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아이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10
김동성 그림, 임길택 글 / 길벗어린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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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리는 비에게 너도 하루쯤 쉬어야 되지 않겠냐고, 해가 너무 게을러져서 큰일이라고, 서로 돌아가며 공평하게 일하라고 잔소리 좀 했습니다.  잔소리는 했어도 가만히 내다보고 있으면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은 참 고요합니다.  온 세상이 비로 흠뻑 젖고, 고운 빛깔의 우산들 속에서 사람들은 좀 더 다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몸서리치게 짙푸르던 초록빛, 쨍쨍하게 따갑던 햇빛이 그 열기를 식히고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꼭 김동성 님의 그림 같습니다. 김동성 님이 그려내는 초록과 황토빛이 감도는 갈색은 아득하고 신비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남몰래 숨겨두었던 현 하나가 ‘둥’하고 낮게 울리는 듯하고 그 찌르르한 진동에 설레게 됩니다.

<들꽃 아이>의 그림은 <엄마마중>을 닮았습니다. <엄마마중>의 마지막 그림, 초록빛 하늘에서 함박눈이 한가득 쏟아지던 장면이, 이 책의 여름풍경과 비슷하게 겹쳐옵니다. <엄마마중>에서 눈이 날리던 초록빛 하늘에 <들꽃 아이>에선 총총한 여름 별빛이 은은하게 박혀있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깊은 산골에 사는 보선이네를 찾아가는 울창한 숲길은 숨이 턱 막힐 만큼 초록이 곱습니다.  당장에라도 시원한 매미 소리, 재잘대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김동성 님의 그림에서 초록은 나무와 풀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학교 창틀에, 교무실과 교실 문에, 칠판과 게시판에, 보선이의 티셔츠에, 그리고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도 이끼처럼 피어있습니다.  그 초록이 황토빛 갈색과 어우러져 시간을 거꾸로 되돌립니다.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길어 올립니다. 

그림책 속의 사람들은 김동성 님의 황토빛 갈색이나 초록과 비슷합니다.  은은하고 수줍은 표정들입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식물도감에서 꽃 이름을 찾으며 즐겁게 웃는 그림에서조차 요란스럽고 소란스러운 기운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책은 제목과 표지에서 드러나듯 고요히 ‘여자 아이’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식물도감을 보며 선생님과 웃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남자 아이는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남자 아이의 세계는 이 그림책에서 주변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곱고 여리고 잔잔한 사람들의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표정에서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느끼게 됩니다.

글에서는 책 속 선생님의 순수한 열정이 보입니다.  다른 선생님들께 보선이가 꺾어온 꽃 이름을 물었다가 면박을 당하자 “왠지 온몸을 바늘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책방을 뒤져 식물도감을 사다가 꽃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식물도감을 펴놓고 꽃 이름을 찾아보기도 하고, 급기야 어느 선생님도 찾은 적이 없었던 보선이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요.  그런 선생님께 보선이는 진달래꽃을 시작으로 산과 들에 피어나는 온갖 꽃들을 선물합니다. 가난하고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하고, 장심부름을 하느라 수업시간에 늦기도 하는 보선이지만 생활기록부에 쓰인 대로 ‘공부는 뒤떨어지나 정직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하는 성실한 아이이고 꽃처럼 고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순수하고 고운 마음을 가진 선생님과 제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특별하고 유난한 사건이 없는데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손전등을 챙겨서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 손전등에 들어갈 전지를 사느라 수업에 늦는 아이, 눈이 내리면 결석해야 하는 아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서 사람보다 나무와 풀과 꽃들을 더 많이 만나는 아이를 통해서 선생님이 오히려 세상살이를 더 배웠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내 앞에 놓이게 된 것일 테고요.

이미 1997년 마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임길택 선생님께서 ‘들꽃 아이’에 대해 남기신 글을 읽다가 더 가슴이 아파집니다.
“‘들꽃 아이’에 나오는 보선이도 실제 아이다.  이름 또한 그대로 썼다..... 지금 아이들이 보선이가 걸었던 길을 잃어버렸다는 게 안타까워 이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길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잃어버린 거나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길택 산문집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러게요, 지금 아이들은 꽃도 나무도 풀도 볼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네요.  학원버스에 짐짝처럼 실려서 피곤하고 지친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길을 가라고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그림에서는 뿌연 유리창 너머 초록빛 하늘에서 눈이 내립니다.  마치 <엄마마중>에서처럼요. 그렇게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학교를 떠나야 하는 선생님이 반듯하게 정돈된 빈 교실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는 뒷모습입니다.  그저 곁에 서서 잃어버린 그 길을 생각하며 한숨 돌리고 싶을 뿐입니다.  애잔하고 쓸쓸한 뒷모습이지만 곁에 서면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아마 쉰을 넘긴 나이를 살고 있을 보선이는 어릴 때 선생님께 드렸던 꽃 선물에 대한 보답을 이 책으로 받았겠지요.  이 책을 보고는 눈물을 쏟지 않았을까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저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나 봅니다.  참 아름다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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