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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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유시만 작가님을 좋아한단다. 그의 글을 읽고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빠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방향을 갖고 계시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는 탑재되지 않은 뛰어난 통찰력과 분석력이 정말 뛰어나신 분이란다. 자신이 이해한 바를 쉽게 설명해주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셔. 유시민 작가님을 알게 된 것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처음 그 모습과 자세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계신단다. 누군가는 정치할 때보다 얼굴이 많이 편안해지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하지만 아빠는 예전에 날카로운 눈매의 모습도 무척 마음에 들었단다. 그리고 유시민 작가님은 스스로 지식 소매상이라고 하실 만큼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다방면의 상식을 쌓게 된단다.

유시민 작가님이 경제 전공이라서 예전에 경제 관련 책들도 쓰셨는데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아빠에게 도움이 되었고, 작년에는 과학 관련 책까지 쓰셔서 영역을 넓히셨단다. 가끔씩 정치 평론에 대한 책도 써서 정치 흐름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경우도 있지. 유시민 작가님의 신간이 나오면 바로 읽곤 하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도 신간 알림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단다. 읽은 지 좀 되는데 너희들에게는 이제서야 이야기해주는구나.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게 된단다. 그의 이름을 적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유시민 작가님이 책에서 단 한번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안 할 줄 알았어. 이 책을 읽다 보니 조금 걱정이 되더구나. 그를 너무 비판을 해서, 혹시 또 검찰조사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너무나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검찰의 이성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세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흠이 없는 사람은 없단다. 그런데 그 흠을 침소봉대하는 것이 오늘날 검출의 중요 임무인 것 같구나. 진보 정치인은 왜 무결해야 하는가? 아빠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구나 흠도 있고 약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처벌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에 반해 보수 수구 세력은 더 큰 약점과 불법도 기소 없음으로 처리되는 세상. 그것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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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롱당해야 한다면, 조금의 약점만 드러나도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정치검찰과 보수언론은 말했다.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수치와 불명예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정의니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노무현과 노회찬과 조국의 최후를 보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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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대통령 당선은 민주주의 단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단다. 유능한 사람이 당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세탁이든 언론이 밀어주었든 무능한 자도 표만 많이 얻으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란다. 그를 찍은 이들이 일년도 채 안돼 후회를 하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단다. 아무 일 없길 바라며 5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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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포퍼의 말처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는 없다. 민중은 선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기도 하지만 사악하고 무능한 인물을 선택하기도 한다. 250년 전만 해도 국민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국가는 미합중국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의 문명국가는 대부분 민중이 보통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한다.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만 뽑은 나라는 없다.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사악하면 무능한 인물도 뽑았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똑같이 민주주의를 하는데도 정부 수준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권력자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서슴없이 악을 저지른 나라도 있지만 어떤 권력자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나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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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민주주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결국은 시스템으로 방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예전에 아빠는 대통령 한 명 바뀌었다고, 나라가 확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어느 정도 민주주의 시스템이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MB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보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시스템이 그리 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2년 전에 그가 당선되고 나서 좀 무서웠단다. 또다시 나라가 나락으로 가면 어쩌나, 하고그런데 그 무서움이 현실이 되는 것은 얼마 가질 못했단다. 무능해도 이리 무능할 수가 있을까. MB때나 박근혜 정권 때도 내가 해도 그것보다는 잘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아빠도 모르게 내가 해도 그보다 잘할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구나. 유시민 님은 그를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 같다는 비유를 했는데 너무 적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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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적 사고였다. 표를 준 유권자들도 그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의도가 아니라 본성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도자기가 깨지는 것은 그의 의도와 무관한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사회적 위계(位階)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을 속이지 않았다. 검찰총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를 정확히 보려 하지 않았던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으로 윤석열의 결함을 감춰준 언론에 속은 시민도 많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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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큰 공을 세운 역적 중에 하나는 언론이란다. 예전에 기자라고 하면 비판의식을 갖춘 지식인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오늘날 기자라고 하면 기레기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단다. 유시민 작가님도 오늘날 기자는 그저 회사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를 했어. 그의 말에 동감했단다. 그러니 기자 너희들도 되도 않는 괜한 자부심을 갖지 말길 바란다. 지금 이 사태를 만든 가장 큰 공범은 너희들이니.. 나라가 골로 가고 있는데, 책임이라도 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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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97)

