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랑 같이 다니는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책통장이라는 걸 만들어 준다. 그리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고 책통장에 기록을 한 다음 사서 선생님의 싸인을 받는다. 그 싸인이 다섯 개 모이면 개구리 도장을 찍어주고, 그 개구리 도장을 또 다섯 개 모으면 아이가 원하는 책을 선물로 준다. (그 책 선물을 '개구리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도서관 소식지에 개구리 상을 받은 아이들의 명단이 올라온다.   

우리 막내로 말하자면, 26개월 무렵부터 그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래서 재작년 도서관 총회때에는 도서관을 가장 많이 들락날락 거린 아이에게 주는 '도서관 생쥐상'을 받기도 했다. (막내가 받은 생애 첫 상장이었으니 의미가 컸다) 그런 막내이니 개구리 상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그 이유는 일단 막내에게 책을 읽어주고도 책통장에 읽은 책들을 기록해 주지 않은 내 탓도 있다. 한 달에 5천원 후원하는 사람이(새해부터는 한 구좌를 더 늘려 만원씩 후원하고 있지만) 개구리 상을 받아가면 도서관 쪽에서는 어쨌든 손해니까, 하는 생각때문이기도 했고 단순히 '귀찮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막내가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에는 엄마 모임이 있는 날 따라 와서 모임이 끝날 때까지 놀았고, 어린이집에 다니고부터는 '색깔아이'라는 미술품앗이 모임에 들어가 작품활동(?)한 후 놀다가만 왔기 때문이다.  내 책임이 크다. 어린이 도서관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커피 한 잔 하고 올 여유는 부렸으면서 아이에게 책 읽어줄 생각을 안 했다니 반성한다. 사실 잘 놀고 있는 아이를 불러다 앉히고 책을 읽힌다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았고,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배운 것도 많다. (초등학생 언니가 종이접기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한자를 많이 아는 오빠와 친구 덕분에 한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어쨌든 도서관은 책을 읽는 장소니까 선생님들께 죄송하기도 해서 어느 날 도서관 가는 길에 막내에게 슬며시 말을 꺼냈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우린 만날 놀기만 하니까 엄마가 선생님한테 좀 미안하거든. 도서관에 가면 적어도 책 두 권정도라도 읽으면 좋겠는데, 어때?" 
"......."
"있잖아, ㅅ오빠랑 ㅇ이는 소식지 나올 때마다 개구리 상 받았다고 이름이 나오더라~
우리도 책 읽고 열심히 책통장에 써서 오랜만에 개구리 상 좀 받아볼까?"
"...... 알았어, 엄마. 그럴게..." 
"정말? 그래,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니까, 우리 많이는 말고 두 권 정도 읽고 그 다음에 너 하고 싶은 거 해도 되잖아." 
"응" 

아, 그래도 컸다고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하고 감격하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길을 계속 갔는데, 한동안 말없이 걷던 막내가 불쑥 혼잣말 하듯 내뱉은 말. 

"엄마.. 그래도 나는 노는 게 더 중요해.." 
"......"
잠시 할 말을 잃고 막내 표정을 보았다. 꽤 심각한 표정이다.
"그래... 노는 게 중요하긴 하지..." 

내가 너무 노는 데 집중해서 아이를 키운 걸까? 덕분에 '에너지가 많은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아이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걷다가 결국 내가 KO패를 인정했다. 적어도 잠 자기 전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조르니까, 친구들과 뛰어놀며 밝고 건강하게 크는 게 중요하긴 하니까... 

"그래, 우리 열심히 놀자!"로 그 날의 대화를 마쳤다. 그래도 요즘 막내가 그 때 엄마가 한 말을 기억하는지 2권 정도는 읽으려고 노력(이게 중요하다, 노력이라는 게!)하는 것 같다. 지난 목요일 색깔아이 때문에 도서관에 갔을 때에도 <앗, 따끔!>이라는 책과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의 <서커스>란 책, 두 권을 읽었다.  

<앗, 따끔>도 짧은 그림책이었지만 <서커스>는 맨 앞과 맨 뒤에 한 줄씩 단 두 줄의 글이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열심히 읽었으니까, 그림책에선 그림을 읽는 것도 무지무지 중요하니까, <서커스>란 책을 읽을 때 우리딸 말고도 서너명의 아이들이 모여들만큼 아이들의 관심을 꽤 끌었으니까. 이렇게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으면 좀 위안이 되냐, 싶긴 하지만..   

