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랑 같이 다니는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책통장이라는 걸 만들어 준다. 그리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고 책통장에 기록을 한 다음 사서 선생님의 싸인을 받는다. 그 싸인이 다섯 개 모이면 개구리 도장을 찍어주고, 그 개구리 도장을 또 다섯 개 모으면 아이가 원하는 책을 선물로 준다. (그 책 선물을 '개구리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도서관 소식지에 개구리 상을 받은 아이들의 명단이 올라온다.   

우리 막내로 말하자면, 26개월 무렵부터 그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래서 재작년 도서관 총회때에는 도서관을 가장 많이 들락날락 거린 아이에게 주는 '도서관 생쥐상'을 받기도 했다. (막내가 받은 생애 첫 상장이었으니 의미가 컸다) 그런 막내이니 개구리 상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그 이유는 일단 막내에게 책을 읽어주고도 책통장에 읽은 책들을 기록해 주지 않은 내 탓도 있다. 한 달에 5천원 후원하는 사람이(새해부터는 한 구좌를 더 늘려 만원씩 후원하고 있지만) 개구리 상을 받아가면 도서관 쪽에서는 어쨌든 손해니까, 하는 생각때문이기도 했고 단순히 '귀찮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막내가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에는 엄마 모임이 있는 날 따라 와서 모임이 끝날 때까지 놀았고, 어린이집에 다니고부터는 '색깔아이'라는 미술품앗이 모임에 들어가 작품활동(?)한 후 놀다가만 왔기 때문이다.  내 책임이 크다. 어린이 도서관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커피 한 잔 하고 올 여유는 부렸으면서 아이에게 책 읽어줄 생각을 안 했다니 반성한다. 사실 잘 놀고 있는 아이를 불러다 앉히고 책을 읽힌다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았고,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배운 것도 많다. (초등학생 언니가 종이접기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한자를 많이 아는 오빠와 친구 덕분에 한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어쨌든 도서관은 책을 읽는 장소니까 선생님들께 죄송하기도 해서 어느 날 도서관 가는 길에 막내에게 슬며시 말을 꺼냈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우린 만날 놀기만 하니까 엄마가 선생님한테 좀 미안하거든. 도서관에 가면 적어도 책 두 권정도라도 읽으면 좋겠는데, 어때?" 
"......."
"있잖아, ㅅ오빠랑 ㅇ이는 소식지 나올 때마다 개구리 상 받았다고 이름이 나오더라~
우리도 책 읽고 열심히 책통장에 써서 오랜만에 개구리 상 좀 받아볼까?"
"...... 알았어, 엄마. 그럴게..." 
"정말? 그래,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니까, 우리 많이는 말고 두 권 정도 읽고 그 다음에 너 하고 싶은 거 해도 되잖아." 
"응" 

아, 그래도 컸다고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하고 감격하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길을 계속 갔는데, 한동안 말없이 걷던 막내가 불쑥 혼잣말 하듯 내뱉은 말. 

"엄마.. 그래도 나는 노는 게 더 중요해.." 
"......"
잠시 할 말을 잃고 막내 표정을 보았다. 꽤 심각한 표정이다.
"그래... 노는 게 중요하긴 하지..." 

내가 너무 노는 데 집중해서 아이를 키운 걸까? 덕분에 '에너지가 많은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아이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걷다가 결국 내가 KO패를 인정했다. 적어도 잠 자기 전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조르니까, 친구들과 뛰어놀며 밝고 건강하게 크는 게 중요하긴 하니까... 

"그래, 우리 열심히 놀자!"로 그 날의 대화를 마쳤다. 그래도 요즘 막내가 그 때 엄마가 한 말을 기억하는지 2권 정도는 읽으려고 노력(이게 중요하다, 노력이라는 게!)하는 것 같다. 지난 목요일 색깔아이 때문에 도서관에 갔을 때에도 <앗, 따끔!>이라는 책과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의 <서커스>란 책, 두 권을 읽었다.  

<앗, 따끔>도 짧은 그림책이었지만 <서커스>는 맨 앞과 맨 뒤에 한 줄씩 단 두 줄의 글이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열심히 읽었으니까, 그림책에선 그림을 읽는 것도 무지무지 중요하니까, <서커스>란 책을 읽을 때 우리딸 말고도 서너명의 아이들이 모여들만큼 아이들의 관심을 꽤 끌었으니까. 이렇게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으면 좀 위안이 되냐, 싶긴 하지만..   

그 이후로 아직도 개구리 상은 멀고도 멀다. 개구리 상은 포기하고 내가 따로 우리 막내에게 적당한 좀 더 쉬운 규정을 만들어 작은 선물을 주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그래,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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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0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막내가 이쁜데요. 큭큭.
책이야 읽히고 싶고, 저도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해대지만
제 맘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내내 놀다니, 너무 좋아요.
읽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서 책을 쏙 고를 수 있는 위치잖아요. ^^

섬사이 2011-04-04 10:44   좋아요 0 | URL
엄마가 하도 놀자고만 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어요.
셋째 아이라서 그런지 제가 뭘 챙겨서 해주고 그러질 않아서 그런가 봐요.

