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다에서 만난 사람
이기철 지음 / 좋은날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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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지울 수 없었던 인상은 이 책이 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과 정보들을 열거하는 틈틈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끼워넣었다는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말투는 거의 똑같았는데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시사대담프로를 연상시켰다. 작가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풀어놓는 지식과 정보는 경탄할만 하지만, 차라리 그럴 거라면 에세이 쯤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로서의 힘은 없어 보인다.

현학적인 취향의 설명문을 읽은 듯한 느낌이 더 강하고 간혹 그 설명조차 지루했다. 설명이 지루한 건, 설명 속에서 작가의 생각 - 개성적이고 깊이 있는- 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딘가에서 읽어 본 듯한, 어딘가에서 인용해 오기를 주저하지 않는 설명... 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줄 작가 개인 특유의 사고의 영역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름대로 지적이고 현학적인 향기를 짙게 풍기면서도 신파적이다. 그 신파의 냄새는 제니의 결혼 요구에 대해 거절하는 관우의 쪽지에서 극을 이루었다.

시인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로 감싸 풀어내기에 익숙치 않았던 것일까? 중복의 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작가의 박식한 지식의 언어들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고, 현학적인 취향의 문체와 온갖 설명들을 담고 있는 문맥들을 따라가는 일도 썩 달갑지 않았다.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제니, 루디아, 옥치옥, 민관우에 대해서 그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손가락 길이와 구두소리, 웃음소리, 치마끄는 소리까지도 그릴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에게 그토록 세세한 부분까지도 실감나게 다가오는 그 인물들이 왜 나에겐 흔히 볼 수 있는 길 가의 돌멩이보다도 생명력이 없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글 속의 제니나, 민관우, 루디아, 옥치옥보다도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더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박식과 현학적 취향에 짓눌려 제니도 민관우도 루디아도 옥치옥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런 말을 한다.

< 문학이란 심혼을 불어넣어 주는 특종의 예술인데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문학 속에 들어있는 심혼을 만나려 하지 않고 겉에 드러난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간다. 내가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다섯날 다섯 밤을 불면으로 새웠어도 독자는 그 한 줄을 불과 오분만에 다 읽는다. 내가 백장의 산문, 천 장의 소설을 쓰는 데 석달이 걸리고 이년이 걸렸다 해도 독자들은 그것을 두 시간 혹은 이틀만에 다 읽어 버린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열번을 지우고 고친 구절에도 독자들은 거기에 두 번의 눈을 주지 않고, 내가 그 부분을 쓰기 위해 스무 번 생각을 반추한 구절에도 독자들의 눈길은 두 번 이상 머물지 않는다.> 라고..

난 작가의 심혼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가는 얄팍하고 예의 없고 문학적 예리함을 갖추지 못한 독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의 가치와 무게가 작가가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긴시간을 들였는지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쓰는 일의 어려움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어려움과 고통을 독자에게 알아달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독자는 작가의 심혼을 보지 않으려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작가의 심혼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작가의 직접적인 설명이나 강의식으로 전달되는 지식과 정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풍부함과 자연스러움은 통해서 작가의 심혼과 만나고 싶을 따름이다. 독자들도 목마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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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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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 소설을 읽으며 제일 먼저 느낀 건 뭔가 확인되지 않는 모호함이었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에선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뚜렷하고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해서 우리에게 잠시 환각현상과 비슷한 간접경험을 하게 해 준다거나, 아니면 평범함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 숨겨진 의미들이 작가에 의해 거침없이 까발려져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 보인다던가... 그래서 읽고 나면 사는 것이 좀 더 다르게 보이는.. 뭐,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소설 안에서는 모호한 인물들이 그들이 처한 일상 속에서 모호한 사건을 만나곤 한다. 그런 이유로 난 글을 읽으며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확인되지도, 설명되지도, 이해할 수도, 명확한 원인을 들이댈 수도 없는 모호한 이유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망가지거나 개인적인 일상의 영역이나 꿈들이 깨지는 것을 나는 <하나코는 없다>, <열 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물방을 음악>, <전쟁들:집을 무서워하는 아이>, <전쟁들:숲 속의 빈터>에서 보았다. 그 특유의 모호함 때문에 소설의 의미가 내게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글의 의미들이 그 영토를 넓혀가는 인상을 받았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이 모호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산다는 일 자체가 참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 중에 과연 '이거다!'하고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날마다 반복되어 평범하기 그지없고 그 반복의 두께만큼 너무 견고하게 느껴져 답답하기까지 한 나의 이 일상이 따지고 보면 깨지기 쉬운 텅빈 유리상자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설명할 수도, 누구의 탓이라고 명확히 꼬집어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들로 우리의 일상은 상처를 받고 위기에 몰리기도 하며 때론 가차없이 부숴지기도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사실적이고 명료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했다. 작가는 깨지기 쉬운 개인의 일상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아무 생각없이 깨뜨려 버릴 수 있는 '나'라는 개인 주변의 사회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일상을 깨뜨리는 사회 속에 있지는 않은가... 최윤이라는 작가는 내게 모호함을 통해서 내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명료함을 던져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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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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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여덟편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들이 당연히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 여덟 편의 이야기가 모두 한 이야기로 들리는 건 왜일까.. 작가 윤대녕의 소설을 따라가기엔 내 정서가 그만큼 얄팍하기 때문일까..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듯 줄거리를 더듬어 짚어가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읽다 보면 오히려 줄거리라는 건 중요한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를 통해서 전달되는 메세지(?)를 찾으려다 보면 오히려 허망할 지도 모르겠다.

