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졸업하고 봄방학하고 시어머님 생신, 도서관 정기총회... 이래저래 정신이 없기도 했다. 아들녀석은 산마을학교에 낙방(?)한 후 근처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이 결정되었다. 여전히 요리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고, 필기시험에는 붙었지만 한식실기는 아직이다. 지난 번에 한 번 시험봤다가 화양적의 꼬치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 4월에 다시 도전할 예정이다.  

막내가 어린이집 봄방학에 들어서자 신났다고 동네 엄마들이랑 나들이를 다녔다. 길상사에 갔다가 고대 캠퍼스에서 놀고, 그 다음엔 어린이 대공원으로, 그 다음엔 키즈카페로.. 그 중간에 막내 동네 친구의 생일 파티가 두 번 있었으니 2월 말엔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책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와 겨울이 가기 전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달랑 1권만 읽었다.  그리고 아직도 지지부진. 2권 중간쯤 읽고 있는 중. 아이들 새학년이 시작되고 마음이 어수선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순전히 책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게 아닐까, 염려되는 상황. 권태기에 들어선걸까?  이 페이퍼를 쓰는 동안에도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 자꾸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이봐, 내가 궁금하지 않아?"  이제 3월도 거의 끝나가니 책읽기에 박차를 가해야지. 아이들 학교생활도 어느 정도 틀을 잡았으니.  

아, 지난 해엔 지원을 받아 신동호 시인과 <마음을 여는 책읽기>를 진행했는데, 올해엔 엄마들을 위한 인문학 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구청에 500만원 지원 신청을 했는데 300만원만 받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 영화, 문학 강좌를 열고 각 강좌당 10회의 강의를 계획했던 걸 좀 수정해야 했다. 강의를 강좌당 5~6회로 줄이고 나중에 자료집을 만들기로.  영화강의는 독립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황혜림 님이 맡아주시기로 했고, 문학 강의는 작년에 이어 신동호 선생님이, 역사는 아직 확정이 되질 않았다.  어쩐지 올해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잘 마무리 하는 것만으로도 꽉 찰 것 같다.  

영화는 2월 한 달동안 <시>, <라푼젤>, <환상의 그대>, <상하이>, <만추>, 총 5편을 봤다.  

<시>는 극장에 가서가 아니라 설 연휴 끝머리에 TV를 통해 봤지만, 다섯 편의 영화 중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다. 페이퍼에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올렸지만 그 다음에도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던. 페이퍼에 글을 쓰고 나서 "본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극 중에서 미자가 정말 보았던 건, 꽃이나 새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꽃이나 새를 보는 중에도 미자는 마음으로 죽은 여학생을 보고 있었던 것일게다. 극중에서 김용택 시인이 나와서 "잘 봐야된다"고 했던 말에 대한 적절한 예시였다고나 할까.  

<만추>는 막내 어린이집 수료하던 날, 그러니까 봄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 날 부랴부랴 가서 보고 왔다. 탕웨이가 참 돋보였고, 현빈과 탕웨이가 둘이 짜고 나를 울렸다. 하나는 폐쇄된 놀이 동산에서 두 연인을 바라보며 립싱크하는 장면이었고, 또 하나는 현빈의 포크 발언으로 탕웨이가 속에 담아둔 서러움이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쓸쓸함이 어찌나 잘 어울어지던지... 스크린에 손을 뻗으면 축축하게 물기가 베어나올 것만 같은 장면들은 또 어떻고.. 이 영화를 보고 온 날 남편이 "가서 현빈 잘 보고 왔어?"하고 묻기에 "나, 현빈 보러 간 게 아니라 영화보러 간거거든!"하며 따졌는데, 엄밀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현빈과 영화, 둘 다 보러 갔던 거라는 걸 인정한다.  

<환상의 그대>는 삶이 씁쓸해지는 영화. 코미디스러운데 좀스러운 삶에 대한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고 할까.
<상하이>는 좀 더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다. 뭔가 화려하긴 한데 영화의 진행이 많이 허술하다는 느낌.  

<란푼젤>은 물론 우리 막내 때문에 본 영화. 영화보다 CG의 발달을 더 실감나게 느꼈다.  

부실했던 나의 2011년 2월이다. 아무리 바빴어도 책을 좀 더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실한 2월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는 3월도 여전히 부실하다는 게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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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아 저 갑자기 섬사이님 이 페이퍼 보니까 이메일 보내고 싶어졌어요. 제가 이 댓글 다 쓰면 이메일 보낼게요. 히히.
아니 그리고 어떻게(!)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멈추실 수 있죠? 네? 궁금해요 다 읽고난 후의 섬사이님의 감상이요. 그러니 다 읽으시면 어땠는지 감상 들려주세요. 아셨죠?

