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얀 가로등 불빛으로 빗줄기가 그리는 촘촘한 금들이 보였다. 비는 단단히 화가 난듯 사납고, 참 지랄맞게도 내렸다. 그날 이후로 혼자 있을 땐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 날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차 밖으로 빗줄기가 촘촘했다.

난 아버지때문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끈덕진 딸타령이 없었다면 엄마는 날 낳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아들만 둘이었던 우리집에 늦둥이딸로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쁜 딸을 낳으라며 달력에서 예쁜 일본여자 사진을 오려서 엄마가 누워서 볼 수 있게 천정에 붙여놓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달력에 일본여자 사진이 많이 실렸었다고 한다. 딸이 태어나면 책가방도 들리지 않고 곱게 키울 거라고 큰소리를 치셨다는데 난 씩씩하게 책가방 매고 학교에 잘 다녔다.  

어릴 때 우리집은 식당을 했다.  2층 건물에 넓은 홀을 가진 제법 큰 식당이었고 손님도 늘 많았다. 아버지는 가끔 가게에 앉아있곤 하셨는데 난 그 때마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목에 매달려 10원만 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아버지는 늘 뽀뽀를 해야 준다고 하셨고, 난 아버지의 뺨이나 입에 뽀뽀를 하고는 10원을 손에 쥐고 과자를 사먹으러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밥을 드실 때 김치를 입에 넣으시면 얼른 아버지 등에 붙어서 아버지 관자놀이 근처에 귀를 대고 서걱서걱 김치 씹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귀찮으셨을 텐데 어린 딸이 등에 붙어 있게 가만 두셨다. 내가 '김치, 김치.'하고 조르면 아버지는 커다란 김치조각으로 골라서 입에 넣고 더 세게 씹으셨다.  

아버지는 자기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타령을 하셨다는 게 이제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난 그런 딸인 것이다.  말없는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딸.  하지만 나는 정말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그런 딸이었을까?   

그날 밤 전화는 불길하게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잘못 걸려온 전화이기를 바랐다. 언젠가 새벽 3시에 잘못 울렸던 초인종처럼. 전날 회식이 있었던 남편은 만취해서 들어와 자고 있었다.  

누워있는 아버진 마치 산신령이나 도사님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옷을 걸치셨는데도 참 잘 어울렸다. 아버지와 뺨을 맞댔다. 너무 차갑다.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던 중환자실에서  만졌던 아버지의 발보다 더.  중환자실에서 얇은 홑이불 아래로 비죽 나와있던 아버지의 발을 난 무심한듯 주물렀었다. 아버지에게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워서 온기를 나눠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견디실 거라 생각했다. 8년 전 더 큰 심장수술을 받았을 때에도 아버지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까 이까짓 시술따위,  연세가 많아 좀 더딜지는 몰라도 회복하실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때 숨결이 사라진 채 누워있는 아버지의 뺨은 내가 가진 체온이 결코 스며들 수 없는, 견고한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기다리셨어야 했다. 적어도 떠나시는 동안 손이라도 잡고 있을 수 있게 우리에게 시간을 주셔야 했다. 이미 시퍼렇게 변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하게, 미안하다는 말만 토해놓게 하시면 안되는 거였다. 자꾸 싸늘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꽂고 혼미하게 누워 계시던 모습만 떠오르게 하면 안되는 거였다.  

난 아버지가 그토록 갖기를 바랐던 그런 딸이 되어드리지 못한 채로 아버지와 이별했다.  

언제나 주인을 잃은 방의 풍경은 눈물겹다.  아버지가 주무시던 침대, 외출하실 때마다 쓰시던 모자들, 집에 돌아오시면 갈아입던 편한 반바지..  엄마가 주인 잃은 빈 방을 보며 쓸쓸해 하실까봐 서둘러 유품정리를 했다. 가구도 옮기고 박스에다 아버지의 옷가지며 모자, 장갑, 넥타이, 시계 등을 담았다. 삶은 참 모질고 야박하다. 아버지라고 해도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위해 그 자리가 말끔히 치워진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 계단에서 엄마는 넘어지셨다.  그다지 금슬좋은 부부가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슬프고 황망해하셨다. 넘어지면서 다친 왼쪽 발이 부어올랐다. 유품을 정리하고나서 엄마를 모시고 친정 집 앞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찰을 받는데 엄마가 정형외과 의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불쑥 "의사 양반이 참 젊네. 인물도 좋고."하신다. "엄마는 왜 갑자기 의사선생님 인물평을 하고 그래."하면서 웃었더니 의사와 간호사도 웃는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오는데 또 멈칫하시더니 "나 요 앞 아파트에 살아요."하신다. "엄마, 의사 선생님한테 집까지 가르쳐주시고,  엄마 이상하다."했더니 뭐가 이상하냐고 핀잔을 주신다.  