기자는 사회에 책임을 느끼는 지식인이 아니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기자는 사는 게 괴롭다. 월급을 받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회사원일 뿐인데 비리를 폭로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인권에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하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기자가 자본과 정치권력의 간섭과 횡포에 맞서 언론 자유와 편집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시대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 것처럼 보인 때가 잠깐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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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 규범을 무시한다. 무엇보다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이권을 따고 광고주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 대주주의 대리인이 보도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기자의 독립성이나 편집의 자율성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념적 균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지키지 않는다. 윤석열과 국힘당에 불리한 사실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보도한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가 윤석열 정부와 정치검사의 비리를 보도하면 그 비리를 심층 취재하는 게 아니라 보도한 기자의 신상을 털고 보도 내용을 공격해 신뢰성을 훼손하는 데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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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가 손바닥에 ()’자를 쓰고 TV 토론에 나올 줄이랴 상상이나 했겠니. 손바닥에 ()’자를 쓰고 TV토론에 나온 사람을 설마 백성들이 찍어주겠나, 했어. 아빠는 당연히 그가 당선될 리 없다고 생각했어. 선거 전날 그가 당선되면 어쩌지? 걱정하는 친구에게 절대로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던 기억이 아직도 나는구나.

유시민 작가님이 이야기하기를 그는 어리석기 때문에 위험한 스타일의 권력자라고 이야기한단다. 절대공감. 무슨 정책을 함에 있어 정말 모르고 추진하는 것 같고, 기자회견을 잘 하진 않지만, 해도 동문서답하기 일쑤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나라 정상들과 회담을 할지 걱정이구나. 영악한 정상들이라면 속여먹기 참 좋은 사람이 아닐까 싶구나. 아빠 친구들도 만나서 이야기하면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정말 창피하다고 하더구나.

유시민 작가님이 그를 전두환과 비교를 했는데, 일리가 있는 설명이더구나. 우리는 지금 5공에 살고 있는 것 같구나. 5공도 결국은 지나갔으니, 지금의 이 시절도 결국은 지나간다고 좋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데 남아 있는 기간이 너무 길어 괴롭구나. 긴 터널을 지나는데 아직 반도 통과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괴롭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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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155)

윤석열은 전두환과 비슷한 데가 많아서 평행이론이 나올 만하다. 전두환은 군부 쿠데타로, 윤석열은 검찰 쿠데타로 직속상관을 공격해 권력을 차지했다. 전두환이 극소수 정치군인을 권력의 핵심으로 기용해 권력을 운용한다. 둘 모두 야당을 불순세력이라 여기며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두 사람 모두 좌파가 장악한 언론을 정상화해 여론을 바로잡겠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부부와 함께 민중의 조롱을 받는다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크게 다르다. 전두환은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윤석열은 기껏해야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괴롭힐 뿐이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한다. 윤석열은 전두환만큼 기괴하지만, 힘과 능력은 전두환에 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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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행보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맞나 싶을 때도 있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를 옹호하는 것이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제거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나?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구나. 대통령이 잘못을 하면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인지 아니면 주종관계에 철저한 조직인지 모르겠구나. 그 이유를 유시민 작가가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는데, 앞으로는 그와 그 주변인들에게 기대를 접게 만드는 그런 설명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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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사람은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 능력은 일반지능, 전문 지식, 업무 자세, 타인을 대하는 태도, 전략적 사고 능력, 경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A급이라고 하자. A급은 A급을 알아보고 좋아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흔하다. A급 책임자가 전권을 쥐면 주로 A급 인재를 기용한다. 그러면 그 A급들이 또 다른 A급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B급을 조직 책임자로 임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B급은 A급을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B급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B급 책임자는 기껏해야 B급을 기용한다. 아부를 잘하면 C, D급도 마다하지 않는다. A급은 기용하려고 해도 어렵다. A급 능력자는 B급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조직은 C급 이하 등외까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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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를 탄핵하라는 국민 청원이 국회 게시판에 올라왔고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인기(?)리에 찬성표가 올라가고 있단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이 없다. 선거를 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이 터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민들이 목소리를 높여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왜냐? 그는 그것도 모른다. 자신이 무능한 것조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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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만남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 인간 윤석열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본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더닝-크루거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람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운명이 그를 덮친다. 자신에게 왜 그런 운명이 닥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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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혁신당의 구호처럼 삼 년은 너무 길다. 아니, 세 달도 너무 길고 삼 일도 너무 길다.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 한탄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월을 천천히 가게 해주어 고맙다고 해야 하나, 농담을 하곤 한단다. 세월이 빨리 가도 좋으니 어떤 식으로든 그의 권력이 끝났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시는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오늘 독서 편지를 쓰는데 다시 분노게이지가 올라갔더니 오타가 많은 것 같구나. 이해 바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총선이 끝난 후 시민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정책과 국정에 임하는 태도를 바꿀지, 바꾼다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바꿀지 지켜보았다.

