 시켜서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지 오다가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사주고, 집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도 사줬다. 아이들에게는 생과일주스를 사줬다


살금살금 비가 오고 있었다. 매화나무엔 작게 꽃망울이 맺혀서 얼핏 보면 빗방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왔다. 아마 어딘가에는 벌써 민들레가 피었을 거다. 작년 314,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첫 민들레와 딱 눈이 마주쳤었다. (난 매년 첫 민들레를 본 날을 기록해 놓는다.) 그보다 4일이 더 지났고, 오늘 비가 내리니 잘하면 이번 주 안으로 민들레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벙긋 좋아졌다. 이렇게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건 뱃속에 든든한 소고기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배속 중간쯤에 소고기가 걸쳐져 있다. 뱃속에 있는 든든한 소고기를 느끼면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 조금 읽었다. 뭔가 소고기를 잔뜩 구워먹고 온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소고기를 구워먹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알라딘 서재에 다시 또 오랜만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정말 어쩌다 한 번씩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제대로(?) 리뷰를 올리거나 한 건 거의 4년만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나는 작은 마을공간에서 1년간 일을 했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일을 그만두었다. 그 공간은 실무자로서는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이용자이자 활동가로 보낸 시간은 거의 10년인지라 일을 그만두고 나니 허전함이 밀려왔고, 그건 마치 헤어진 첫사랑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를 다시 재정비해야 했다. 10년의 인연을 이어왔던 공간, 또 그 공간의 사람들과 연이 끊어지는 허전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내 나이가 재정비가 필요한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뭐랄까. 지금까지 살아오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리잡고 비켜주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준비한다는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앞으로 뭐하며 살면 좋을지가 난감했다. 책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잘 읽히지도 않았다. 글을 쓴다는 건 더 어려웠다. 생각이 붕붕 떠다니기만 했다. 붕붕 떠다니는 생각을 잠재우려고 손바느질도 하고, 도예공방을 다니며 그릇을 빚고, 사계절 내내 온갖 과일청을 만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일년 동안은 그렇게 손을 움직여서 생각과 말을 지우고 싶었다. 그건 마치 낙서로 가득찬 칠판을 깨끗이 지우는 것과 비슷했다. 


이제야 깨끗이 지워진 칠판을 마주한 느낌이다. 다시 칠판에 새로운 걸 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의자에 앉아 빈 칠판을 바라보며 뭘할까 궁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은 다시 책을 읽고, 어색한 리뷰를 써보기로 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적는 조용한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중이다. 


봄비가 내리고, 내 배는 든든한 소고기를 품고 있으니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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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1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자주 만나요, 섬사이님! :)

섬사이 2018-03-19 13:54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다락방님의 응원이라니, 든든합니다!

라로 2018-03-19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 님!! 많이 반갑네요~~~!^^ 저도 섬사이 님이 알라딘에 자리를 빈 그정도 왔다갔다 했는데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아침! 저는 예전 나비에요. ^^*
잎으로 지주 만나요~~~!!

섬사이 2018-03-19 14:02   좋아요 0 | URL
아, 나비님!! 나비님, 아니 라로님도 한동안 알라딘에 뜸하셨군요.
하하, 어쩐지 학교에 혼자 지각한 줄 알고 허겁지겁 달려갔는데,
같이 지각한 친구가 있어서
혼자 교실 문 열고 들어가지 않게 돼서 덜 뻘쭘해 다행이다,
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네, 앞으로 자주 만나요.
 
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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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40여 권이나 되는 저작을 남긴 철학자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데, 나는 몇 주 전에 이 책으로 처음 러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보고 참 전투적이라고 생각했다. 미리보기로 살짝 들춰 읽어보니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책날개에 인쇄된 저자소개를 보면 노년으로 갈수록 정치적이 되어서 수소폭탄 실험 반대, 핵무장 반대운동 등을 펼쳤고, 쿠바 위기와 베트남 전쟁에도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년의 소박한 안락함이나 유유자적 한가하게 개인적인 만족을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보는 성향도 아닌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 <행복의 정복>이라는 과격한(?) 제목을 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행복은 신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어렵게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250)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몰연대와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를 고려하고 읽으면 좋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고 이 책은 1930년에 출판되었다. 1928년에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가 태어나 자란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이 책을 쓸 때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대충 그려볼 수 있다. 뭔가 급진적인 진보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 보수적인 기득권 계층과 충돌하면서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의 변혁이 꿈틀거리는 시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당시 중상류층 백인 남자의 시각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독려하는 등의 진보적 시각이 동시에 느껴져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보인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이 책이 일용할 양식과 몸을 누일 곳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소득, 일상적인 육체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16)을 대상으로 했으며, ‘문명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 대해’(16) 다룬다고 밝히고 사회제도의 변혁에 대해선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발끈할만한 부분을 만나게 되더라도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저자의 집필의도를 떠올리고 그냥 쓰윽 넘어가면 좋겠다.