윤대녕의 소설이 회화적이고 시적이며 은유로 감싸여 있어서 다소 몽환적인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읽는 중간중간 책을 덮고 그의 글 속의 배경와 상황들을 가슴에 그려보면서 약간은 신비적인 정서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의 글은 마치 사람들이 많고 시끄러운 2층 카페에서 유리창으로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카페안의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밖의 풍경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는... 오로지 나 자신 안으로만 침잠하며 다른 사람들과 사물, 풍경들로 부터 자기만의 의미를 뽑아낼 수 있는....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이야기'보다는 '침묵'을 만난 것 같은 인상이 더 깊다. 그리고 그 몽유적인(?) 침묵은 작가의 이야기가 독자를 통해서 다양하게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만큼 작가의 의도를 쉽게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그의 글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 보는 일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글들은 평범한 사람의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다. 그의 작중 인물들은 그의 자리에서 부대끼며 살기 보다는 어딘가로 떠나고 있고 아니면 우리네 세상의 삶에서도 얼마쯤 비껴나 있다.

작가는 책 후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저 위대한 독립의 탁발정신'이란 말을 방랑 서른 여덟해 동안 붙잡고 살아왔노라고..
그리고 사물과 이미지와 언어가 하나로 일치되는 꿈을 꾸었노라고..

이 말이 그의 소설을 해독(?)하는 열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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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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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처음 만났던 게 대학교 2학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벌써 14년 쯤 전의 일인가 보다. 그 때 그의 소설이 참 인상깊었다. 그의 성에 대한 묘사는 당시로선 꽤 노골적이었지만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을 투영해줄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덮으며 역시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만큼의 우리들 내면의 고독에 대해서 착잡함을 느낀다. 분주하고 번잡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군중 속에서 고독한 개인에 대해 하루키는 작중 '나'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모두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각각 타인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무엇때문에? 이 혹성은 사람의 적막감을 자양분으로 삼아 회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 채로 지구의 인력을 단 하나의 연줄로 삼아 쉬지 않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스푸트니크의 후예들을 생각했다. 고독한 금속 덩어리인 그들은 차단막이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순간적으로 스치면서 영원히 헤어져 버린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작중 스미레가 레즈비언이라든가,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치되지 못하고 엇갈리는 코드 - 그것이 레즈든 동성애이든 무엇이든 간에 - 와 이를 통해 우리 생이 끝날 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할 고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이라는 것은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에 나타나는 성적인 묘사들은 독자들에게 무겁고 심각하며 들뜨는 열정이 없다. 엇갈리는 코드에 대한 안타까움은 다음 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 이 여자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스미레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성욕도 느끼고 있다.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성욕을 느끼고 있다. 스미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고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익명의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복잡하다. 마치 실존주의 연극의 줄거리 같다. 모든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어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 고독과 적막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엇갈리기만 하는 코드에 대해 괴로와 하고 갈등하며, 코드가 딱 들어맞는 다른 세계 - 스미레가 그리스의 외딴 섬에서 사라져버렸던 - 을 꿈꾸기도 한다. 엇갈리는 코드끼리의 충돌은 참고 견뎌내기 힘든 고통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루키는 작중 스미레의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 (전략) 충돌(쿵!)을 면하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렵다고? 아니,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간단하다. C'est simple. 꿈을 꾸는 것이다.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 꿈의 세계로 들어가 그대로 나오지 않는 것. 그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

우리는 모두 스푸트니크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회수되지 못해 우주를 돌아야만 하는 개 라이카같은 존재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둡고 적막한 우주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떠도는 고독한 존재라는 걸 잊기 위해 환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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