책의 끝 문장: 그러니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윤석열이라는 병을 이겨내자고.



플라톤의 잘못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미덕인지 아는 철학자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따지지 말자.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권력을 쥐어줄 방법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상속하는 왕정국가에서는 생물학적 우연의 축복을 받아야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귀족정 국가에서도 높은 신분을 타고나지 않으면 권좌가 접근할 수 없다. 민중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공화정도 다르지 않다. 철학자가 선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지혜롭든 어리석든, 표를 많이 받는 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 P21

아이히만 재판 보고서 격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썼다. 보통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비속함’이 아렌트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고 본다. 아이히만은 나치 핵심 권력자들의 홀로코스크 기획 회의에 참석했고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법정의 아이히만은 사악한 살인자라기보다는 지극히 비속한 공무원이었다. 아렌트는 그의 잘못이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적인 무능’이라고 했다. - P30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도 완전무결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움츠리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자연이 준 본성에 따라 사회적 미덕과 선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들과 손잡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일의 세상을 오늘보다 무엇 하나라도 낫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윤석열을 보면서 마음에 새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 악의 지배를 연장한다는 것을. 부족한 그대로, 서로 다른 그대로 친구가 되어 불완전한 벗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나아가야 악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 P44

국민은 이념적 균질 집단이 아니다. 국민을 균질 집단으로 만들면 사회는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 일가의 북한처럼 된다. 국민은 복잡한 이질 집단이다. 사람마다 정치적 이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다. 어떤 정책도 모든 국민의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헌법과 법률에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 P77

그는 위험한 스타일의 권력자다. 사악한 권력자보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더 위험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현자라고 확신한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정반대 선택을 주저 없이 한다. 비판하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가족과 주변까지 괴롭힌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 P147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친일파라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무지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후쿠시마의 사고 원전에서 나온 핵 오염수에 어떤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오염수의 유해성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과 해양 방류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켜 ‘1 더하기 1을 백이라고 한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심각한 다툼이 있는 과학적 쟁점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논리의 규칙에 따라 토론하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머저리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머저리면서. - P165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조국 자신도 모른다. 길든 짧든, 그는 그 시간에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울 것이다.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는지, 그가 불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는 있다. 조국과 윤석열의 운명이 완전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둘의 싸움을 둘 모두 명예롭게 끝낼 방법은 없다. 윤석열에게 조국은 이재명과 다른 존재다. 윤석열의 시선으로 보면 이재명은 ‘아직 죽이지 못한 자’다. 싸움을 멈추고, 공존을 시도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죽였던 자’다. ‘이미 죽였던 자’와는 공존할 수 없다. 조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살아난 자’는 자신을 죽였던 자를 죽여야 살아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석열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이재명이 아니라 조국이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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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규식은 1911년경 한국인은 거의 없고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주목하지 않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그곳에 한국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민족혁명의 앞길을 연 선각자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가를 불러모으고 조국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중국이나 미국의 학교에 보내고 혹은 직접 세운 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가면서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구축하여 마침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았던 독립운동자였다.

 

(100)

물론 신한혁명당의 주도자들이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분석과 보황주의 노선 등의 한계를 보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중국 지역 독립운동 조직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감행하려한 점에서 분산된 독립운동역량을 단일화한 선구적 무장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견인차가 되었던 것과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129-130)

우리나라를 욕심낸 나라를 귀국이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화에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출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귀국의 자구책 가운데 상책이다. 발칸문제 때문에 유럽전쟁이 일어났듯이 지금 귀국의 지위가 바로 서방의 발칸사정과 똑같다. 때문에 동아전쟁이 일단 발동되면 귀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참여할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는다. 본국 문제가 토의될 것을 핵망하며 귀 정부를 재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귀국을 위한 자구책이며 양국을 위한 일이다.”

 

(141-142)

1922 8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날, 신규식은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섰다. 살이 홀쭉히 빠진 그의 양볼에는 깊게 주름이 잡혔다. 그는 백지장처럼 하얗고 움푹 팬 눈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요.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 없소라는 자책하는 듯한 독백을 남기곤 입을 다물었다.