안다. 의사가 너무 젊어보여 연륜이 없는 것 같아 미덥지 않고, 병원 바로 앞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잘 치료해주면 소문도 내주고 일이 있을 때 자주 이용하겠다는 의미라는 거. 하지만 난 엄마 앞에서 너스레를 떤다.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젊은 남자한테 한눈 팔고 집까지 가르쳐주고.. 엄마 안되겠네.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엄마 선수네, 선수."  엄마가 쿡쿡대며 웃는다.  내가 엄마를 웃게 했다. 아버지도 웃고 계실까?

우린 아직 아버지와의 이별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열흘을 좀 넘겼을 뿐이니까. 그래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밖으로 아버지와 뒷모습이 많이 닮은 분을 볼 때, 누군가 날 위로한다며 안아줄 때, TV에서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하신 분들이 나올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간장게장을 볼 때... 그럴 때만 마음이 덜컹한다. 그런데도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한동안은 계속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졸고 먹고 졸고 먹고..만 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여기에 쓰는 건, 이렇게라도 해야 밀린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아버지 없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에게 물어봤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왜 그토록 딸을 갖고 싶으셨는지, 태어난 딸이 마음에 드셨는지, 왜 이른 아침 어린 딸을 데리고 송지다방에 가서 계란과 우유를 먹이셨는지, 어느 날 나를 며느리라고 부르며 귤을 한 봉지 가득 사오셨던 아버지의 친구는 누구였는지, 어릴 적 내가 신던 빨간 피겨스케이트는 누가 골라줬던 건지, 왜 나는 한 번도 낚시에 데려가지 않으셨는지,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뽀뽀하기를 거부하는 딸이 밉지는 않았는지,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기분은 어떠셨는지,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지내셨는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딸이 제일 예뻐보였을 때가 언제였는지, 한국전쟁 때 무섭지는 않았는지, 사는 게 제일 힘들 때가 언제였는지, 힘들 때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딸 낳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신 적은 있는지, 나 때문에 제일 속상하고 서운하셨던 적은 언제였는지... 

창고에서 오래된 앨범을 꺼내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별로 없었다.  사진 속 풍경을 보니 외할머니댁 마당이다.  지금은 시청이 들어서고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곳이지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는 유일하게 찾아갈 수 있는 시골이었다.   같은 날 찍은 사진들이 몇 장 더 있다. 엄마와도 따로 찍은 사진이 있고, 이모와 찍은 사진도 있고, 이모, 외삼촌, 엄마, 아버지와  다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나랑 엄마가 한복을 입고있고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계신 걸 보니 무슨 날이었던 모양이다. 외할머니 생신이었을까? 모르겠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내 막내딸보다도  어릴 때였던 것 같다. 사진 속 아버지는 젊다. 아마 지금의 나보다도 젊으셨을 때인 것 같다. 이런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늘 이별을 예정하며 흘렀고,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났다. 손 한 번 잡아드릴 겨를도 없이, 인사 한 마디 나눌 시간도 없이.  가끔씩 사진만 속절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별을 하고서야 소중했던 걸 안다.  오늘 밤에도 비가 내리는데, 아버지는 편안하실까.  내 앞에는 몇 개의 이별이 더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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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쩜 좋아요...
글을 읽는 저도 눈물이 떨어지는데, 섬사이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마음 많이 상하셨을텐데 건강마저 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꿈꾸는섬 2011-07-28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아버님과의 이별 이야기에 저도 눈물이 나네요.
이별을 하고서야 소중했던 걸 안다는 말씀 공감해요. 아직 살아계실때 좀 더 살뜰하게 대해 드려야겠단 생각을 하게 도네요.

아버님이 편안한 곳에서 안식하고 계실거라 믿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nine 2011-07-28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면서도 우리는 늘 부모님이 옆에 계셔주실 것 처럼 대하게 되지요.
섬사이님에 대한 아버님의 그 보살핌과 애정이 지금도 계속 섬사이님을 지켜봐주시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슬퍼하는 대신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별을 하고서야 소중했던 걸 아는 건 우리 인간을 어리석게도 하고 철 들게도 하고 겸손하게도 하고...그런 것 같아요.

다락방 2011-07-28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그간 안보이셔서 무슨일이 있는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별을 앓고 계셨군요. 비가 쏟아지는 아침에 이 글을 읽노라니 지금 한창 일하고 계신 저의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어떤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라, 다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1-07-28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7-2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딸을 마지막에 눈에 담지도 못하고 가셔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섬사이님의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어요.
저도 앨범을 찾아보면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은 겨우 두 어장, 아빠 독사진 한 장 정도 뿐이어서 볼 때마다 참 가슴이 아파요.
엄마와는 더 자주 사진도 찍고 좋은 시간 보내야지 다짐하지만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어머니도, 섬사이님도 모두 몸 상하지 않고 이 시간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랄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스탕 2011-07-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난히 아버님들과의 이별 소식이 많이 들리네요.
우리의 아버지들은 왜 그렇게 자식들과 살갑게 지내지 못하셨는지 참 섭섭해요. 언제 손 놓을지 모르는게 사람살이인데 있는동안 더 끌어안고 더 사랑을 표현하고 그랬다면 좋았을텐데요.
저희 아버지도 섬사이님 아버님처럼 무뚝뚝하셔서 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프레이야 2011-07-2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버진 살아계시지만 저도 생각해보니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네요.
어른이 되어선 더 없구요.
소중한 걸 모르고 저도 참 무심하다 싶어요.
우리는 부모와 그외 가신 분들을 경험하며 늙음과 고통과 죽음, 이별을 경험하고 내면화한다고 들었어요.
섬사이님 마음에 아버님과 함께 평강이 깃들길 바랍니다.

