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가을쯤 도서관에서 알게 된 엄마가 '집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세 계약이 끝나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사갈 집이 없단다.  그 가을이 끝나갈 무렵엔 책고르미 모임의 대장이 같은 고민을 하는 걸 보았다.  이사를 해야하는데 집이 없다는.  결국 두 엄마 모두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재개발이 시작되어 곳곳에 철거된 빈집들이 즐비하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유리없이 뻥뻥 뚫린 창문들을 보면 '저 집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 동네 뿐만이 아니라 근처 몇 동네가 모두 재개발 지역인지라, 지난 가을에 이사갈 집이 없다며 한숨을 쉬던 엄마들 처지가 이해된다.  아파트가 아니라면 웬만한 집은 모두 '비워줘야 할 집'일 것 같았다.

그날 미용실에서 내 머리를 잘라주던 미용사는 연립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동네 사람들이 집을 못 구해서 '피를 토한다'고 했다.  정말 표현이 그랬다.  '피를 토한다'고.  특히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애가 닳는단다.  전세값은 오르고, 이사 갈 집은 없고, 다른 구로 이사를 하자니 아이들 학교 문제가 걸리고..   그래, 그럴만도 하겠다, 했다.  그렇게 피를 토하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이사를 했을까. 그 집의 아이들은 몇 배로 길어지고 고단해진 등하교길을 잘 견뎌내고 있을까, 문득문득 궁금해지곤 했다.     

슬픈 이 나라의 초상이 어제 하나 더 보태어졌다.  그냥 우리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참 지극히도 소박하고 당연한 요구가 불길에 활활 타올라 허무한 재로 흩날렸다.  울산 현대중공업 소각장 굴뚝 꼭대기에서 초콜릿과 물만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는 두 노동자가 생각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도 윙윙거렸다.  PD들과 기자들의 파업선언이 떠오르는가 하면, 4층 사무실에서 목에 줄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한 노동자의 이야기도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어제는 유빈이의 다섯살 생일이었다.  11살 연하 친구, 신이 엄마가 분홍색 털자켓을 선물했고, 케이크를 놓고 축하노래도 불렀다.  기뻐야 할 딸의 생일을 누군가 망쳐놓았다.  그 누군가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이 나라는 슬프고 우울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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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유빈이는 또 달을 찾는다.
아직 달이 나올 시간이 아닌데도 유빈이는 그저 달이 자기를 또 따라오기만을 바랐나보다.  
"엄마, 왜 달이 안따라오지?"
"그러게... 달이 없네..  아직 안나왔나보다."
유빈이는 차창 밖으로 하늘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어.... 달이 아픈가?"  
아직 뜨지 않은 달을 아파서 못나오는 걸로 생각하다니, 정말 아이들이란... ^^
"그러게..  많이 아픈가..?"
이럴 땐 그저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아니면... 엄마, 달이 너무 심심해서 다른 데 놀러갔나보다.."
"그런가 보다.  유빈이 기다리다가 안나오니까 너무 심심해서 다른 데 놀러갔구나."
아픈 것보다는 다른 데로 놀러간 게 좀 덜 비극적이라 그 핑계가 더 마음에 들었다.  

유빈이가 친구들과 못만나는 이유도 대강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거나, 아니면 할머니 댁이나 다른 곳으로 놀러갔을 때.
그러니까 유빈인 자기의 경험을 충실하게 달님에게 반영한게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도서관에서는 도서관 꼬마들이 작아진 옷, 신발, 장난감 등등을 펼쳐놓고 파는 꼬마장터가 열린다.  유빈이는 꼬마장터에서 쇼핑하기를 꽤 즐기는 편이라 간혹 과소비(?)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번에는 요술봉(1000원), 디즈니 공주 손가방(1000원), 디즈니 공주 목걸이 지갑(500원), 진분홍 미니스커트(500원), 노란 가디건(500원), 연보라빛 골덴 홈드레스(1000원), 헬로키티 후드 조끼와 분홍색 무늬가 있는 하얀 티셔츠 세트(500원)를 구입하는 바람에 거금 5000원을 쓰고 왔다.  꼬마장터에서 쓴 돈으로 치자면 좀 과소비한 날이다.  
꼬마장터에서 산 물건들 중에는 유빈이의 애장품이 된 것들이 꽤 있다.  지난 여름엔 꼬마장터에서 산 분홍 발레복을 여름 내내 집에서 입고 놀았다.  잘 때도 입고 자고,,, 가운데 꽃이 달리고 발을 디딜 때마다 불이 번쩍번쩍 들어오는 매우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샌들은 집에서만 신고 논다.  몇몇 원피스와 블라우스는 친구와 놀러 나갈 때 부담없이 입을 수 있고 유빈이의 공주 취향도 만족시키는 옷들이다.  