 

(145-146)

신규식이 순국한 지 1년 후에 그의 역사관이 담긴 한국통사 <한국혼>이 출간되었다. 중국학자 후린이 다음과 같은 글을 서문에 적어 신규식의 독립투쟁의 산증인이 되었다. “한국 문제는 일본 군벌이 일본 국민에게 남긴 하나의 큰 빚이다. 이 빚은 언젠가 청산되어야 한다. 폴란드가 독립하고 체코가 새롭게 부흥하였으며 인도의 이집트 역시 기필코 독립할 것이다. 한국 문제 또한 오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신규식 선생 그는 비록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혁명가도 그를 기려 계속해 영웅들 일어나 마음모아 배를 저어가니 나라의 혼은 살아날 것이고 선생 또한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157)

황커치앙에게 보낸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선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고,

이어 약속을 어긴 이웃 일본을 죽이고,

남은 힘으로 뭇 요물들을 물리쳐.

태평양으로 내던진 뒤 피먼지를 씻노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진보적인 태도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살해된 중국의 근대 민주 혁명가를 애도하기 위해 쓴 수많은 시속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68)

셋째, ‘국지정신(國之靜神)’나라의 문헌은 국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국사를 잊었다 함은 곧 나라의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슬프다!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는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국사를 잊게 된 원인은 5천 년 이래 당한 대외적인 침략에 있으며, 후세 역사가들이 외국에 아첨하고 국내의 사서를 무시한 존화사관(尊華史觀) 때문이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구학문, 신학문을 하는 모두를 향하여 자국의 역사는 모르나 중국의 역사는 잘 알고, 서양의 문명은 말하면서 자국의 문명역사는 모르는 사대사상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소양(주자)에서 무릎 꿇고 감히 스스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겨우 남이 뱉은 찌꺼기의 침을 핥는 것이며, 온몽을 백조(白潮)(신문학의 유파)에 적시는 것은 그 껍데기를 입어보기 전에 먼저 나의 정신을 장사지내는 것이다라며 무비판적인 신구학문에 대한 맹종을 정신의 죽음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사대사상과 존화사관에서 벗어나 신채호가 대동사(大東史)를 기초하고, 박은식인 광문회(光文會)를 창설하고, 나철이 대종교를 개창해 단군을 숭배하는 등 국사와 한국혼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받아 국혼(國魂)이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173-174)

무력주의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세계 평화에 대한 소망은 동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 유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며, 동아시아에 영구적인 평화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패권주의를 쓸어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패권주의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 한국의 독립으로부터 시작해야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이미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이 독립해 그들의 침략을 막아낸다면 비단 세계로 뻗치는 그들의 야심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안전도 보장될 것이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종식된 뒤 일본이 비록 전쟁으로 스스로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해군력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으며, 시베리아에서의 병력 또한 여전히 증강되고 있다. 그들의 의도를 짐작해보건대 동아시아를 하나의 커다란 전쟁터로 만드는 데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진단하였다. 마치 1937년 이후 자행된 악행을 예견한 듯한 탁월한 그의 혜안을 엿볼 수 있다.

 

(181)

신규식의 삶은 인간사랑, 민족사랑으로 가득찬 가장 인간적인 민족지도자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의 시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바람을 담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풍류를 알고 인생을 노래하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소유한 인사였다. 하지만 민족적 국가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한말, 식민지시대를 살아야 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민족문제 해결이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시대 인식을 실제 삶으로 구현해 냈던 믿음직한 선현 중 하나가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했던 민족역사 속의 선현들처럼 닮아 민족자결, 민족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우리의 구명부는 오직 민족자결이라는 한가지 소망을 가슴에 새기며 결코 앞에 나서지 않고 통합의 울타리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해 낸 그럼 민족운동가였다. 그의 뒤를 이은 우리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반드시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일제시대 민족운동가 중 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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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 - 통권 1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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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날 우리는 총체적 난국에 살고 있단다. 현정권 들어서 하는 일들에 합리적으로 이해 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그야말로 사고뭉치 정권이 아닌가 싶구나. 심지어 아빠가 해도 그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이런 정권이 우리나라 정권이라는 것이 창피할 따름이란다.