그 이후로 아직도 개구리 상은 멀고도 멀다. 개구리 상은 포기하고 내가 따로 우리 막내에게 적당한 좀 더 쉬운 규정을 만들어 작은 선물을 주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그래,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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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0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막내가 이쁜데요. 큭큭.
책이야 읽히고 싶고, 저도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해대지만
제 맘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내내 놀다니, 너무 좋아요.
읽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서 책을 쏙 고를 수 있는 위치잖아요. ^^

섬사이 2011-04-04 10:44   좋아요 0 | URL
엄마가 하도 놀자고만 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어요.
셋째 아이라서 그런지 제가 뭘 챙겨서 해주고 그러질 않아서 그런가 봐요.

마노아 2011-04-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개-과정-결말이 모두 아름다운 걸요. 노는 게 더 좋다고 하지 않고 노는 게 중요하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아이가 믿음직스러워요.^^

섬사이 2011-04-04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놀랐어요.
너무 진지하게 "노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해서요.
아직은 그런 나이지 싶기도 하구요.

순오기 2011-04-02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요렇게 야무진 유빈이는 개구리상 안 받아도 훌륭해요.
역시 <도서관이 키운 아이> 답다는 생각에 추천 꾹!!^^

섬사이 2011-04-04 10:46   좋아요 0 | URL
개구리상을 미끼 삼아 던졌던 건데 요 꼬맹이 딸이 덥석 물어주질 않네요.
<도서관이 키운 아이>라기 보다 <놀이터가 키운 아이>에 더 가까워요. ^^

무스탕 2011-04-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는거 정말 중요하지요. 중요한게 뭔지 잘 아는 총명한 막둥이에요 ^^
울 동네엔 '어린이 도서관' 이라고 이름 붙인 도서관이 따로 있는데 (그러니까 도서관 한 켠이 어린이 코너가 아니고 도서관 자체가 어린이 도서관이에요) 가본적이 없어서 뭐가 틀린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엔 도대체 뭐가 있을까요? +_+

섬사이 2011-04-04 10:48   좋아요 0 | URL
제가 가는 도서관엔 엄마들과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많아요.
무엇보다 사서선생님들과 무척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좋구요.
몇 년 전에는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백두산에 다녀온 적도 있어요. 그리고 올해는 '평화'를 주제로 뭔가를 한다는 것 같던데..
한 번 가 보세요. 아무래도 '어린이'에 더 집중된 도서관이라 다른 일반도서관과 또 다를 거예요.

프레이야 2011-04-0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당당한 막내네요^^
섬사이님이 챙겨주시는 선물도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도 어린이도서관이 별채에 따로 있는데
아기자기 아주 예뻐요. 아이 어릴 적엔 그런 곳이 많이는 없었는데..

섬사이 2011-04-04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막내랑 도서관에 다니면서 큰애들 때 생각을 해요.
그 때에도 주변에 이런 어린이도서관이 있었으면 큰애들의 어린시절이 더 풍요로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죠.
동네마다 어린이 도서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세실 2011-04-0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개구리상 아이디어도 좋고,
선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주관 뚜렷한 막내도 귀여워요~~~
"도서관=놀이터"라는 생각도 좋잖아요^*^

섬사이 2011-04-04 10:52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막내더러
"너는 도서관에 자주 가서 책 많이 읽겠구나"하면요,
"그냥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놀다 오는 거예요." 해요.
사람들이 막내가 책을 무지무지 많이 읽는 줄 착각하고 있거든요.

하늘바람 2011-04-0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태은이를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버스를 타고가야하다보니 자주 안가게 되네요 막내가 참 똘똘하고 귀여워요

섬사이 2011-04-04 10:53   좋아요 0 | URL
저도 버스타고 걷고 해서 가요.
버스정류장으로 네다섯 정거장 쯤 되요.
그리고 내려서 또 좀 걸어야 하구요.
그런데 재미있어서 가요.
나들이 삼아서요.^^

꿈꾸는섬 2011-04-0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저흰 큰애가 도서관 가는 걸 무척 좋아했었는데 작은애가 도서관에만 가면 여기저리 돌아다니고 책 읽는 애들 훼방놓아서 그 이후로 도서관 가는 걸 자제했는데 그게 벌써 한참 되었네요.ㅜㅜ 저만 혼자가서 책 빌려와서 집에서 읽히고 있어요. 아이들도 데려가야하는데 말이죠.