 

이를테면, 204쪽에서 러셀은 당시 결혼을 하는 여성이 이전 세대의 여성들에 비해 새롭고 엄청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면서, ‘그것이 바로 가사 노동 대행 서비스의 양적, 질적 저하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정에 묶인 채 능력과 교육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수없이 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며, 직접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경우라고 해도 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느라 마음의 평정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이건 상류층 백인 여성을 대변하는 입장이다.’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여성의 삶의 질을 고려한다거나 상류층 여성의 갑질 횡포에 대한 비판 같은 건 없다. 그에게 가정부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그저 노동 대행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는 가난하고 무식한 계층의 노동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글에는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의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어머니)에게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디서도 가사나 자녀양육에 있어서의 남성(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이 나오지 않는다. 잘해야 뭉뚱그려서 부모라고 지칭할 뿐이다. 전문지식을 가진 여성의 사회진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상류 백인여성들만이 가능한 이야기다. 백인여성이 운 좋게 사회진출에 성공했다고 해서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부담이 저절로 알아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남성이 그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 외에도 민주주의의 보편적 확산으로 인해 주인과 노예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양쪽 다 불행해졌다’(207),라거나 가난하고 무식한 계층의 사람들은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데 비해 서구문명인들은 자녀출산을 적게 한다면서 백인종의 대를 끊지 않으려면 부모 노릇이 부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211)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적은 아량을 베풀어 몇 군데의 이런 불편한 부분들을 그냥 쓰윽 넘어갈 수 있다면 이 책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보다 편안하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분석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주제에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접근하려고 애쓴 노력이 인상 깊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질투라는 감정이 경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고 그다지 새롭고 특별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불필요한 겸손이 질투와 관계가 깊다는 주장은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사람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행운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현대의 사회적 지위의 불안정성,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이론이 질투의 영역을 넓혀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질투가 계급과 민족, 다른 성 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주요한 원동력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질투의 결과로 빚어진 정의는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기 쉽다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도 앞에서 얘기한 이 책을 읽을 때의 고려해야 할 사항을 떠올려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이란 말에서 그 행복한 사람들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새겨 들을만한 아포리즘 같은 글귀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35)


성공한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배워두지 않은 사람은 성공한 후에 권태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58)


우리가 남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126)


훌륭한 인생이라면, 여러 가지 활동들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 가지 활동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180)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만족을 얻기 어렵고, 또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는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 쉽다. (222)

 

밑줄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지금의 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 속에서 마음 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글귀 몇 개쯤은 너끈히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러셀이라는 사람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지도 못했고,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오게 된 그의 사유의 배경과 깊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시대적 어긋남으로 인한 20%의 불편을 감수한다면 80%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가 더 좋았다. 처음 읽었을 땐 이 사람이 행복에 대해 무슨 소리를 어떻게 했는지 보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면 두 번째 읽을 땐 불편한 부분을 더 쉽게 넘겨버리고 마음을 편하게 풀어놓고 읽어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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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1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더 읽어봐야겠어요. 섬사이 님 오랜만에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섬사이 2018-03-18 23:52   좋아요 0 | URL
우와, 프레이야님. 너무나 반갑고 반가워요.
조금 전에 프레이야님 서재에 들어갔다가 어쩐지 부끄러워서 좋아요만 살짝 누르고 나왔는데,
이렇게 찾아와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요.
오랫동안 서재를 내팽개치다시피 했는데, 기억해주셔서 고마워요.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괜찮으신거죠?

프레이야 2018-03-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리뷰가 아니군요. 제가 뜸했어요. 그동안 좋은 일 많으셨나요. 그랬으면 해요.