오늘 너희들에게 소개한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186)>에서도 현 정권에 대해 이것저것 비판을 많이 하고, 방향도 제시해주려고 노력한단다. 하지만 쇠귀에 경읽기 일뿐이다. 무식한데 고집까지 센 경우가 가장 안 좋은 경우인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매일 뉴스에서 보고 있단다. 젠장. 이번에 읽은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186)>의 부제는 공공성 확보가 관건이다이란다. 최근 몇 달 동안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의대생 증가와 함께 의료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단다. 우리나라의 의사 수, 특히 공공의료의 의사수가 부족한 실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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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굳이 의료제도가 상이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의사수가 비정상적으로 적다는 점은 한국 보건의료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상식선에서 납득할 수 있다. 한국의 의대 정원은 1990년대 중반 의대가 9개가 마지막으로 신설되며 3,300여 명으로 늘었다가 의약분업의 여파로 2006 3,058명까지 줄어든 뒤 2024년까지 18년째 동결돼 있다. 그사이 보건의료분야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2000년 한국의 경상의료비(총 의료비) 25 1,230억 원이고 GDP 대비 3.9%를 차지했다. 2022년 기준 경상의료비는 209 460억 원(잠정치), GDP 대비 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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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발췌한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 20여년 간 의사의 수입은 급속도로 늘었단다. 20여년 전에도 의사의 수입은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날은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여 있단다. 그렇다 보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적성이고 뭐고 뒷전이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의대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 많단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의대를 떨어진 사람이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하는 상황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들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것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국가 정책을 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렇다면 방법만 잘 잡는다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의사들이 그렇게까지 꽉 막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방법을 보면, 무대뽀 정신인 것 같아. 의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양보할 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고, 의대 증원을 하더라도 점진적으로 숫자를 늘리는 방안을 채택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정부는 무조건 내년부터 2000명 증원을 늘린다는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으니 협상이 제대로 되겠냐고.. 의사협회도 힘 대 힘으로 싸워보자면서 파업을 강행하고 있으니 죽어나는 것은 국민들뿐이잖니.

이런 답답한 상황을 몇 달째 끌고 있고 계속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답답하구나. 그리고 의사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현재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란다. 그들의 정책을 보면 의사수 늘리는 것만 혈안이 되어있지. 취약한 공공의료 분야에 대한 대책은 잘 보이지 않거든의사 수 늘려놓았더니 피부, 미용 분야의 의사수만 늘어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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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공공의료가 취약하다는 것은 전체 의료시스템의 취약성을 의미한다. 민간 의료기관은 공적 자원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을 위해서도 수익성에 기반한 경영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진료분야는 기피하거나 소극적이게 된다. 아무리 필수분야 진료기능이어도 기대수익이 약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중소 병원이나 사립대학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수익성이 높은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한다. 진료기능이 편중될 수밖에 없거니와 의료내용이 적정선을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비보험 분야의 확대 그리고 피부, 미용 분야로의 의사 쏠림 등은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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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기후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절로 느끼고 있단다. 그런데 이런 기후 변화는 더 많은 질병을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의료서비스에 있어서도 불평등을 만들어낼 거야. 같은 병에 걸려도 부자들은 살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죽을 수 있어. 국가의 의무로 공공의료 서비스의 확보는 절실하단다. 우리나라는 공공의료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는구나. 의사들도 돈 벌려고 사립종합병원으로 쏠리는 현상이 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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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후위기는 건강위기이고 심각한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기온 등 극심한 기후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환경재난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대응력이 부족한 취약 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기후위기의 심화로 코로나 같은 전염병 재난은 반드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복합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의료의 준비는 중요한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수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류의 안전을 위해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의료분야 탄소 발생 감소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지금의 조건에서는 진척이 어렵다. 의료공공성의 토대가 미약하여 이를 추진할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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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인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고, 무작정 의사수만 늘리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대화 좀 해라, 대화 좀

 

1.

부자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해서 그런지 물가도 오르고 교통비도 계속 오르기만 한단다. 나라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교통 요금의 인상이란다. 기후위기를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대중 교통을 좀더 이용을 해야 하는데, 대중 교통 요금을 계속 올리다 보면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는 거지. 대중 교통은 어떻게 하면 수요를 늘릴 수 있다는 하는 정책을 고심해야 한다는 거야. 문제가 되면 그냥 무작정 교통 요금을 올리면 되는 것이라 아니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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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둘째 치고, 서울시의 장래 교통정책은 대중교통의 수요를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사실이다. 요금을 올려 놓고 이용자가 줄지 않았어!”라고 환호성을 올릴 때 득은 버스를 운영하는 민간사업자와 보조금을 지급하는 서울시로 흘러가는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부담은 더 커지고 기후위기 대응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통요금 인상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현재의 부담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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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과일 물가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단다. 사과값이 전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단다. 하기야 괜히 뭔가 했다가 더 비싸지거나 다른 것마저 같이 비싸질 수 있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런데 이 사과값 상승이 단지 일이년 흉작 때문이 아니고, 기후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소리에 그렇겠구나, 생각이 들었어. 기후 변화가 그냥 온도 상승으로 우리사 살고 있는 곳이 더워진다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란다.