섬사이 2011-04-04 14:13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은 빌려와서 자기 전에 집에서 읽어줘요.
아이도 도서관에서 읽는 것보다 그걸 더 좋아하더라구요.

pjy 2011-04-0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막내동생도 집에 책이 너무 많다고 질린다고 안읽고 그랬었는데요~
학교가니 책읽고 막 잘난척하는 친구가 생겼을때 급 도전하게 되던데요~ 막내들이 욕심은 진짜 많잖아요~ 얼마나 영악한데요ㅋㅋㅋ 분명히 노는거보다 중요한게 많이 생길꺼예요^^;

섬사이 2011-04-04 14:14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pjy님.
정말 그럴까요?
노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아질 그 날이 올까요?
오겠죠?
희망을 줘서 고마워요. ^^
 
<유아/어린이/청소년>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알라딘 신간평가단 4기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책을 너무너무 많이 받아 리뷰를 쓰느라고 진이 빠졌었다. 평가단 활동을 끝내고 나서 이제 신간평가단 모집할 때 신청하지 말아야지, 했었다.  그런데 얼마전 신간평가단 활동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으흠.. 이 정도라면.. 하는 마음에 덜컥, 신청하고 뽑혔다.  

그래서 평소에 안하던 '주목신간'을 뽑는 페이퍼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원한 분야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 분야다. 3월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페이퍼로 올리는 게 4기에는 없었던 신간평가단의 새로운 미션이다. 그리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무척 고민되는 미션이다.

도서관에서 추천도서를 선정할 때랑 기분이 다르다. 최대 다섯 권만 담을 수 있으니 고민이 더욱 깊다. 이 책 저 책 번갈아가며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 마침내 다섯 권을 뽑았다.  (내가 뽑는다고 그 책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첫 번째 책 ,
'지구를 위한 한 시간'이라는 책이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원전의 방사성물질 유출 때문에 세상이 소란하다.  예전에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란 책을 읽고난 후 원전건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이번에 이웃나라에서 불거진 원전의 심각성을 보면서는 원전이 필요하게 된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전기가 어디서 저절로 샘솟는 것마냥 아무 생각 없이 헤프게 쓰는 내가 원전건설반대를 부르짖을 자격이 있나 싶었다. 원전이 싫다면 전기를 좀더 귀중하게 여겼어야 했다. 원전이 더 이상 필요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골랐다. 지구를 위한 한 시간. 2007년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된 '지구촌 불끄기 운동'에 대한 그림책이다. 전등 하나를 밝히는데 소요되는 전력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지구 전체의 전등이 꺼진다면, 지구도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시간만이라도.   

 

두 번째 책 ,
2011 칼데콧 메달 수상
2010 뉴욕 타임스 최우수 그림책 선정
2010 퍼블리셔 위클리 최우수 도서 선정
2010 커커스 리뷰 최우수 도서 선정
일단 수상경력이 너무 화려하다. 너무 이러면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해서 거북이가 이기게 해주고, 코 알레르기가 있는 하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펭귄 곁에 가만히 함께 앉아 있어주고, 밤이 무서운 올빼미에게 책을 읽어주는 다정한 동물원지기 아모스 할아버지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할아버지가 아픈 날, 동물들은 할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음... 궁금하다. 

 

세 번째 책,  

<짜장면 불어요!>의 이현 작가의 새 책이다. 이번엔 2045년을 배경으로 하는 SF동화다.  같은 작가의 전작 <로봇의 별>이라는 책도 SF동화라고 할 수 있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책소개글에 따르면 <로봇의 별>은 '굵직한 서사로 인간과 로봇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냈지만 이 책은 재치와 유머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따사로운 봄햇볕 아래서 심각하게 인상쓰지 않고 깔깔대며 읽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있을까. 꽃망울 터지듯 나와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질 수 있다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마음에 걸린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2권까지 있다는 거. 서평책이 <마음대로봇 1>만 온다면 어쩐지 좀 뒤가 개운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예상된다는 게 좀...   

 

 네 번째 책, 
 

 푸른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상을 탔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왜 상을 탔을까?는 아무래도 궁금해진다. 이 책의 소개글을 읽고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지우개 따먹기'라는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어른들에게도 통할만한 인생법칙(?) 같은 것을 다뤘다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작가가 얼마나 이야기를 잘 끌어갔느냐가 중요하겠지만, ' 박진감 넘치는 탄탄한 구성과 간결하면서도 구성진 문체,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의 몸짓이 돋보인다'는 소개글로 보아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다섯 번째 책, 

청소년 책이다. 청소년 뿐 아니라 어른인 나도 고전문학을 읽는다면 주로 시조나 소설 영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창세가부터 시작하여, 허균, 이규보, 정약용, 이황, 강희맹, 김정희 등 같은 익숙한 인물부터 이양연, 오도일, 임숙영처럼 낯설은 인물의 다양한 글들이 실려있다.  
문학도 입시를 위해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교과서 고전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 이외에도 일반 민중들의 원초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창세 신화와 서사무가 등 기존에 만나기 힘들었던 고전의 명편들을 수록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고전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였다'는 책소개글은 일단 반갑다.  
그리고 굳이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나처럼 고등학생 때 이런 읽을거리를 접해보지 못했던 어른에게는 참 신선한 책이 될 것 같다.  