섬사이 2018-03-18 23:5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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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의 사랑


이 소설은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정사 장면을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연하의 유부남 A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작가의 실제 경험을 적은 67쪽 정도(첫 문장을 9쪽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60쪽도 되지 않는다)의 짧은 소설이다. 작품해설과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까지 다 합쳐도 100쪽을 넘지 않는다. 52쪽에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라는 글이 나오는 걸 보면 앞의 포르노 정사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여진 게 틀림없다. 불륜의 사랑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노의 정사 장면을 마주하는 것만큼 당혹스럽고 부도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일까. 도덕적 검열, 가치판단의 잣대를 유보한 채로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언젠가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으로 주부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주부들 대부분이 남녀주인공의 심리나 갈등, 작가의 의도나 문체,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그 소설이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 주인공의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그 여주인공은 육체적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듯 맹렬히 비난했다.


<세벽 세 시~>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독자의 도덕성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검증하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나이든 한 여자가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며 느끼는 열정과 불안과 질투와 방황, 그것을 모두 포함한 자신의 삶과 시간들에 대해 적은 것이다. 도덕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증명하도록 하고, 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작가)의 마음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아내 혹은 남편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자. 그런다고 해서 당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이든 여자의 사랑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랑의 열정이 사치가 되는 나이, 혹은 그 사치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를 자각하는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작가는 A가 떠난 후의 공허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사랑의 마법이 풀리고 열정이 사라진 뒤 늙어버리고 마는 여자. 그녀 앞에 놓인 시간들은 빛깔도 향기도 없이 칙칙하고, 의미 없이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앞에 두고 한참을 책 앞에 머물러야 했다. 단지 늙어갈 뿐인 내가 그 문장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이는 나를 통과한 시간을 세는 단위다. 어느 광고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나이값을 매기는 요구와 조건은 까다롭고 엄정하다.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의 나이값을 적절히 지불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게다가 내 앞에는 점점 나빠질 게 분명한 신체기능과 질병의 위험, 노인빈곤층으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것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이는 숫자 이상의 것을 말한다. 아니 에르노가 A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 중에는 분명 그녀의 나이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이든 여자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이라서 언젠가 그가 떠날 것을 안다. 슬프다.

 

이야기하는 법, 기억하는 법. 존재하는 법


그녀가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열정적 사랑이야기라기 보다 그를 사랑한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관찰자의 집요한 시선으로 사랑에 빠진 의 내면을 직시하고, 성실하고 섬세하게 적어나간다. 사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허우적거리는 여자와 관찰자로서 기록하는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대화라든가 폭발적인 감정선 같은 것이 별로 없어서 생생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나간 사랑이 남겨둔 흔적과 의미들,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들과 시간들을 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현재의 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가는 A와의 사랑을 복기한다. 자기 내면에 대한 글들이 명료하다. 작품해설 글을 읽어보니 이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삶을 쓴 것들인가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와 연인들이 그녀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작가가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작가의 작품 중에 <삶을 쓰다>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열두 편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들을 담은 선집이라는데, 생존하는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콰도르 총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삶을 쓰다>라니...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이었고 그녀의 존재방식이었나 보다. 한 번 읽어보고 싶지만 아직 국내에 번역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쪽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쪽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47쪽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5쪽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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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14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이 리뷰의 인용문을 보니 다 새롭고 또 명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은 그 남자와 나의 사랑이야기 라기 보다는, 그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지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나 47쪽의 인용문 좋네요.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섬사이 2018-03-14 22:42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다락방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알라딘 서재를 2년이나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다락방님의 댓글이라니! 감격스럽네요.

이 책,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여자의 마음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불륜이고 뭐고간에 한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아요. 그 47쪽의 문장은 저를 멍하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슬퍼지고 쓸쓸해져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자꾸 생각났어요.

다락방님과 책에 대해 댓글을 나눌 수 있어 기뻐요!
 
에고라는 적 -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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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책인 줄 알았지

자기 계발서 류의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사람은 책 한 권 읽는다고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뜻하는 바를 이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그 사람과 나의 삶의 지점이 다르고 채워가는 삶의 내용과 의미가 다른데 그 사람의 경험과 사례가 나에게 똑같이 적용될 리 없지 않겠냐고, 내가 책한테까지 잔소리를 들어야겠냐고 고개를 돌렸다. 이 책도 심리학 책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 표지 뒤에 인쇄된 추천글처럼 이 책이 '완벽한 길잡이'라거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이 책을 읽기 전의 당신과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대함은 겸손한 시작에서 비롯되며 힘들고 귀찮은 일에서 비롯된다.(p.90)'나 '에우테미아 euthymia (p.163. '마음의 평정'을 뜻하는 그리스어)'처럼 내 지난날의 어느 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거나 지금의 나를 점검하게 하는 문장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에고'가 뭔데?