요즘 나는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를 읽고 있다.  산지는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는 미국 윌슨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다.  안타까우면서도 그들의 변화가 부럽기도 했는데,,,  이 책을 다음 달에 도서관 선정도서로 추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 고등학생들, 그것도 문제아들이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라 강간, 마약, 갱단, 살인, 폭력, 학대 등등의 글이 실려있는데, 도서관에는 매우 보수적인 엄마들이 좀 있어서, 약간만 그런 내용이 나와도 서가에서 책을 빼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아이들이 읽기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엄마들이나 선생님들만이라도...   나중에 의논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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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학원에서 돌아온 큰딸이 선생님들이 숙제를 조금밖에 안내줬다며 기뻐했다.  
그러더니 만화책을 잡고 읽는다.  
그럴 때마다 유빈이는 좀 서운한 티를 낸다. 
언니 오빠가 자기랑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늘 어딘가로 가고, 바쁘고, 항상 뭔가를 먼저 해야한다고 하니 심술이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런가 보다.  

놀아달라는 간곡한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만화책 속으로 빠져버린 언니에게 유빈이가 한 마디를 날렸다.  

"언니는 만화쟁이~~"  

으흠~~~ 유빈이가 OO쟁이의 용법을 터득했구나, 싶어 유빈이를 안고 웃었다.  자기 말에 웃으며 반응해주는 엄마 때문에 유빈이도 조금 마음이 풀렸다.  

"유빈아, 언니는 정말 만화쟁이다, 그치?  그럼 오빠는?"
"음.. 오빠는 게임쟁이~!!" 

방학을 맞아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게임을 즐기는 명보는 자기가 게임폐인도 아닌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뭐, 이건 어디까지나 유빈이의 시각이니까.. 

"그럼, 아빠는?" 
"음... 아빠는 뽀뽀쟁이!!" 

우하하하하...  매일 유빈이만 보면 뽀뽀하자고 덤비고, 협박하고, 안해주면 토라지는 아빠니까 그래, 뽀뽀쟁이가 맞다.  그럼 엄마인 나를 무슨쟁이라고 할까,,,, 긴장,,,, 

"그럼, 엄마는?" 
"음..  엄마는 사랑쟁이!" 

햐~~~~나더러 사랑쟁이란다.  난 사랑쟁이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오늘 아침까지도 '난 사랑쟁이야.'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  유빈이에게 내가 사랑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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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섯 살이 된 어린 딸이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엄마, 달이 따라와." 한다.   
창밖을 내다보니 동그랗고 깔끔한 달이 우리 차를 따라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  차가운 밤 하늘 속 달님이 너무 맑고 동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암스트롱의 발자국도, 떡 만들어 먹고 쉬고 있을 토끼도 다 보일 것만 같았다.
"정말.. 달이 또 따라오네.  모두 유빈이를 좋아하나 보다.  달도 따라오고 구름도 따라오고 별도 따라오고, 저번엔 애드벌룬도 따라왔지?"
"응.. 달이 심심한가봐.  엄마, 난 달이 참 좋아."
딸은 따라오는 달을 마음에 들어한다.  달은 참 다정해서 어딜 가든, 무얼 타고 가든, 꼭, 우리 집앞까지 따라와주니까.   

"달이랑 뭐하고 놀아줄까?  가위바위보 해볼까?"
"응.."
"자, 가위,바위,보!!!"
유빈이는 바위를 냈다.
"달님이 이겼네... 달님은 동그란 보자기를 냈는데.."
"다시, 다시, 다시."
유빈이는 다시 하자고 조른다. 
"가위, 바위, 보!"
유빈이는 이번에 가위를 냈다.  달님은 동그란 보자기라니까, 나름 머리를 굴린 것.  하지만 엄마는 유빈이 놀리기를 좋아하는 심술이 엄마라서,
"에이~~ 또 유빈이가 졌네.  이번에 달님은 동그란 바위를 냈는데.." 하고 말았다.