  

이 페이퍼를 쓰면서 두어번 페이퍼를 갈아 엎었다. 올렸다가 지워진 책이 두어권. 그 책들에게 어쩐지 좀 미안하다. 내가 쓴 페이퍼에 없는 책이라도 좋으니 부디, 4월에 좋은 책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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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0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과 마음대로 봉은 관심도서여요.
지우개 따먹기는 실망하지 않을거에요.^^
다섯번째 책도 끌리는데요.^^

섬사이 2011-04-02 11:21   좋아요 0 | URL
늘 욕심을 버려야지, 하면서도 책들을 보면 욕심이 앞서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무슨 책이 올지 기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꿈꾸는섬 2011-04-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기 신간평가단 활동 하시는군요.^^ 축하해요.^^

섬사이 2011-04-02 11: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신간평가단 활동은 좀 조심스럽기도 해요.^^

세실 2011-04-0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잣거리에서 세상을 배우다.' 학창시절에 접해보지 못했던 저도 이런책들 보면 읽고 싶어요. 꼭 받으시길 바래요.

메일 잘 받았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님의 힌트로, 고미숙샘이 활동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강사도 섭외했답니다.
전 담당자로서 꼭 들어야지 하고 기대하고 있구요!!

섬사이 2011-04-11 07:29   좋아요 0 | URL
아, 메일 받으셨어요?
수유+너머에서 강사 분을 섭외하셨다니
무척 근사한 강의가 될 것 같아요.
가깝기만 하다면 저도 들을텐데요.
 

아이들 졸업하고 봄방학하고 시어머님 생신, 도서관 정기총회... 이래저래 정신이 없기도 했다. 아들녀석은 산마을학교에 낙방(?)한 후 근처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이 결정되었다. 여전히 요리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고, 필기시험에는 붙었지만 한식실기는 아직이다. 지난 번에 한 번 시험봤다가 화양적의 꼬치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 4월에 다시 도전할 예정이다.  

막내가 어린이집 봄방학에 들어서자 신났다고 동네 엄마들이랑 나들이를 다녔다. 길상사에 갔다가 고대 캠퍼스에서 놀고, 그 다음엔 어린이 대공원으로, 그 다음엔 키즈카페로.. 그 중간에 막내 동네 친구의 생일 파티가 두 번 있었으니 2월 말엔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책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겨울이 가기 전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달랑 1권만 읽었다.  그리고 아직도 지지부진. 2권 중간쯤 읽고 있는 중. 아이들 새학년이 시작되고 마음이 어수선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순전히 책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게 아닐까, 염려되는 상황. 권태기에 들어선걸까?  이 페이퍼를 쓰는 동안에도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 자꾸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이봐, 내가 궁금하지 않아?"  이제 3월도 거의 끝나가니 책읽기에 박차를 가해야지. 아이들 학교생활도 어느 정도 틀을 잡았으니.  

아, 지난 해엔 지원을 받아 신동호 시인과 <마음을 여는 책읽기>를 진행했는데, 올해엔 엄마들을 위한 인문학 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구청에 500만원 지원 신청을 했는데 300만원만 받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 영화, 문학 강좌를 열고 각 강좌당 10회의 강의를 계획했던 걸 좀 수정해야 했다. 강의를 강좌당 5~6회로 줄이고 나중에 자료집을 만들기로.  영화강의는 독립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황혜림 님이 맡아주시기로 했고, 문학 강의는 작년에 이어 신동호 선생님이, 역사는 아직 확정이 되질 않았다.  어쩐지 올해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잘 마무리 하는 것만으로도 꽉 찰 것 같다.  

영화는 2월 한 달동안 <시>, <라푼젤>, <환상의 그대>, <상하이>, <만추>, 총 5편을 봤다.  