제목에서부터 에고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이 책에서 에고는 프로이트가 정의한 에고와는 다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에고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 
'거만함', 
'자기중심적 야망', 
'어떤 것보다 자기 생각을 우선시하는 특성', 
'합리적인 효용을 훌쩍 뛰어넘어 그 누구(무엇)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자신감이나 재능의 범주를 초월하는 우월감'

으로 정의된다.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열정, 성공, 실패라는 인생의 세 단계 중 하나에 속해 있는데, 에고는 이 세 단계,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저자가 설명하고 예시를 통해 드러내는 에고의 모습은 심술궂고 변덕스럽고 유아적이며 겁쟁이에다 제멋대로인 고집불통이고, 거만하다. 그런 에고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버티고 있으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방해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저자는 분노와 증오는 에고를 통제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에고를 잘 통제하는 사람은 '열망하지만 겸손'하고, '성공을 해도 자비'로우며 '실패를 해도 끈기'가 있다.

저자는 말콤 X, 독일 메르켈 총리, 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기타리스트 해밋,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미식축구 감독 빌 월시, 조지 마셜 장군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에고를 잘 통제한 예와 통제에 실패한 예들을 열거한다. 너무 많은 예시가 산만하게 느껴지고 저자가 말하려는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많은 예시를 통해서 '성공'과 '실패'를 단지 부와 명예, 권력을 얻거나 잃는 것으로 이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벨리사리우스와 말콤 X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에고를 통제하는 능력으로만 보자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세운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버림을 받고 급기야는 두 눈을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까지 추락한다. 에고를 잘 통제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불러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에고를 통제하며 자기 길을 성실히 걸어온 사람이 에고를 통제할 줄 모르는, 아예 통제할 마음조차 없는 누군가(여기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물론 중세 동로마 제국의 이야기라고는 하나 황제로부터 업적에 대한 보상은커녕 누명을 쓴 채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면서도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임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옳은 일을 했으며 '그것으로 족했다'라고 만족하는 것이 에고를 잘 통제했다고 칭찬받을 일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벨리사리우스가 자기가 믿는 바대로 에고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일에 성실했고, 우직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신하였고,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자기 안의 에고에 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공한 삶이라는 걸까. 

말콤 X의 경우는 또 어떤가. 뉴욕 빈민굴인 할렘가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마약과 도박, 매춘, 강도 등 범죄를 저질러 오던 말콤이 10년 형을 언도받고 5년간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는 책을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인종차별 문제에 눈을 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말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간을 죽이지 않고, '살아 있는 시간'을 선택해서 자기 안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말콤은 감옥에서 나온 후 과격한 흑인 해방운동을 벌였다. "백인은 악마다, 그 악마가 우리의 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같은 시기에 흑인 민권운동을 벌였던 킹 목사를 비난했다. 그렇다면 말콤 X는 에고를 잘 통제해서 교도소에 있는 동안 자신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시킨 사람인가, 아니면 에고를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결국은 살해당하고야 마는 실패자인가. 

저자는 '에고를 버리고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p.278)고 말한다. '증오와 분노 대신 당신을 향한 모든 시선과 모든 말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당신을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p.278)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죽어라 안 될 때가 있다. 남들한테 '수고했다'라는 말 한 마디 듣지도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비난받는 거지 같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들이 별생각 없이 던지는 칭찬이나 비난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다. 저자는 그럴 때 우리가 무기력에 빠져 지금까지 애써 견디며 해온 일들을 포기해버리거나 아니면 남들이 던져주는 인정을 듣지 않고는 일할 의욕을 느끼지 못하거나 작은 성공에 우쭐해져서 거만을 떨다가 고꾸라지는 일이 벌어질까 봐 경계하는 것이다. 


잠자코 일이나 해!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줄기차게 계속 무언가를 바라고 또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분노나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모는 행위로 이어질 뿐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일을 잘 해라. 그런 다음 흘러가게 두고 신의 뜻을 기다려라.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저 일을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p.243)

이런 글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누려야 마땅한 기본적이고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더라도 군말 말고 일이나 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어느 평화 활동가는 말했다. '분노의 영성'을 가진 사람만이 '평화'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고.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의 온갖 불평등과 폭력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저항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나는 그 평화 활동가의 말에 동의한다. 