순오기 2011-07-2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친정아버님이 떠나셨군요.ㅜㅜ
작별을 준비해도 헤어짐은 많이 힘들어요~ 앞으로도 많이 많이 힘들고 그립고 눈물날 거에요.
그래도 함께 했던 추억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사랑을 자꾸자꾸 되새김하며 꿋꿋하게 잘 견뎌낼거에요.
떠나신 아버님도 늘 기켜보실 거라 생각해요~~~ 힘내셔요!!

섬사이 2011-08-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해주고 위로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한평생 그러셨던 것처럼 떠나실 때도 무심하게 가버리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다정한 부녀사이가 아니었던 걸 억울해하면서 지냈어요.
이별 뒤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서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덕분에 이제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유아/어린이/청소년>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길고 길게, 지루하고 지루하게, 빗 속에 잠겨 있는 기분.  잠깐 나온 햇빛이 아까워 이불이며 요커버, 베개커버들을 빨아 널고 나도 팔뚝이며 얼굴이며 발, 겨드랑이, 배, 등, 무릎 등등에 곰팡이가 피었을 거야, 하며 베란다에 나가 햇빛바라기를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또 비다. 꿉꿉한 기분을 달래줄 책이나 골라보자. 요즘은 책 말고 다른 거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난 내가 다시 책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1.  

 

 

 

 

 

  미야니시 타츠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 녀석 맛있겠다>를 포함 네 권의 시리즈로 나온 책들 중 <고 녀석 맛있겠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이다.  미야니시 타츠야는 일곱살 딸아이의 완소 작가라서 저 세 권의 책들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내 주변에 있는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들 중에는 미야니시 타츠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승냥이 구의 부끄러운 비밀>같은 책은 뭐랄까, 좀 촌스러운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는 작가라서 관심을 끌 수가 없다.  세 권을 주르륵 늘어놓은 이유는, 세 권이 시리즈로 나왔으니까 하나로 쳐야 해!, 하는 막무가내 심보이기도 하고, 이 중에 하나라도 걸려라!,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의 간절함 때문이기도 하고.  

 

2.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그림책 두 권이다.  이것도 막무가내와 요행을 바라는 간절함, 이 두 가지를 버무려 한꺼번에 올려버린다.  린드그렌의 작품 속에는 에밀이나 미오, 라스무스와 같은 귀여운 남자 아이들도 있지만 삐삐, 로냐, 리사벳, 마디타 같이 씩씩하고 활달하고 명랑하고 밝은 여자 아이들도 많다.  그 중에서 마디타와 로타, 리사벳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그림책이니 두 권 중 한 권만 선택하라는 건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이다.  
그러고 보니 미야니시 타츠야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니!!!!!   비가 더 내린다고 해도 이 그림책들과 함께라면 견딜만 하겠군!!!     

 

3.  

 서정오 선생님의 옛이야기 책이다.  서정오 선생님의 옛이야기 책들은 많이 나와 있지만 여전히 욕심이 난다. 토토북에서 출간한 저 책은 그림이 지판화란다. 어쩐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표지에 떡하니 앉아 있는 도깨비에게서는 일본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서정오 선생님의 책들과 겹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이야기 다른 느낌'을 확인하는 거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서정오 선생님의 책들은 소장가치가 느껴지기도 하니까.   

 

 

 

4.  

 웅진 주니어 문학상 수상작이다. 신인작가 부문 대상 수상작이라는데 "정형화된 마녀 캐릭터를 요즘 아이들의 감각과 눈높이에 맞게 새롭게 재창조하여 아이들에게 유쾌한 상상력과 재미를 주는 작품" 이라는 책소개 글에 눈이 반짝, 귀가 솔깃해진다.  우리 어린이 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에서 늘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던 아쉬운 부분들이 극복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를 확인할 수 있을까? 배경이 프랑스라는 점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다. 뭐랄까, 우리 나라의 영역 안에서는 상상력의 한계를 느꼈다는 표현인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소리높여 글로벌한 세계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하는 세상에 살면서 프랑스면 어떻고, 안드로메다라면 어떠랴. 그저 그만큼 우리 작가들의 역량과 상상력과 글빨과 작품성이 범세계적으로 범우주적으로 인정받고 뻗어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 책부터 확인해 보자구!! 