<시>는 극장에 가서가 아니라 설 연휴 끝머리에 TV를 통해 봤지만, 다섯 편의 영화 중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다. 페이퍼에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올렸지만 그 다음에도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던. 페이퍼에 글을 쓰고 나서 "본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극 중에서 미자가 정말 보았던 건, 꽃이나 새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꽃이나 새를 보는 중에도 미자는 마음으로 죽은 여학생을 보고 있었던 것일게다. 극중에서 김용택 시인이 나와서 "잘 봐야된다"고 했던 말에 대한 적절한 예시였다고나 할까.  

<만추>는 막내 어린이집 수료하던 날, 그러니까 봄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 날 부랴부랴 가서 보고 왔다. 탕웨이가 참 돋보였고, 현빈과 탕웨이가 둘이 짜고 나를 울렸다. 하나는 폐쇄된 놀이 동산에서 두 연인을 바라보며 립싱크하는 장면이었고, 또 하나는 현빈의 포크 발언으로 탕웨이가 속에 담아둔 서러움이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쓸쓸함이 어찌나 잘 어울어지던지... 스크린에 손을 뻗으면 축축하게 물기가 베어나올 것만 같은 장면들은 또 어떻고.. 이 영화를 보고 온 날 남편이 "가서 현빈 잘 보고 왔어?"하고 묻기에 "나, 현빈 보러 간 게 아니라 영화보러 간거거든!"하며 따졌는데, 엄밀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현빈과 영화, 둘 다 보러 갔던 거라는 걸 인정한다.  

<환상의 그대>는 삶이 씁쓸해지는 영화. 코미디스러운데 좀스러운 삶에 대한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고 할까.
<상하이>는 좀 더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다. 뭔가 화려하긴 한데 영화의 진행이 많이 허술하다는 느낌.  

<란푼젤>은 물론 우리 막내 때문에 본 영화. 영화보다 CG의 발달을 더 실감나게 느꼈다.  

부실했던 나의 2011년 2월이다. 아무리 바빴어도 책을 좀 더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실한 2월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는 3월도 여전히 부실하다는 게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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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아 저 갑자기 섬사이님 이 페이퍼 보니까 이메일 보내고 싶어졌어요. 제가 이 댓글 다 쓰면 이메일 보낼게요. 히히.
아니 그리고 어떻게(!)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멈추실 수 있죠? 네? 궁금해요 다 읽고난 후의 섬사이님의 감상이요. 그러니 다 읽으시면 어땠는지 감상 들려주세요. 아셨죠?

섬사이 2011-03-23 15:30   좋아요 0 | URL
앗, 방금 이메일 확인하고 냉큼 들어왔더니 다락방님이 다녀가셨네요.
이 페이퍼 쓰고는 막내 어린이집에서 올 시간이 되어서 나갔다가 왔거든요.
안나 카레니나는 멈추진 않았어요. 너무 느리게, 아주 천천히, 꾸준하게 읽고는 있어요. 머리 속에서 레빈이 자꾸 말을 시키고 있어서...
톨스토이가 대문호라는 점을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확인하고 있어요. 인물의 마음과 미묘한 심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는지!
암튼, 반가워요. 다락방님. 그리고 고마워요.

마녀고양이 2011-03-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양적 꼬치가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하고, 다시 시험본다는 아드님...
너무 멋지고, 그런 아드님을 둔 섬사이님이 부럽고,
그런 아드님을 키운 어머니를 둔 아드님이 다시 부러워요.

페이퍼 읽으면서 그 문구를 읽고 나서는 필이 확 꽂혀버렸어요. ^^
봄인데 너무 추워요. 봄이 너무 기다려져요~

섬사이 2011-03-24 14:23   좋아요 0 | URL
첫 시험은 경험 삼아 보는 거죠.
몇 번은 더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4월에 보는 시험도 붙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너무 추운 봄이죠? 3월의 날씨는 너무 변덕스럽고
올 봄 첫 민들레를 아직도 만나지 못했어요. ㅠ.ㅠ

세실 2011-03-2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엄마를 위한 인문학 학교 프로그램이라니. 게다가 역사, 영화, 문학을 다룬다니 멋져요. 자세한 소스좀 주세용^*^ 계획서 등등.
청주엔 강사풀이 약해서 고민스럽긴 하지만 굿 아이디어 세요.
1일 2시간 기준으로 역사 20시간, 영화 20시간, 문학 20시간 하면 괜찮을까요? 아니면 1일 3시간씩 할까?
학부모 대상 프로그램 6개 추진해야 하는데 벌써 3개는 해결된거잖아요. 와 좋아요~~~
감사. ㅎㅎ