세상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는 위의 인용글처럼 말콤이 세상을 향해 흑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을 외치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말콤의 삶은 죽음으로까지 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도소에서 쌓은 지식으로 좀더 편한 일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콤은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그의 바람대로 흑인에 대한 차별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우리의 필요를 요구해선 안 된다는 저자의 조언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스토아 철학과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20세기 철학가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이기도 한 버트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스토아 철학이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또는 다른 인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도 인간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람들이 모인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선이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겼다고 설명하면서 '고독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의 조언이 어째서 이렇게 개인의 노력, 성실, 의지 등을 중요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타인의 인정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가고자 한 방향을 향해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삶을 채워갈 것, 성공의 자리에서도 겸손하게 배움의 자세를 유지할 것, 실패를 인생 순환의 한 과정이라 여기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할 것. 이런 이야기들을 적당한 인물 예시를 통해 반복하고 있다. 일찍부터 성공적인 인생을 달리다가 사업에 실패로 추락의 경험을 맛보고 방황했던 저자의 경험을 통해 나오는 글이라서 사업을 하고 있거나 진로를 준비하는 이들, 확신할 수 없는 꿈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태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에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내 삶의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를테면 나는 내 안에 오만한 겁쟁이 같은 에고가 똬리를 틀고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최근 풀리지 않던 일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두 에고라고 여기고 귀를 막는다면 그것도 위험할 것이다. 그게 못된 망아지 같은 에고인지, 아니면 양심의 소리인지, 내 안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구조 신호인지 듣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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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에 페이퍼에 글을 올린 후 다시 서재를 찾았다.

알라딘의 이 서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1년을 보내고 난 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걸까.

 

작년에는 내게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10년 이상 된 아파트가 되어서 3주에 걸친 인테리어 공사를 벌였고,

그사이에 아들이 군입대 하기 전에 가족여행을 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일주일간 세부로 여행을 다녀왔다.

9월에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큰딸은 12월에 제주도로 갔다.

왜? 나도 모른다.

거기서 친구들과 뭔가를 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잘 설명하기가 어렵다.

자유로운 영혼의 인생낭비 같기도 하고,

젊으니까 할 수 있는 무모한 도전 같기도 하고..

6월에 돌아오겠다고 하니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건물주의 부도로 갈 곳 없어진 작은도서관은 이런저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새 둥지를 틀었다.

주변이 모두 재개발되는 바람에 찾아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없어 폐쇄된 오래된 경로당.

그 경로당을 기둥만 남겨놓고 다 고치는 리모델링 공사를 벌여 새 공간을 마련한 것.

2015년 1년동안 집 인테리어 공사에 도서관 리모델링 공사까지 치뤘고,

짐을 다 뺐다가 다시 옮기는 이사도 두 번 했다.

구청과 국민은행과 고맙습니다 작은도서관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간이 바뀌면서 어린이도서관에서 마을주민들의 소통공간으로 역할을 넓혔다.

지금은 1층은 어린이도서관, 2층은 마을문화카페이자 마을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나는 어쩌다 보니 2층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을학교의 강좌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고..

난 이 공간에는 나보다는 젊고 똑똑한 사람이 와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1년 계약직이라고 혼자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지.

 

처음엔 자다가도 깨서 벌떡 일어나 앉을 정도로 불안하고 힘들었다.

갑자기 심장이 막 바들바들 떨려오기도 했다.

마음 속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머리 속에서 태풍이 몰아치곤 했다.

지금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적응하고 안정된 것 같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고..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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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4-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섬사이 2016-04-13 20:44   좋아요 0 | URL
아, 반가운 다락방님!!!!
서재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에도 가끔씩 다락방님 서재에 슬쩍 남몰래 들르곤 했었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프레이야 2016-04-1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그동안 멋진 일을 꾸리셨군요. 앞으로도 더 좋은 일들 일어나길요. 도서관 이야기 더 기대할게요.

기억의집 2016-04-1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어딘가요? 가보고 싶어요. 예전 작은도서관은 제가 애들 데리고 갔다온 적 있어요. 버스 타고 가서 애들에게 한참 책 읽어주고 왔는데... 버스 타고 가야해서 두번은 안 갔는데 멋지게 변했네요. 아드님 군대 가고 따님은 제주도 가서 쓸쓸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