  

 

5.  

 청소년들의 어두운 이야기. 가난, 성폭행, 불화, 학교폭력  기타등등 기타등등.. 을 어둡게 (이게 중요하다. 어두운 이야기를 어둡게 담았다는 거) 담은 이야기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 한숨이 나오고 너무 우울해져서 기운이 쭉 빠지니까.
하지만 작가가 황선미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갔을지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고 한숨이 나오고 기운이 쭉 빠져버린다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유혹은 강렬해서 이 책을 결국 이 페이퍼 안에 담는다. 적어도 뻔하지는 않겠지.
후텁지근한 7월을 더 후텁지근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지만 때때로 모험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기도 하니까 이 책을 받게 된다면 확 끌어안아버릴 테닷!! 용감하게!!  

 

 

 

요즘 나는 바느질을 한다. 그것도 손바느질. (발바느질도 있나? 당연히 손바느질이지!) 딸아이 가방을 하나 만들었고, 코알라로 변신 가능한 토끼 인형을 만들었고, 소파에 깔아둘 매트를 만들었고, 식탁 러너를 만들었고, 큰딸아이 방 창문에 드리울 발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일곱살 딸아이와 아들녀석의 여름이불을 만들 예정이고 소파를 커버링하고 싶어서 자주 소파를 노려보곤 한다.  그래서 책을 거의 못 읽고 있다.  반성.  바느질과 책읽기와 생활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요즘의 내 숙제다. 내가 바느질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게 다 도서관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책에 빠지지 않고 생각도 못했던 바느질에 빠지다니~~~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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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7-0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장마에 마음은 안 눅눅하고 뽀송하게요.^^ 제 바람입니당.
황선미를 편애하고 무조건 믿는 편이라 최근작 저 책도 기대가 되어요.
린드그렌의 그림책 두 권은 갖고 있는데 너무 좋아서 자꾸자꾸 보게 돼요.
기분좋은 그림책이에요. 그림도 내용도, 역시 린드그렌이구나 그랬어요.

섬사이 2011-07-09 17:30   좋아요 0 | URL
여기는 지금 햇볕이 쨍! 해요.
남부지방은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는데 말이예요.
린드그렌의 그림책 두 권을 벌써 갖고 계시군요.
안목이 남다르신 프레이야님이 좋다 하시니까 더더더 읽고 싶어져요.
비, 조심하세요~ ^^

마녀고양이 2011-07-0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느질에 빠져계시네요. 저는 언제 바느질을 했는지, 요즘 가물합니다.
바빠서 한번 넣어버리니, 다시 꺼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고 녀석 맛있겠다>는 애니메이션 개봉했던걸요? 오늘 아침 뉴스에서 소개를 보다가 한참 웃었습니다.
그런데 트랜스포머에 밀려서, 하루 두번만 하더라구요. ㅠㅠ. 요즘 정말 트랜스포머가 미워집니다.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요... ㅠㅠ

서정오 선생님 책을 저도 발견하고, 한참 입맛 다시는 중입니다. 옛이야기들, 너무 사랑스러워요~

섬사이 2011-07-09 17:33   좋아요 0 | URL
바느질, 재미있기는 한데 은근 체력소모가 큰 것 같아요. ^^;;
애니메이션으로는 <고 녀석 맛나겠다>라는 제목이 붙었더라구요.
저는 그림책으로만 사랑하려고요.

네꼬 2011-07-0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히 널 사랑할 거란다>는 제목과 표지가 언밸런스(!)해서 하하 웃겨 했는데, 책 소개 보니까 어째 찡할 것 같아요. 저도 미야니시 타츠야 완전 좋아하니까 한번 봐야겠어요. 저 이 페이퍼 좋아요, 섬사이님. :)

섬사이 2011-07-09 17:34   좋아요 0 | URL
네꼬님~ 네꼬님~ 네꼬님~
이 페이퍼가 네꼬님 마음에 들었다니 어깨가 으쓱해져요. ^^

2011-07-07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7-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평가단 하면 따끈한 신간을 받아보는 건 좋은데~~~~ 리뷰가 부담스러워 6기 이후 접었어요.ㅜㅜ
눅눅한 7월을 잘 넘기려면 미야니시 타츠야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 절대 동감,
물론 서정오 선생님이나 황선미 작가도 실망시키지 않을거라 공감하고요. 추천 꾸욱~~~~

그런데 도서관에서 책읽기가 아니라 바느질에 빠지게 했다고욧?^^

섬사이 2011-07-09 17:38   좋아요 0 | URL
저는 4기던가? 에 한 번 해보고는 접었었지요.
그 때랑 방법이 달라져서 한 달에 두 권만 쓰면 되더라구요.
그래서 재도전해보았죠.
신간평가단은 사실 꼭 필요한 건 아닌데, 제가 자꾸 리뷰쓰기에 느슨해지고 게으름을 부리려고 할 때
도움이 되더라구요. 억지로라도 쓰게 되니까요.