섬사이 2011-03-24 14:28   좋아요 0 | URL
구청에 사업계획서 낼 때는 10강으로 하고, 커리큘럼도 임의대로 써서 냈어요. 물론 강사도 예상으로.. ^^
지원이 결정되고 예산이 확정된 후 강사 섭외하고 커리큘럼을 짜는 중이에요.
구청에 냈던 사업계획서가 필요하신 건지,
아니면 실제 강의할 커리큘럼이 필요하신 건지..???
이메일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게요. ^^

2011-03-26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8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3-23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기에는 굉장히 충실하고 알차게 2월을 보내신 것 같은데요.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요리를 배우는 아드님께서 종종 맛난것 해주나요?

그 인문학 프로그램에 관심이 가네요. 혹시 남자가 들으면 안되나요?

섬사이 2011-03-24 14:33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서요.
아들은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합니다.
김치낙지칼국수, 매작과, 오징어볶음, 돼지갈비 등등...을 했네요.
주방에 서있는 아들의 뒷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에요.
가끔은 남편이 서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쩝~!^^

순오기 2011-03-2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늦었어요~~~~~ 바쁜 2월을 보내셨군요.
아드님의 한식 실기에 응원을 보내고,
공감할 수 있는 건 '만추'뿐이네요.^^

섬사이 2011-03-28 16:01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자격증을 4~5개는 따놓을 거라고 그러는데
그게 말처럼 쉽겠어요... ^^
만추, 참 촉촉하게 젖어들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그렇죠?

꿈꾸는섬 2011-03-3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차게 매일을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전 요새 책도 안 읽고 인터넷도 안 하고 대체 뭘하는데 하루가 후딱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ㅜㅜ
요리하는 아드님 너무 멋져요.^^
제 사촌동생은 고등학교때부터 요리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작은아버지가 엄청 반대하셨지만 지금은 엄청 잘 해내고 있더라구요. 가끔 맛난 것 얻어 먹는 재미가 솔솔해요.ㅎㅎ

섬사이 2011-04-01 14:27   좋아요 0 | URL
알차기는요.. 에휴, 늘 모자라고 모자라요.
왜 그럴까요?
저도 처음에 아들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리 썩 반기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다 싶어요. 어쨌든 아들이 즐겁고 재미있어 하니까요.
가끔 제가 아들한테 그래요, 이담에 엄마랑 작은 까페라도 하나 하자고..ㅋㅋ
 
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게달레 대장이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늘 슬픈 것들만 떠올리면 독이 되고,강한 빨치산이 되기 어렵네. 그리고 난 세 가지만 믿네. 총알,보드카,여자...예전엔 이론을 믿어 한때 경도되었지만, 이제 아니네."
"왜요?"
"그건 삶이 아니니까."
"그럼 삶은 뭐죠?"
"앞으로는 살아야 하고 뒤로는 수긍해야 하는, 뭐 그런 것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 꼬치꼬치 묻지 않는 것. 하하."
"...."
"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 총알이 날아가다가 방향을 바꿔버렸으면 좋겠다고."
"어디로요?"
"나에게로."
"아니, 왜요?"
"그래야 진실한 세상으로 바뀔 테니까."
"..."-233쪽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게 없고 두 번 깥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하물며 사랑이라고 해서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중략) 그렇지만 그는 사랑이란 관계가 모든 걸 떠나 그냥 계절과 비슷한 거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운 겨울엔 서로 꼭 붙어있고, 더운 여름엔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선선한 봄가을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서로 마주보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관계 말이다. -261쪽

이같은 썩은 소비에트 현실이 과연 그게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문제네. 맑스?엥겔스?플레히노프?레닌?트로츠키?스탈린?예수?여호와?무하마드...?
아무도 아니네! 나, 바로 나라는 존재일세. 나를 비롯한 그런 수많은 존재들이 책을 덮지 않고 책속에서 바로 길을 찾았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빚어졌다고 생각하네. 앞서 책을 읽고 반드시 덮으라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었네. 물론 좋은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그런 뜻이었고...독서의 완성은 책을 덮는 거네. 책을 다 읽는다는 게 아니라 덮어야 할 때를 알고 덮을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이네. 거기서부터 길이 시작되지.-268쪽