바뀐 환경 때문에 먹거리가 바뀌고 동식물이 바뀌고 또는 사라지는 거야. 사과도 기후위기로 인해 산지가 점점 북상하고 있다는구나. 예전에는 대구에서 대부분을 생산했지만, 지금은 충주나 포천이 주요 산지가 되었대. 이러다가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사과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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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금년 봄, 사과값이 상승하면서 드디어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 문제가 기후변화라기보다는 단순한 농산물 유통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은 대구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주변에 사과나무를 심고 주민들에게 보급한 것이 대구 사과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후변화로 인해 대구지역 사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사과 산지가 북상하여 충주나 포천 지역이 주요 사과 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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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밖에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에서는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적은 글이 실렸고, 무위당 장일순의 30주기 특집으로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글이 있고, 여섯 편의 서평이 실려 있단다. 녹색평론에서 소개해주는 처음 알게 된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호에서는 아빠도 읽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도 소개되었더구나. 그 밖에 시도 실려 있는데, 아빠가 무서워하는 뱀에 관한 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읽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더구나. 시골 전원 생활을 꿈꾸지만 저 뱀 때문에 생각을 접게 되는구나. 뱀에 관한 시 한 편을 소개해주면서 오늘 독서편지를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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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장석주

 

시골집에서 혼자 살 때다.

 

어느 가을날 오후 현관문을 열었는데,

문 앞 데크에서

따스한 볕 아래 쉬던 뱀이 화들짝 놀라

긴 몸을 날려 달아났다.

 

느닷없는 이 사태에 내 심장 박동은 요동쳤다.

방심한 채 몸을 늘어뜨린 채 볕 쬐던

저 길다란 영혼도 또 얼마나 놀랐을까!

 

미안하구나, 뱀아

네 평화로운 오후를 내가 망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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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책의 끝 문장: 죽음의 폐허 위에 조금씩 퍼져가는 숲의 생기와 접속어들의 춤을 만물의 민주주의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고에너지, 고비용, 저효율의 의료산업 모델은 어떤 식으로든 폐기될 수밖에 없고, 자원을 덜 쓰면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의료공공성을 확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어디에서든 누구든 필수의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앞으로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원에서 실패하고 있는 상품들(의사, 약품, 기술)에 의존하는 시스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환원주의적, 기계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그대로 둔 채 공적인 개입과 비용을 늘리는 방식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왜 질병의 결과와 비용을 국가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더 많은 병원 병원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런 것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환경과 생활조건을 위해서는 왜 노력하지 않는가. - P3

미세먼지들이 자욱한 공기를 마시고, 미세플라스틱이 부유하는 물을 마시고, 항생제 투여된 고기를 먹고, 농약 묻은 야채를 먹고, 화약약품으로 숙성시킨 과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내부로 집착된 시선을 지속한다. 살벌한 경쟁의 기업문화 속 스트레스가 만연한 직장을 다니고, 휴식하고 운동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365일 자영업장을 운영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몸 내부로 향하는 강력한 시선의 방향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다시 나누어진 부분의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의 관성을 멈추지 못한다. 발암물질, 미세플라스틱이 이미 하이브리드된 몸인데, 의료는 자꾸 이 몸의 순수성을 말한다. 지금의 의료에서 몸과 몸 밖의 관계성은 무시된다. ‘관계’ 없는 의료가 지금의 의료를 특징짓는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질책의 말을 듣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 - P71

자연환경이 훼손된 곳에는 독성을 가진 식물이 곧잘 번식해서 풀을 먹이로 하는 가축들에 해를 끼치기도 하고, 농업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식물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근원을 제압해서 생태계가 스스로 재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죠. 독(毒)이라는 개념은 생태적인 게 아닙니다. 문화적인 것이지요. 지구의 관점에서는 독(毒)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 P104

그리고 현재는 있는 줄도 몰랐던 정치행태를 이런 종류의 독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현재 인류 최고의 시스템도 악착스런 인간의 탐욕에 대한 제대로의 제어장치는 제어장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무척 변한 것 같아도 그 근본에서는 70년대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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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문규는 그제서야 친구의 지난날의 그림의 미완성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 참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난날의 친구와, 지난날의 친구의 그림이 가슴에 저리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미완성을 완성시킬 수는 있어도 완성을 미완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명 있는 걸 생명 없이 할 순 있어도 이미 생명이 없어진 것에 생명을 줄 순 없는 것처럼. 문규는 친구의 완성된 그림을 갖고 싶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써 그와 친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귀부인의 장막을 뚫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쓸쓸하게 친구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을 나왔다.