네, 도서관 때문에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덕분에 책과는 멀어졌구요. ㅠ.ㅠ

세실 2011-07-08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두운 이야기를 어둡게 담은 책 싫어해요. 요즘 읽고 있는 <두근 두근 내인생>은 어두운 이야기를 밝게 그려서 참 좋아요.

호호호 도서관에서 손바느질 책을 읽고 빠지셨을까요? 아님 손바느질 강좌를 듣고 빠지셨을까요? ㅋㅋ
작품 사진 보여주세용^*^ 그런데 손바느질이랑 퀼트랑은 다른 건가요?

섬사이 2011-07-09 17:40   좋아요 0 | URL
손바느질과 퀼트... 글쎄요.. 저도 잘...
근데, 손바느질은 손으로 바느질해서 만드는 것들을 총칭하는 거고,
퀼트는 조각천들을 가지고 홈질로 조각이불이라든가 가방같은 거 만드는 거 아닐까.. 하는 ...
손바느질 강좌를 들은 거, 맞습니다.
정확하게 예측하셨어요. ^^

2011-07-14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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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그 다음 날로 다 읽었는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막막했던 책이다.  결국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작정하고 앉았는데도 여전히 막막하다.  어려운 책이냐고?  아니다. 살림하고 아이 쫓아 다니고 이것 저것 볼 일을 봐가면서도 책을 펼치고 얼마 걸리지 않아 다 읽을 정도로 이야기를 따라가기도 수월하고 재미도 있다.  그런데 왜?  곰곰 생각해보니 특별히 너무 친절한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  

이 책에는 건널목 씨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빨강, 초록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공사장에서 쓰는 노란 안전모에 펼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카펫을 둘둘 말아 가지고 다니면서 무단횡단이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위험한 도로에 즉석 횡단보도를 만들어서 아이들의 등하교길을 안전하게 돕는 인물이다. 건널목 씨는 아리랑 아파트 후문 앞 도로에서 위험하게 길을 거너는 쌍둥이 형제와 만나고 나서는 매일 그 곳에 카펫 횡단보도를 펼치고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리랑 아파트 사람들과 인연을 맺기 사작한다. 어느 날 우연히 쌍둥이 형제가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도와주고 나서는 105동 주민들의 배려로 빈 경비실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면서 엄마아빠의 불화를 견디지 못할 때마다 집을 나와 외롭게 앉아 있는 도희, 집을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태석이와 태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 특히 물질적인 부와 풍요가 삶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칫 돌아보기 어려운 가치들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했듯이 너무 친절이 과했다고나 할까.  책 속에는 등단한지 7년이 되도록 이렇다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지내는 작가 오명랑이 등장하는데 건널목 씨에 대한 이야기는 오명랑 작가가 가족들의 눈치를 못이기고 '이야기 듣기 교실'을 열어 그 교실을 찾아온 세 아이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오명랑 작가는 건널목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하면서 이런 결심을 한다.  

 독자들에게 가슴을 열지 않은 작가라니.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새로 만날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마음으로 대한다면......  안된다. 진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려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닫아 놓고 입으로만 하는 이야기, 그러면 안 된다. (14쪽)

이 때만 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펼쳐질 진심어린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쌍둥이 형제를 돕다가 건널목 씨가 불량배들에게 몰매를 맞는 부분에서 작가 오명랑은 흥분해서 이야기 한다.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어른이잖아!"
-중략-
"내 말은, 어른은 때리면 안 되고 아이들은 때려도 된다는 게 아니야. 누구든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는 거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때려?" 
-중략-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폭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다는 거야."  (50쪽)

이 부분부터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옳은 말이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거듭 설명을 해줘서야 내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 않나.  나는 마치 작가의 웅변을 듣는 기분이었는데, 아이들은 감명을 받으려나?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 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했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널목 씨 한 사람 더 와서 사는 건데 아리랑아파트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이웃끼리 인사도 더 자연스럽게 했고 더 상냥해졌지.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 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나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77쪽) 

건널목 씨에 대한 인물평까지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부분이다.  이야기가 현재 시제의 작가 오명랑의 이야기 듣기 교실과 과거의 건널목 씨 이야기가 번갈아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저런 친절한 설명과 정리가 오히려 이야기에 집중하는 걸 방해받는 느낌이었다.  

뒷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독자의 느낌까지도 찾아낼 수 있었다.  

때로는 힘들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을 테지요. 어른들도 부족한 게 많아 번쩍 안고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덜 힘들게 덜 아프게 덜 무섭게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누군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175쪽) 

책을 읽은 내가 치밀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이 책을 읽어냈다면 작가가 보태어준 친절을 넘어서 더 많은 느낌과 생각을 발견하고 따라갈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유감스럽게도 난 그러질 못했고 작가의 친절을 핑계삼아 '난 그냥 작가의 친절에 기대서 아무 생각없이 읽었어요.'라고 고백하고 있는 흉한 꼴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책이 별로라고 오해는 마시길.  책은 재미있고 앞에 얘기했던 것처럼 아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때론 가슴 찡하게 다가오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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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15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리한 리뷰였습니다.