물론 난 개인적으로도 스탈린이라는 한 인간을 불신한지 오래 되었네. 그가 히틀러와의 협정서에 서명을 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인간을 사랑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사랑을 모르는 자가 통치자가 된다는 건 강도한테 칼을 쥐어주는 거나 똑같다고 보네. -339쪽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만큼 기억의 고집을 남기고 간다. 그 기억의 고집을 그는 꺾을 수가 없었다. 멘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털어버리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최근의 기억들마저도 희미해져버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절반쯤 지우고 절반쯤 다시 그리는 것처럼 모든 게 흐릿한 형체로 중첩되었다. 기억이란 게 과일바구니와도 같은 것이어서 정적량 이상을 담으면 과일 몇 개가 아니라 전부 다 상처받게 된다.-369쪽

"여자들 거의가 나보다 더 많이 먹으면서 스스로에게 체념하고 굴복하더니 마침내 죽어갔어요. 자포자기는 자살 이상의 죄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난 이를 악물고 버텨냈어요.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요. 글쎄요, 내가 그들보다 특별히 삶을 더 사랑했다거나, 더 집착했을까요? 아마 그건 아닐 거예요."-391쪽

그런데 간사한 게 또 사람의 마음이다. 충족되고 만족되어도 또 더 원한다. 물론 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동시에 원하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다.-434쪽

평화라는 이름으로 복수가 복수를 불렀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탐욕이 탐욕을 부른 것이었다. 과연 이런 역사는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인가? 멘델은 현기증이 일어나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436쪽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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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연휴가 끝나가던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그 애매한 시간대에 kbs에서 영화 [시]를 했다.  내가 어릴 때, 아마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 영화의 주연여배우 윤정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부모님은 김지미, 남정임 같은 여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었던 것 같은데, 어린 내 눈에는 윤정희 만큼 고운 여배우는 없었다. 아마 주말의 명화를 통해서 봤을 게 틀림없을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과도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남자배우로는 신성일을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엄앵란과 신성일이 부부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럼 윤정희는 어떡하지?하고 내심 심각하게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맘 속에 한국판 오드리 햅번으로 남아있던 여배우 윤정희가 자글자글한 얼굴과 푸석한 머리결로 칸영화제며 대종상, 청룡영화상의 주인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좀 읽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훌쩍 넘어 있었고, 다시 거실로 나와 공연히 서성대다가 4시를 한참 넘기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마음이 꼭 빗방울 자국이 패인 흙마당 같았다. 까끌한 모래알갱이들이 패인 자국 주변으로 드러나서 마음을 심난하게 했다.  

오늘 점심 먹은 설거지를 하면서도 내내 이 영화 생각을 한다. 무엇이 날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지. 어릴 적 보았던 가장 고운 얼굴을 가진 여배우의 나이든 모습 때문일까. 하지만 윤정희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고왔다. 나도 저렇게 늙었으면, 하고 바랄만큼.  

가장 불편했던 건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던 '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종욱할머니인 미자(윤정희)는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명사가 자꾸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를테면 터미널, 지갑.. 그런 것들. 의사가 미자에게 처음에는 명사를 잊어먹고 그 다음엔 동사.. 그렇게 하나하나 점점 더 많은 기억을 잃게 될 거라고 설명한다. '아시겠어요?'하는 의사의 질문에 미자는 '네, 알아요. 명사가 제일 중요하잖아요.'하고 대답한다.   

가장 중요한 명사를 잊어가는 미자에게 손자 종욱과 친구들이 벌인 성폭행 사건이 드러난다. 피해 여학생은 그 사건의 충격으로 자살을 하고. 그리고 가해 남학생의 부모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며 사죄하기 위해서라거나 꽃다운 여학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다.  

 

그 대책이라는 것이 한 집에서 500만원씩 갹출하여 3천만원으로 피해보상을 하고 빨리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미자는 '명사'를 잊어간다. 그러면 그들이 잊은 건 뭘까?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건 뭘까.

알츠하이머로 명사를 잊어가는 미자는 죽은 여학생이 폭행을 당했던 과학실과 여학생이 다니던 성당, 여학생이 몸을 던진 다리를 찾아 다닌다. 그리고 성당에서 여학생의 사진을 몰래 가방에 담아온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지만 '명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으려고, 그 여학생이 겪었던 고통과 마주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손주 종욱 또한  밥 잘먹고 TV를 보며 자기가 상처를 준 여학생을, 자기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다. 식탁 위에 놓은 여학생의 사진을 보고도 잠깐 움찔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잘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미자다. 시창작 강의의 과제를 잊지않고  '시'를 남기는 것도 또한 미자 뿐이다.

