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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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40여 권이나 되는 저작을 남긴 철학자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데, 나는 몇 주 전에 이 책으로 처음 러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보고 참 전투적이라고 생각했다. 미리보기로 살짝 들춰 읽어보니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책날개에 인쇄된 저자소개를 보면 노년으로 갈수록 정치적이 되어서 수소폭탄 실험 반대, 핵무장 반대운동 등을 펼쳤고, 쿠바 위기와 베트남 전쟁에도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년의 소박한 안락함이나 유유자적 한가하게 개인적인 만족을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보는 성향도 아닌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 <행복의 정복>이라는 과격한(?) 제목을 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행복은 신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어렵게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250)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몰연대와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를 고려하고 읽으면 좋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고 이 책은 1930년에 출판되었다. 1928년에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가 태어나 자란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이 책을 쓸 때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대충 그려볼 수 있다. 뭔가 급진적인 진보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 보수적인 기득권 계층과 충돌하면서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의 변혁이 꿈틀거리는 시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당시 중상류층 백인 남자의 시각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독려하는 등의 진보적 시각이 동시에 느껴져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보인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이 책이 일용할 양식과 몸을 누일 곳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소득, 일상적인 육체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16)을 대상으로 했으며, ‘문명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 대해’(16) 다룬다고 밝히고 사회제도의 변혁에 대해선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발끈할만한 부분을 만나게 되더라도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저자의 집필의도를 떠올리고 그냥 쓰윽 넘어가면 좋겠다.

 

이를테면, 204쪽에서 러셀은 당시 결혼을 하는 여성이 이전 세대의 여성들에 비해 새롭고 엄청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면서, ‘그것이 바로 가사 노동 대행 서비스의 양적, 질적 저하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정에 묶인 채 능력과 교육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수없이 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며, 직접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경우라고 해도 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느라 마음의 평정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이건 상류층 백인 여성을 대변하는 입장이다.’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여성의 삶의 질을 고려한다거나 상류층 여성의 갑질 횡포에 대한 비판 같은 건 없다. 그에게 가정부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그저 노동 대행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는 가난하고 무식한 계층의 노동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글에는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의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어머니)에게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디서도 가사나 자녀양육에 있어서의 남성(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이 나오지 않는다. 잘해야 뭉뚱그려서 부모라고 지칭할 뿐이다. 전문지식을 가진 여성의 사회진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상류 백인여성들만이 가능한 이야기다. 백인여성이 운 좋게 사회진출에 성공했다고 해서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부담이 저절로 알아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게으름을 부리는 가정부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남성이 그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 외에도 민주주의의 보편적 확산으로 인해 주인과 노예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양쪽 다 불행해졌다’(207),라거나 가난하고 무식한 계층의 사람들은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데 비해 서구문명인들은 자녀출산을 적게 한다면서 백인종의 대를 끊지 않으려면 부모 노릇이 부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211)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적은 아량을 베풀어 몇 군데의 이런 불편한 부분들을 그냥 쓰윽 넘어갈 수 있다면 이 책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보다 편안하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분석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주제에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접근하려고 애쓴 노력이 인상 깊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질투라는 감정이 경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고 그다지 새롭고 특별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불필요한 겸손이 질투와 관계가 깊다는 주장은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사람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행운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현대의 사회적 지위의 불안정성,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이론이 질투의 영역을 넓혀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질투가 계급과 민족, 다른 성 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주요한 원동력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질투의 결과로 빚어진 정의는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기 쉽다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도 앞에서 얘기한 이 책을 읽을 때의 고려해야 할 사항을 떠올려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이란 말에서 그 행복한 사람들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새겨 들을만한 아포리즘 같은 글귀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35)


성공한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배워두지 않은 사람은 성공한 후에 권태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58)


우리가 남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126)


훌륭한 인생이라면, 여러 가지 활동들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 가지 활동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180)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만족을 얻기 어렵고, 또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는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 쉽다. (222)

 

밑줄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지금의 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 속에서 마음 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글귀 몇 개쯤은 너끈히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러셀이라는 사람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지도 못했고,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오게 된 그의 사유의 배경과 깊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시대적 어긋남으로 인한 20%의 불편을 감수한다면 80%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가 더 좋았다. 처음 읽었을 땐 이 사람이 행복에 대해 무슨 소리를 어떻게 했는지 보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면 두 번째 읽을 땐 불편한 부분을 더 쉽게 넘겨버리고 마음을 편하게 풀어놓고 읽어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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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1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더 읽어봐야겠어요. 섬사이 님 오랜만에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섬사이 2018-03-18 23:52   좋아요 0 | URL
우와, 프레이야님. 너무나 반갑고 반가워요.
조금 전에 프레이야님 서재에 들어갔다가 어쩐지 부끄러워서 좋아요만 살짝 누르고 나왔는데,
이렇게 찾아와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요.
오랫동안 서재를 내팽개치다시피 했는데, 기억해주셔서 고마워요.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괜찮으신거죠?

프레이야 2018-03-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리뷰가 아니군요. 제가 뜸했어요. 그동안 좋은 일 많으셨나요. 그랬으면 해요.

섬사이 2018-03-18 23:5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