섬사이 2011-06-30 07: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라는 댓글을 분명히 달았었던 것 같은데,
왜 사라졌을까요..ㅠ.ㅠ
아무튼, 다시 한 번 더 고맙습니다. 꾸벅

마녀고양이 2011-06-15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수긍이 무척 가는 리뷰예요.
설명을 한다는 것, 정리를 해줘버리는 것은
선입견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 따로 판단할 여지를 빼앗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무 친절한지 모르겠다는 생각두요.. 오눌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을 읽고 나니 더욱 그래요.

섬사이 2011-06-27 15:28   좋아요 0 | URL
틀림없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가끔 아이들에게서 나보다 강한 면을 발견할 때도 있어요.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이라니.. 어쩐지 시큼한 맛이 혀끝에 맴돌아요. ^^

순오기 2011-06-1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날새면 이 책이 우리집에 도착할 거 같은데...
작가가 자기 목소리를 지나치게 들려주면 역효과가 있지요~ ^&^

섬사이 2011-06-27 15:29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해요.
제가 서재에 발길이 뜸한 사이에 벌써 읽으시고 리뷰를 올리신 건 아닐지..
빨리 확인을 해보고 싶은데, 지금도 잠시 들어온 거라.. ㅠ.ㅠ

2011-06-29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30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기가 된 아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아기가 된 아빠 살림어린이 그림책 20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노경실 옮김 / 살림어린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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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미국 영화배우 존 트라볼타를 닮은 존의아빠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동안의 외모를 가진 인물.  '내가 나이보다 좀 젊어보이는 편이구나'하고 그냥 겸손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이 아빠는 동안의 외모를 적극적 능동적으로 즐기는 인물이다.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즐겨입고, 머리 모양도 자주 바꾸고,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고, 커다란 방에 자기 장난감을 가득 채워놓을 정도인데다가 더 젊게 보이고 싶어서 자전거 운동을 하고, 거울 앞에서 멋 부려대며 애를 쓴다.  

 

 

 

 

 

 

 

 

 

그 쯤이라면 나름의 개성이라고도 취향이라고도 봐 줄 수 있고, 험한 세상에서 삶을 즐기는 한 방법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자기 부인에게 "여보, 당신도 조금 더 젊게 꾸며보는 게 어때?"하며 잘난 척을 한다거나 조금이라도 아프면 이불 뒤집어 쓰고 엄살을 떠는 건 심하게 짜증이 날 것도 같다. 젊어보이는 외모를 젊게 유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빠는 어느 날 저녁 '젊음을 돌려드립니다'라고 쓰인 음료수 한 병을 다 마셔버리고는 다음 날 아침 아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젊어지고 싶어 하더니, 진짜로 소원을 이루었네." 존의 엄마는 아기가 된 아빠를 바라보며 쓸쓸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어쩐지 이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버버버'거리는 옹알이를 하고 음식을 흘리는 남편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유모차에 태우고 나가 바람을 쐬어주는 기분은 어떨까.  이 참에 머리에 알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너무나 젊어지고 싶어하던 아빠가 아주 아기가 되어버려서는 존이 기저귀를 가져다 줘야 하고, 놀아줘야 하는 아빠,  변기에 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아빠가 존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좀 얄밉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아빠는 몇 시간 단잠을 자고나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니 완벽하게 돌아오진 못하고 머리카락 한 가닥이 하얗게 변한 채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잘 읽으려면 글 뿐 아니라 그림도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글의 내용은 아기가 되어버린 철없는 아빠를 존이 바라본 이야기지만 그림은 따로 살펴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첫 부분 오른 쪽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만만 좀 시건방지다 싶은 썩소를 짓고 있는 아빠의 표정은 10대 청소년, 그 중에서도 좀 튀어보이고 싶어 기를 쓰는 아이같은 옷차림이나 유별난 헤어스타일과 연관지어 보지 않아도 좀 비호감인데다가 '어른다움'(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연륜이랄까 후덕함이랄까 하는 것들이 어른다운 거라면) 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 존의 아빠 속에 내재된 유아적 성향은 아기로 변하기 전인 아빠를 묘사한 그림 속에서도 암시된다.   

거꾸로 가는 시계, 벽에 걸려 있는 가수의 그림에서 기타의 끝 부분이 젖병꼭지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아빠의 장난감이 진열되어있는 방에서도 암시의 그림은 계속 발견된다. TV 속의 피터 팬, 트로피 속의 젖병, 파이프 담배에 꽂혀있는 젖병꼭지, 당구대 위에 있는 공 중에 하나는 장난감 공인 것 같고, 하다못해 술병입구, 붕어 입, 현관문 손잡이, 침대기둥에서도 졎병꼭지를 찾아볼 수 있다.  아빠가 싸이클을 타고 있는 장면 바닥에는 딸랑이로 보이는 장난감이 놓여있으니 아기가 변해버리기 전부터 아빠는 속으로는 이미 유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기가 된 다음엔 이불 무늬까지 바뀌어버리지만.