 

(163)

여보, 당신 이까짓 아파트 하나 샀다고 우리가 무슨 갑부라도 된 줄 알아요. 내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게. 아직 멀었어요. 철이 사립 국민학교 치다꺼리도 치다꺼리지만, 철이라고 만날 국민학교만 다니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유 말도 말아요. 그뿐이면 또 좋게요. 과외 공부 안 시키우? 아이를 낳아놓기만 하면 뭘 해요. 사람 노릇을 시켜야지. 사람 노릇 시키려면 돈이 무진장 드는 거라구요.”

 

(181-182)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도 해야지 입 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264)

젊은이나 어린이들과의 이런 언어의 불통에는 편리하게도 세대차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어 열등감까지는 안 느껴도 된다. 그러나 우리 나이나 우리보다 얼마 젊지 않은 사람들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까지 해야 되지 이 아니 서글픈 노릇인가. 그런 못 알아들을 말 중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친구들이 흔히 쓰는, 그쪽의 관용어에다 토씨나 접속사만 우리말로 하는 경우는 대강 넘겨짚어 알아듣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물 건너온 티 좀 작작 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상당한 지석인이어서 유창하게 논리적인 우리말 중 못 알아들을 말이 섞이면 적어도그게 사람 이름인자, 사람이라면 음악간가 문학간가 과학잔가? 또는 실재하는 사람인가 작중 인물인가, 아니면 새로운 주의나 경향, 사조(思潮)의 이름인가쯤은 짐작할 수 있어야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못 읽었다는 식의 실수를 안 할 수가 있다. 또 상대방을 함부로 높이 평가해 그런 학구적 상상력만 동원할 것도 아니다. 그가 한참 도취해서 찬양하는 게 내가 모르는 예술가가 아니라 내가 못 가본 술집 이름일 수도 있고 상품의 라벨일 수도 있다.

 

(285-286)

실례가 안 된다면 궁합을 보아드리기 전에 궁합의 유래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예로부터 궁합이란 원치 않는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다고 전해지죠. 그건 다 아는 얘기고 오늘날까지 궁합이란 게 소멸하지 않고 날로 발전해온 과정 역시 남녀 간에 있어선 거의 영혼의 문제인 일방적인 사랑의 소멸과, 거기 따른 편리한 거절의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게 나의 현장 체험인데요. 선생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321)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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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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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유명한 평론가의 추천작, 출판사들의 러브콜을 받은 작품, 영화 제작사와 거액 계약 등 이 소설을 홍보하는 수식어들이 많았단다. 약간은 과도해 보이는 홍보가 붙은 소설들은 간혹 큰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아빠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단다.

지은이는 셸리 리드라고 하는 사람인데 대학교에서 30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뒤늦게 처음 쓴 소설이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이라고 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은 아빠와 비슷한 세대들에게는 브레드 피드의 리즈 시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구나. 이 소설은 그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이란다. 그런데 왜 소설의 제목을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지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에서 따온 듯싶구나.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멈추거나 피하지 않는 강물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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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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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을 다 읽은 날 우리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어. 그 식사자리에서 아빠가 이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너희들과 엄마 모두 무척 재미있다고 했었잖니. 그때 바로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썼어야 했는데, 밀린 독서편지를 차례대로 쓰다 보니 읽은 지 꽤 지났구나. 그 때 이야기해준 것을 잊지 말고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메모를 해 둔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을 잘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1.

소설은 1948년 콜로라도 거니스 강 주변 아이올라라는 시골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 빅토리아. 빅토리아가 열두 살 때, 어머니와 큰 오빠와 이모가 외출했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셨단다. 그 이후 집안일은 빅토리아가 다 해야 했어. 집에는 아버지와 망나니 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불구자가 되어 하루 종일 휠체어에서 지내는 이모부가 있었어. 빅토리아는 이런 남자 셋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지냈어. 그런 빅토리아를 공감해주는 어머니도 없었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큰 오빠 캘러머스도 이 세상에 없었어. 식구들이 있었지만 빅토리아는 늘 외로웠지. 아버지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어. 빅토리아는 집안일뿐만 아니라 복숭아 과수원에서 농장일도 도왔단다. 그야말로 착한 딸이었단다.

