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좋은 엄마와 딸은 아니었다. 엄마에게서 따뜻한 격려나 토닥거림 같은 걸, 받아본 기억이 없다. 사춘기로 들어설 즈음부터는 엄마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잘못 말을 붙였다가는, 아니 제대로 말을 붙인 경우라도, 피곤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소띠다. 그래서였는지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셨다. 시집올 당시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고, 가족들은 엄마의 덕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엄마는 당신이 그런만큼 주변 사람들의 여유로움이나 나태함을 못견뎌 하셨고, 또 그런만큼 주변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컸다. 엄마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뜰히도 부려먹는다'고 생각하셨고, 엄마의 그런 생각은 얼마쯤은 사실이고 또 얼마쯤은 엄마의 타고난 성격 탓이고, 또 얼마쯤은 엄마의 피해망상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엄마는 하나있는 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넋두리하기를 좋아했고, 철없던 딸은 그게 지겨웠다. 지겨워하는 딸이 괘씸하셨을 테고, 소띠인 엄마는 그런 딸을 소처럼 들이받았다.
딸이 시집을 갔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엄마는 "너 같은 게, 시부모님에 시조부모님까지 계시는 층층시하에 들어가서 맏며느리 노릇을 어떻게 하려느냐"며 화를 내셨다. 엄마는 걷잡을 수 없는 불이었다.
그렇게 딸이 시집을 간지 만 17년이 되어간다. 별로 친하지 않던 모녀 사이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엄마는 일흔셋의 노모가 되었다. 틀니를 빼면 합죽 할머니가 되고, 하얀 은발이 자연스러워졌고, 앉고 일어서실 때마다 '끙~'하는 작은 신음을 내뱉으신다. 여행이 힘들다 하시고, 음식 간이 세졌고, 심장약과 당뇨약,고혈압약을 달고 사신다. 다 큰, 아니 늙어가는 아들 딸의 세상살이를 걱정하시고, 치매가 올까 두려워 뜨개질을 하신다. 무엇보다 딸을 들이받는 힘이 너무 약해지셨다. 딸은 엄마를 측은히 생각하고 엄마의 푸념과 한탄을 지겹지만 들어주고, 엄마는 딸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해가며 따지고 들어도 옛날처럼 힘있게 누르지 못한다.
일흔셋, 노모의 생신이다. 딸은 '따뜻하지 않았던' 엄마를 떠올렸다. 어릴 적 돌아누워 자고 있는 엄마가 사실은 마녀가 아닐까, 생각했던 날을. 생일날 저녁에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았다고 종아리를 맞던 날을. 내 꿈을 꺾었던 엄마를 원망하며 밤새 울던 날을. 하지만 '아주 따뜻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사줬던 푸른 빛의 목걸이,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주시던 인형옷, 엄마가 뜰에 심어놓았던 갖가지 꽃들, 그 꽃들 속에서 작게 흘러나오던 엄마의 노래...
딸은 너무 늦었지만 이제서야 인정한다. 평생 받아온 사랑들 중에, 그래도, 가장 큰 사랑은 엄마에게서 받은 거였다고. 늘 부족하다고 투덜댔지만, 그래도, 그 사랑이 가장 컸다고. 내 아이들에게도, 평생의 가장 큰 사랑을 주고 싶다고.
전화기에 대고 "Happy Birthday, 엄마~"라고 말했다. 왜 이런 말조차도 쑥스러운걸까. 엄마는 "그래, 고맙다."하며 웃으신다. 앞으로 얼만큼 더 "Happy Birthday, 엄마"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내 생일만큼이나 엄마의 생일이 반갑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