아이들에게 아빠가 '다 큰 아기'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요즘은 친구같은 아빠들도 많아졌다지만 여전히 아빠는 엄마보다는 어렵고 까다롭고 위압적인 존재일 텐데, 그런 아빠를 아들보다도 철없고 아기 같은 모습으로 그려놓은 이 책을 읽으면 아이들은 어떤 느낌을 가질까. 눈치챌까? 어른들도 때론 어리광부리고 마음껏 울고 엄살을 떨어도 괜찮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  난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 안에 남아있을 유아기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존의 아빠처럼 아무리 용을 써도 어쩔 수 없는 법.  흰머리는 점점 더 많아지고, 피부는 푸석하고 칙칙해져가고, 갈수록 어른 노릇이 점점 버거워져간다.  존의 아빠도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에 점점 더 저항하기가 힘겨워질 테니, 어쩐지 하얀 머리카락 한 가닥에 난감해하는 모습이 측은하다. 다시 어른으로 돌아온 아빠가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액자 속 그림..  아기로 변한 아빠가 하얗게 널부러져 누워있는 여자의 배 위에 올라 앉아 있고, 침대 옆 탁자에는 젖병이 놓여 있다. 뒤의 커튼 사이로 상상의 동물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고.  아기 같은 아빠에게 지쳐버린 엄마의 모습인 것 같아 그것도마음이 짠하다. 이 그림책 속에는 액자 속 그림이 여러 개 등장하는데, 무척 궁금증을 자아낸다. 앞에서 말했던 그림 속 록음악 가수는 누구일지, 곳곳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그 출처가 어디일지, 분명 어딘가에서 원작을 찾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즘 이것저것 손댄 일들이 많은 탓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은 간혹 글의 내용보다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꼼꼼히 살피고 읽어야 하는 그림에서 더 재미를 느낄 때가 많다.  이 책도 그런 즐거움을 안겨 준 책인데, 앤서니 브라운의 다른 그림책들과 비교해보면 글쎄 그렇게 잘 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들 <동물원>, <헨젤과 그레텔>, <돼지책>, <고릴라> 등에 등장하는 아빠들과 비교해보면 새롭고 참신한 아빠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 같아서(여전히 대책없이 한심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어보이지만 조금 더 발랄하고 가볍다는 점에서) 그 점은 마음에 든다.  아이들이 보기엔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모습의 아빠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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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6-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아빠가 좀 오버했네요. 아빠가 애기라니 아 싫다 싫어.... ㅎㅎ
하긴 가끔은 옆지기를 애 하나 더 키운다는 심정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섬사이 2011-06-15 15: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옆지기가 큰아들 같을 때가 종종 자주 왕왕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고집이 센 아들이죠. ^^;;

아영엄마 2011-06-15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리뷰 잘 봤어요. 글을 참 잘 쓰셔서 님 리뷰 읽을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되네요.
참, 리뷰에 그림 속의 기타리스트를 궁금해 하시길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 중에 "지미 헨드릭스"라는, 젊은 시절에 요절한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있거든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검색해 보니 [ Woodstock ]이라는 앨범 제킷 사진의 모습이랑 좀 비슷한 것 같아요. 공연 때 화려한 의상도 즐겨 입었다고 하네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70786

섬사이 2011-06-27 15:3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영엄마님.
지미 헨드릭스라,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예요.
알려주신 주소대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
 
출동 119! 우리가 간다 - 소방관 일과 사람 3
김종민 글.그림 / 사계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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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건물 중에 하나가 아닐까.  강렬한 빨강의 커다란 차들이 번쩍번쩍 빛을 반사하며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 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진행중일 것만 같다.  게다가 TV에 종종 보이는 소방관이나 구급대원들의 모습을 보라.  영화 속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각박하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영웅다울 뿐아니라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니 소방서야말로 마치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공간 같다. 마치 슈퍼맨이나 베트맨의 비밀기지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소방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결계가 쳐진 장소같다.  

책을 일일이 다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소방관에 대해 이만큼 자세하게 소개한 책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소방서에서 구조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소방서 최고 미남'이라는 김영민 아저씨가 소개하는 소방서 이야기는 일곱 살 딸아이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만큼 참 잘 엮어졌다.  시시콜콜하다고 생각될 만큼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들의 모습들(출퇴근, 회의, 상황실의 모습, 휴식시간 등)과 소방차들의 종류, 출동할 때의 모습, 소방도구들과 장비들, 그리고 당연히 소방관들이 하는 일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글의 흐름이 어지럽다거나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다.   