섬사이 2011-03-23 15:30   좋아요 0 | URL
앗, 방금 이메일 확인하고 냉큼 들어왔더니 다락방님이 다녀가셨네요.
이 페이퍼 쓰고는 막내 어린이집에서 올 시간이 되어서 나갔다가 왔거든요.
안나 카레니나는 멈추진 않았어요. 너무 느리게, 아주 천천히, 꾸준하게 읽고는 있어요. 머리 속에서 레빈이 자꾸 말을 시키고 있어서...
톨스토이가 대문호라는 점을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확인하고 있어요. 인물의 마음과 미묘한 심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는지!
암튼, 반가워요. 다락방님. 그리고 고마워요.

마녀고양이 2011-03-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양적 꼬치가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하고, 다시 시험본다는 아드님...
너무 멋지고, 그런 아드님을 둔 섬사이님이 부럽고,
그런 아드님을 키운 어머니를 둔 아드님이 다시 부러워요.

페이퍼 읽으면서 그 문구를 읽고 나서는 필이 확 꽂혀버렸어요. ^^
봄인데 너무 추워요. 봄이 너무 기다려져요~

섬사이 2011-03-24 14:23   좋아요 0 | URL
첫 시험은 경험 삼아 보는 거죠.
몇 번은 더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4월에 보는 시험도 붙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너무 추운 봄이죠? 3월의 날씨는 너무 변덕스럽고
올 봄 첫 민들레를 아직도 만나지 못했어요. ㅠ.ㅠ

세실 2011-03-2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엄마를 위한 인문학 학교 프로그램이라니. 게다가 역사, 영화, 문학을 다룬다니 멋져요. 자세한 소스좀 주세용^*^ 계획서 등등.
청주엔 강사풀이 약해서 고민스럽긴 하지만 굿 아이디어 세요.
1일 2시간 기준으로 역사 20시간, 영화 20시간, 문학 20시간 하면 괜찮을까요? 아니면 1일 3시간씩 할까?
학부모 대상 프로그램 6개 추진해야 하는데 벌써 3개는 해결된거잖아요. 와 좋아요~~~
감사. ㅎㅎ

섬사이 2011-03-24 14:28   좋아요 0 | URL
구청에 사업계획서 낼 때는 10강으로 하고, 커리큘럼도 임의대로 써서 냈어요. 물론 강사도 예상으로.. ^^
지원이 결정되고 예산이 확정된 후 강사 섭외하고 커리큘럼을 짜는 중이에요.
구청에 냈던 사업계획서가 필요하신 건지,
아니면 실제 강의할 커리큘럼이 필요하신 건지..???
이메일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게요. ^^

2011-03-26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8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3-23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기에는 굉장히 충실하고 알차게 2월을 보내신 것 같은데요.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요리를 배우는 아드님께서 종종 맛난것 해주나요?

그 인문학 프로그램에 관심이 가네요. 혹시 남자가 들으면 안되나요?

섬사이 2011-03-24 14:33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서요.
아들은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합니다.
김치낙지칼국수, 매작과, 오징어볶음, 돼지갈비 등등...을 했네요.
주방에 서있는 아들의 뒷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에요.
가끔은 남편이 서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쩝~!^^

순오기 2011-03-2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늦었어요~~~~~ 바쁜 2월을 보내셨군요.
아드님의 한식 실기에 응원을 보내고,
공감할 수 있는 건 '만추'뿐이네요.^^

섬사이 2011-03-28 16:01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자격증을 4~5개는 따놓을 거라고 그러는데
그게 말처럼 쉽겠어요... ^^
만추, 참 촉촉하게 젖어들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그렇죠?

꿈꾸는섬 2011-03-3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차게 매일을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전 요새 책도 안 읽고 인터넷도 안 하고 대체 뭘하는데 하루가 후딱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ㅜㅜ
요리하는 아드님 너무 멋져요.^^
제 사촌동생은 고등학교때부터 요리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작은아버지가 엄청 반대하셨지만 지금은 엄청 잘 해내고 있더라구요. 가끔 맛난 것 얻어 먹는 재미가 솔솔해요.ㅎㅎ

섬사이 2011-04-01 14:27   좋아요 0 | URL
알차기는요.. 에휴, 늘 모자라고 모자라요.
왜 그럴까요?
저도 처음에 아들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리 썩 반기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다 싶어요. 어쨌든 아들이 즐겁고 재미있어 하니까요.
가끔 제가 아들한테 그래요, 이담에 엄마랑 작은 까페라도 하나 하자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