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달레 대장이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늘 슬픈 것들만 떠올리면 독이 되고,강한 빨치산이 되기 어렵네. 그리고 난 세 가지만 믿네. 총알,보드카,여자...예전엔 이론을 믿어 한때 경도되었지만, 이제 아니네." "왜요?" "그건 삶이 아니니까." "그럼 삶은 뭐죠?" "앞으로는 살아야 하고 뒤로는 수긍해야 하는, 뭐 그런 것쯤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 꼬치꼬치 묻지 않는 것. 하하." "...." "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 총알이 날아가다가 방향을 바꿔버렸으면 좋겠다고." "어디로요?" "나에게로." "아니, 왜요?" "그래야 진실한 세상으로 바뀔 테니까." "..."-233쪽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게 없고 두 번 깥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하물며 사랑이라고 해서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중략) 그렇지만 그는 사랑이란 관계가 모든 걸 떠나 그냥 계절과 비슷한 거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운 겨울엔 서로 꼭 붙어있고, 더운 여름엔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선선한 봄가을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서로 마주보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관계 말이다. -261쪽
이같은 썩은 소비에트 현실이 과연 그게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문제네. 맑스?엥겔스?플레히노프?레닌?트로츠키?스탈린?예수?여호와?무하마드...? 아무도 아니네! 나, 바로 나라는 존재일세. 나를 비롯한 그런 수많은 존재들이 책을 덮지 않고 책속에서 바로 길을 찾았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빚어졌다고 생각하네. 앞서 책을 읽고 반드시 덮으라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었네. 물론 좋은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그런 뜻이었고...독서의 완성은 책을 덮는 거네. 책을 다 읽는다는 게 아니라 덮어야 할 때를 알고 덮을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이네. 거기서부터 길이 시작되지.-268쪽
물론 난 개인적으로도 스탈린이라는 한 인간을 불신한지 오래 되었네. 그가 히틀러와의 협정서에 서명을 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인간을 사랑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사랑을 모르는 자가 통치자가 된다는 건 강도한테 칼을 쥐어주는 거나 똑같다고 보네. -339쪽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만큼 기억의 고집을 남기고 간다. 그 기억의 고집을 그는 꺾을 수가 없었다. 멘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털어버리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최근의 기억들마저도 희미해져버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절반쯤 지우고 절반쯤 다시 그리는 것처럼 모든 게 흐릿한 형체로 중첩되었다. 기억이란 게 과일바구니와도 같은 것이어서 정적량 이상을 담으면 과일 몇 개가 아니라 전부 다 상처받게 된다.-369쪽
"여자들 거의가 나보다 더 많이 먹으면서 스스로에게 체념하고 굴복하더니 마침내 죽어갔어요. 자포자기는 자살 이상의 죄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난 이를 악물고 버텨냈어요.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요. 글쎄요, 내가 그들보다 특별히 삶을 더 사랑했다거나, 더 집착했을까요? 아마 그건 아닐 거예요."-391쪽
그런데 간사한 게 또 사람의 마음이다. 충족되고 만족되어도 또 더 원한다. 물론 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동시에 원하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다.-434쪽
평화라는 이름으로 복수가 복수를 불렀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탐욕이 탐욕을 부른 것이었다. 과연 이런 역사는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인가? 멘델은 현기증이 일어나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436쪽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4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