예를 들어 소방관들의 아침회의 모습을 보면, 24시간씩 교대근무하는 소방관들이 아침에 다함께 모여 회의를 한다.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 소방관은 방화복을 입고 참석하고, 퇴근할 소방관들은 활동복 차림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여 있다. 그리고 소방서 내부의 전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 때 소방차들의 종류(지휘차, 탱크차, 굴절사다리차, 고가사다리차, 펌프차 등)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와 있고, 소방차들 뒷편에 있는 장비들 (방화복, 수관, 미끄럼봉, 공기호흡기)까지도 챙겨 설명하고 있다. 아이에게 본문의 글을 읽어준 다음 다시 작게 설명된 글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주는데, 그 다음 장에 소방장비를 살피는 장면이 나와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식이다.

  

 

앞에서 말했더 것처럼 신비에 싸인 비밀스러운 곳처럼 여겨지는 소방서에서 소방관들이 잠시 휴식하는 시간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소방관들이 슈퍼맨스러운 모습을 벗어버린 인간다운 면모를 발견하고 친근함을 느꼈고, 딸아이도 긴장을 풀고 소리내어 웃어댔다.  소방관들은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도 멀리 갈 수가 없다.  언제 출동하게 될 지 모르니 소방서 내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고, 휴식시간에도 동료들과 운동을 하거나 체력단련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소방관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족구를 하는 모습이다.  그 뒷편 건물 창문을 통해 컴퓨터를 하는 소방관,  헬스를 하는 소방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소방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방관들이 보인다.  물론, 우리 막내를 웃게한 소방관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소방관이다.  '따르르르르릉~~'하고 출동벨이 울리자 족구를 하던 소방관들을 물론이고 모두 서둘러 출동하는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소방관도 후다닥 달려나가는 모습이 보였던 것.  없어서는 안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존경스러운 소방관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영웅시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들의 자기 일에 충실한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웃음이 나면서도 뭉클한 장면이기도 했다.  영웅이라서 소방관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소방관들도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용감하게 일하고, 안전하게 돌아올게!"라고 주문을 걸듯이 스스로 다짐하는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남자 아이들이라면 소방관들이 쓰는 소방도구와 구조에 쓰이는 도구들에도 큰 관심을 보일 것 같다.  막내는 여자아이인데도 불구하고 각각의 도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권윤덕 선생님의 <일과 도구>라는 책이 생각났는데 그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구에 대한 설명이 책 뒷편에 사전적인 설명으로 작게 적혀있어서 아이에게 설명해주기가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계획과 의도가 서로 다른 책이라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도구에 대한 설명만 보자면 이 책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게 되어 있다는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일과 사람'시리즈의 세번째 책인데, 책 사이에 끼어온 이 시리즈에 대한 설명지를 살펴보니 중국집요리사부터 우편집배원, 어부, 채소장수 등 그럴듯하게 폼나는 직업들 보다는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될 것 같다.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마음이 따끈해지는 시리즈인 것 같아서 계속 관심을 두게 될 것 같다.  이런 책들을 아이들이 읽으며 자란다면 묵묵히 일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크지 않을까.   

막내는 버스를 타고 도서관 가는 길에 늘 만나던 소방서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이 책으로 많이 해결했다.  다음에 소방서를 지나갈 때면 예전과는 다르게 좀 아는 척을 하지 않을까?  "엄마, 저기 펌프차 있다~~", 뭐 이러면서 말이다.  어쨌든 소방서와 심리적 거리감이 많이 좁혀진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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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6-1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들 어렸을때, 소방서 구경 참 자주 가고 장난감 소방차 참 많이 사줬었는데요.
기간을 좀 더 길게 잡으면...폼 나는 직업의 기준이 바뀌어 있지는 않을까요?

섬사이 2011-06-14 17:55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폼 나는 직업의 기준이 바뀐다면 참 많은 것들이 바뀌겠지요?

2011-06-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가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블로그로 데려가려고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섬사이 2011-06-14 17:54   좋아요 0 | URL
예,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떤 블로그로 제 리뷰를 데려가시려는 건지.. ???

꿈꾸는섬 2011-06-1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잘 지내시죠?
덕분에 흙살림 알게 되어 요새 흙살림에서 유기농 농산물 받아서 맛있게 먹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참 유익한 책이겠어요. 정보 고마워요.^^

섬사이 2011-06-14 17:53   좋아요 0 | URL
아하~ 꾸러미 회원이 되셨군요.
전 가지를 잘 안 해먹는데, 저번 주에 가지가 와서 애호박이랑 새송이버섯이랑 같이 볶아서 먹었어요.
꾸러미 덕분에 골고루 반찬을 해먹고 있다고나 할까요. ^^

2011-06-14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5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6-1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좋아요, 사계절 마인드가 감지되는 시리즈라고 생각하지요.^^
3권은 아직 안 샀어요~~ 소방관은 사내 아이들의 로망!!

섬사이 2011-06-27 15:30   좋아요 0 | URL
사계절 마인드, 확실히 그게 느껴져요.
저는 1, 2권이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