유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또 다시 한 번 더 해보자고 조른다.  
"가위, 바위, 보!!"
유빈이는 보자기를 냈다.  하하하, 달님이 가위를 내지 않는 이상 유빈이는 이기거나 비기거나다.  동그란 달님이 무슨 수로 가위를 낸담.
"유빈이가 이겼네.. 달님은 동그란 바위를 냈거든.  달님이 졌으니까 술래다.  숨바꼭질 할까? 유빈이가 얼른 숨어야 해."
그런데 달님은 술래인 주제에 계속 쫓아오면서 빤히 내려다 보고 있다.  비겁하다.  반칙이다.
유빈이는 달님이 숨고 자기가 찾겠단다.  이기고도 술래가 되겠다는 예쁜 딸이다. ^^ 

마침, 도로가 꺾였다.  순식간에 달님이 싹, 숨어버렸다. 
"달님이 숨었네,  어디 갔지?"
달님은 반대편 창가에서 웃고 있다.   

유빈이는 숨어버린 달님을, 오빠가 도와줘서 겨우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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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은 엄마와 딸은 아니었다.  엄마에게서 따뜻한 격려나 토닥거림 같은 걸, 받아본 기억이 없다.  사춘기로 들어설 즈음부터는 엄마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잘못 말을 붙였다가는, 아니 제대로 말을 붙인 경우라도, 피곤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소띠다.  그래서였는지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셨다.   시집올 당시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고, 가족들은 엄마의 덕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엄마는 당신이 그런만큼 주변 사람들의 여유로움이나 나태함을 못견뎌 하셨고, 또 그런만큼 주변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컸다.  엄마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뜰히도 부려먹는다'고 생각하셨고, 엄마의 그런 생각은 얼마쯤은 사실이고 또 얼마쯤은 엄마의 타고난 성격 탓이고, 또 얼마쯤은 엄마의 피해망상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엄마는  하나있는 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넋두리하기를 좋아했고, 철없던 딸은 그게 지겨웠다.  지겨워하는 딸이 괘씸하셨을 테고, 소띠인 엄마는 그런 딸을 소처럼 들이받았다.   

딸이 시집을 갔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엄마는 "너 같은 게, 시부모님에 시조부모님까지 계시는 층층시하에 들어가서 맏며느리 노릇을 어떻게 하려느냐"며 화를 내셨다.  엄마는 걷잡을 수 없는 불이었다.   

그렇게 딸이 시집을 간지 만 17년이 되어간다.  별로 친하지 않던 모녀 사이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엄마는 일흔셋의 노모가 되었다.  틀니를 빼면 합죽 할머니가 되고, 하얀 은발이 자연스러워졌고, 앉고 일어서실 때마다 '끙~'하는 작은 신음을 내뱉으신다.  여행이 힘들다 하시고, 음식 간이 세졌고, 심장약과 당뇨약,고혈압약을 달고 사신다.  다 큰, 아니 늙어가는 아들 딸의 세상살이를 걱정하시고, 치매가 올까 두려워 뜨개질을 하신다. 무엇보다 딸을 들이받는 힘이 너무 약해지셨다.  딸은 엄마를 측은히 생각하고 엄마의 푸념과 한탄을 지겹지만 들어주고, 엄마는 딸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해가며 따지고 들어도 옛날처럼 힘있게 누르지 못한다.  

일흔셋, 노모의 생신이다.  딸은 '따뜻하지 않았던' 엄마를 떠올렸다.  어릴 적 돌아누워 자고 있는 엄마가 사실은 마녀가 아닐까, 생각했던 날을.  생일날 저녁에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았다고 종아리를 맞던 날을.  내 꿈을 꺾었던 엄마를 원망하며 밤새 울던 날을.  하지만 '아주 따뜻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사줬던 푸른 빛의 목걸이,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주시던 인형옷, 엄마가 뜰에 심어놓았던 갖가지 꽃들, 그 꽃들 속에서 작게 흘러나오던 엄마의 노래...  

딸은 너무 늦었지만 이제서야 인정한다.  평생 받아온 사랑들 중에, 그래도, 가장 큰 사랑은 엄마에게서 받은 거였다고.  늘 부족하다고 투덜댔지만, 그래도, 그 사랑이 가장 컸다고.  내 아이들에게도, 평생의 가장 큰 사랑을 주고 싶다고.   

전화기에 대고 "Happy Birthday, 엄마~"라고 말했다. 왜 이런 말조차도 쑥스러운걸까.  엄마는 "그래, 고맙다."하며 웃으신다.  앞으로 얼만큼 더 "Happy Birthday, 엄마"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내 생일만큼이나 엄마의 생일이 반갑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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