마노아 2011-04-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개-과정-결말이 모두 아름다운 걸요. 노는 게 더 좋다고 하지 않고 노는 게 중요하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아이가 믿음직스러워요.^^

섬사이 2011-04-04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놀랐어요.
너무 진지하게 "노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해서요.
아직은 그런 나이지 싶기도 하구요.

순오기 2011-04-02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요렇게 야무진 유빈이는 개구리상 안 받아도 훌륭해요.
역시 <도서관이 키운 아이> 답다는 생각에 추천 꾹!!^^

섬사이 2011-04-04 10:46   좋아요 0 | URL
개구리상을 미끼 삼아 던졌던 건데 요 꼬맹이 딸이 덥석 물어주질 않네요.
<도서관이 키운 아이>라기 보다 <놀이터가 키운 아이>에 더 가까워요. ^^

무스탕 2011-04-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는거 정말 중요하지요. 중요한게 뭔지 잘 아는 총명한 막둥이에요 ^^
울 동네엔 '어린이 도서관' 이라고 이름 붙인 도서관이 따로 있는데 (그러니까 도서관 한 켠이 어린이 코너가 아니고 도서관 자체가 어린이 도서관이에요) 가본적이 없어서 뭐가 틀린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엔 도대체 뭐가 있을까요? +_+

섬사이 2011-04-04 10:48   좋아요 0 | URL
제가 가는 도서관엔 엄마들과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많아요.
무엇보다 사서선생님들과 무척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좋구요.
몇 년 전에는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백두산에 다녀온 적도 있어요. 그리고 올해는 '평화'를 주제로 뭔가를 한다는 것 같던데..
한 번 가 보세요. 아무래도 '어린이'에 더 집중된 도서관이라 다른 일반도서관과 또 다를 거예요.

프레이야 2011-04-0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당당한 막내네요^^
섬사이님이 챙겨주시는 선물도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도 어린이도서관이 별채에 따로 있는데
아기자기 아주 예뻐요. 아이 어릴 적엔 그런 곳이 많이는 없었는데..

섬사이 2011-04-04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막내랑 도서관에 다니면서 큰애들 때 생각을 해요.
그 때에도 주변에 이런 어린이도서관이 있었으면 큰애들의 어린시절이 더 풍요로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죠.
동네마다 어린이 도서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세실 2011-04-0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개구리상 아이디어도 좋고,
선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주관 뚜렷한 막내도 귀여워요~~~
"도서관=놀이터"라는 생각도 좋잖아요^*^

섬사이 2011-04-04 10:52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막내더러
"너는 도서관에 자주 가서 책 많이 읽겠구나"하면요,
"그냥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놀다 오는 거예요." 해요.
사람들이 막내가 책을 무지무지 많이 읽는 줄 착각하고 있거든요.

하늘바람 2011-04-0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태은이를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버스를 타고가야하다보니 자주 안가게 되네요 막내가 참 똘똘하고 귀여워요

섬사이 2011-04-04 10:53   좋아요 0 | URL
저도 버스타고 걷고 해서 가요.
버스정류장으로 네다섯 정거장 쯤 되요.
그리고 내려서 또 좀 걸어야 하구요.
그런데 재미있어서 가요.
나들이 삼아서요.^^

꿈꾸는섬 2011-04-0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저흰 큰애가 도서관 가는 걸 무척 좋아했었는데 작은애가 도서관에만 가면 여기저리 돌아다니고 책 읽는 애들 훼방놓아서 그 이후로 도서관 가는 걸 자제했는데 그게 벌써 한참 되었네요.ㅜㅜ 저만 혼자가서 책 빌려와서 집에서 읽히고 있어요. 아이들도 데려가야하는데 말이죠.

섬사이 2011-04-04 14:13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은 빌려와서 자기 전에 집에서 읽어줘요.
아이도 도서관에서 읽는 것보다 그걸 더 좋아하더라구요.

pjy 2011-04-0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막내동생도 집에 책이 너무 많다고 질린다고 안읽고 그랬었는데요~
학교가니 책읽고 막 잘난척하는 친구가 생겼을때 급 도전하게 되던데요~ 막내들이 욕심은 진짜 많잖아요~ 얼마나 영악한데요ㅋㅋㅋ 분명히 노는거보다 중요한게 많이 생길꺼예요^^;

섬사이 2011-04-04 14:14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pjy님.
정말 그럴까요?
노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아질 그 날이 올까요?
오겠죠?
희망을 줘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