또 하나 마음이 불편했던 건, 쓰레기 같은 말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욱과 미자 간의 대화 같은 것, 슈퍼 여주인에게 미자가 여학생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의 그런 말 같은 것 말이다.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떨어져 뒹구는 말들.  전해지지 못하는 우리의 많은 말들 말이다. 상대에게 스며들지 못하고 단절되는.  또는 사건을 빨리 조용히 덮어버리자고 작당하는 사람들의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대화들도 있다.  

그런데 미자는 '시'를 배운다. 배우고 쓴다. '시'는 쓰레기가 아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언어의 보석들이다. 그래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말들 속에서 미자가 시를 쓰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물겨웠던 거다. 우리 모두의 말들이 쓰레기가 되지 않고 '시'가 될 수 있기를 바라지 않고는 못배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미자는 피해여학생의 집을 찾아갔다가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시상에 잠기다가 그만 피해여학생 엄마에게 보여서는 안될 모습을 보이고 만다. 순간, 자기가 왜 이 곳에 왔는지를 잊고 피해여학생 엄마에게 '행복' 운운하며 팔자 좋은 소리를 해대고 만 것이다. 미자까지 명사보다 중요한 것을 잊은 그 순간, 영화는 결말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난 어릴 때 본 윤정희 보다 이 영화 속 윤정희가 더 좋아졌다. 저렇게 공주스러운 옷을 입고  천진한 수다를 떨 줄 아는 할머니로 나타나 고되고 힘겨운 미자의 삶과 마음을 보여주어서 너무 고맙다.  

영화 속 미자가 쓴 <아녜스의 노래>라는 시다.  

그 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이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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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8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9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9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2-0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때문에 윤정희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는데 보통의 여배우 같지 않은 모습으로 나이를 먹어서 더 고와보였어요. 이 영화 참 좋았는데 지금 섬사이 님의 글도 영화만큼이나 좋아요. 명사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말씀해 주셨어요.
긴 연휴 끝, 아직은 유효한 인사를 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섬사이 2011-02-09 14:42   좋아요 0 | URL
늦은 밤에 하는 영화였는데 맘 잡고 앉아 보기를 참 잘 했구나, 싶어요.
놓쳤으면 정말 아까울 뻔 했어요.
마노아님도 새해 복 많이 많이 많이 받으세요~~

마녀고양이 2011-02-0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정희 님 여전히 곱네요...
저는 통영 다녀오느라 이 영화 놓쳤는데, 너무 보고 싶어요.

치매의 망각은 무서워하지만, 정작 우리가 중요한 것은 잊고 산다는 말씀
아침부터 곰곰히 되씹어봅니다. 즐거운 2월 되셔요.

섬사이 2011-02-09 14:43   좋아요 0 | URL
어쩌면 우리 전부가 변형된 알츠하이머에 감염된 거 아닐까요? ^^
잊어버리거나 잊은 척 하거나.
마녀고양이님도 2월 즐겁게 보내세요.
어느새 10일이 코앞이에요.
초순이 다 지나가 버렸어요. ㅠ.ㅠ

2011-02-09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o초우ve 2011-02-09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고양이님 안다니는곳 없으시군요 ㅋ
저도 "시" 영화 봤어요
영화를 보면서 가슴 한켠으로 공허한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더라구요 ㅡ,.ㅡ;;

섬사이 2011-02-11 09:33   좋아요 0 | URL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참 섬세하게 담긴 것 같아요.
그냥 '슬프다'라는 표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저도 느꼈어요.

감은빛 2011-02-12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꼭 빗방울 자국이 패인 흙마당 같았다.'는 표현이 참 멋져요!
나중에 영화를 보기 위해 자세한 내용은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섬사이 2011-02-25 20:45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이 이렇게 늦어버렸어요.
제가 요즘 서재를 잘 들어오지 못해서 그만...
죄송해요.
암튼 멋지다고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시', 저는 무척 좋았는데, 감은빛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꿈꾸는섬 2011-02-1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멋진 영화리뷰를 이제야 봤네요.^^
'시' 참 좋더라구요.^^

섬사이 2011-02-25 20:4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기대 이상이었어요.
댓글을 너무 늦게 달아서 미안해요. ㅜ.ㅜ

세실 2011-02-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시 보면서 그냥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현실과 괴리되는 그 모습이 안타깝더라구요.
공주풍의 옷을 입고 시를 배우지만 현실은 너무 팍팍하잖아요.
그냥 현실에 적응하며 힘들면 힘들다, 못하면 못한다 표현하고 사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 영화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결국엔 자살로 가는 결말도요......
끝까지 현실도피적인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