그 날도 술에 취한 동생 세스를 찾으러 가던 길이었어. 길을 묻는 낯선 이방인 윌슨 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 빅토리아는 윌슨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술 취한 세스를 부축해서 데리고 가던 빅토리아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게 되었어. 그때 윌슨이 갑자기 나타나서 빅토리아를 안아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빅토리아는 더욱 가슴이 뛰었겠지. 하지만 이런 윌슨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세스는 윌슨을 공격했고,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 아버지가 농장에서 돌아오셔서 윌슨은 무사히 돌아갔단다. 사실 윌슨은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이었단다. 세스는 윌슨을 인디언이라면서 업신여기고 욕을 했어. 심지어 윌슨이 현상수배자라면서 그를 잡겠다고 큰 소리를 쳤단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그날 아침과 저녁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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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그날 아침 우리 농가를 나설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내 안에 어떤 새로운 지도가 펼쳐졌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이제 비범한 소녀가 되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탐험가들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저 멀리 신비로운 해변의 존재를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내 안에 갑작스럽게 마젤란이 등장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윌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윌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왔을지, 떠돌이라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일지 궁금해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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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빅토리아는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윌슨이 머물고 있는 여관을 찾아갔단다. 그런데 여관에 가보니 윌슨이 인디언이라고 내쫓았다고 하더구나. 빅토리아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여관 주인이었는데 말이야. 우여곡절 끝에 빅토리아는 윌슨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날 이후 그들은 비밀 사랑을 하기 시작했단다. 어느날 세스가 빅토리아의 비밀 사랑을 눈치챈 것 같았어.

그리고 얼마 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윌슨밤마다 빅토리아는 윌슨을 찾아 이곳 저곳 찾아 다녔어. 그런데 며칠 뒤 마을 외곽에서 윌슨은 피부가 벗겨진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단다. 빅토리아는 울분을 토했어. 세스가 윌슨을 잡아 죽이겠다고 큰소리 친 것도 기억이 났어. 세스가 윌슨을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빅토리아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어. 빅토리아는 임신을 했어.

 

2.

집에서 점점 불어나는 배를 숨기면서 집안일을 했단다. 하지만 점점 불어나는 배를 숨길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빅토리아는 아버지한테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단다. 윌슨과 함께 지냈던 깊은 산속의 산막에 가서 지냈어. 그런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무척 무서웠단다. 특히 밤에 산짐승이 들어올까, 아니면 낯선 이라도 나타나면 어찌할까…. 비상식량과 텃밭에서 나는 작물로 간신히 끼니만 때웠어.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혼자서 아기를 낳았단다.

힘들게 아기를 낳고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영혼이 된 윌슨이 보살펴주었는지 빅토리아는 몸도 회복하고 아이도 잘 자랐어. 아이의 이름은 블루라고 지었단다. 몇 주가 지나고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그곳을 떠나기로 했단다. 다시 마을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소풍 나온 가족을 보았어. 젊은 부부와 블루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온 거야. 순간적으로 빅토리아는 블루를 저 부부가 키우면 잘 키워 줄 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그들이 주차해 놓은 자동차 뒷좌석에 블루를 내려놓고 도망쳤단다. 슬픔과 죄책감과 안도감을 가득 안은 채 달렸단다.

그리고 자신의 이웃집 루비앨리스 집에 노크를 했단다. 루비앨리스는 노파이신데, 예전에 마을 사람들 몰래 윌슨을 숨겨주기도 하셨어.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의 보살핌 속에 며칠 동안 지내니 몸이 회복되었어. 그리고 집에 갔어. 아무도 없었어. 한 동안 비어 있는 집처럼 보였단다. 빅토리아 방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어. 저녁이 되자 아버지가 농장에서 돌아오셨어. 빅토리아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단다. 마치 늘 빅토리아가 집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집에 세스와 이모부가 안 계셨는데 그것을 물어볼 수도 없었단다. 그 후 며칠 동안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단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는 등 깊은 기침을 계속 하셨어. 큰 병에 걸리신 듯했어. 1949년 가을 아버지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장례식에 오신 보안관 아저씨를 통해서 빅토리아가 집을 가난 이후 일을 들을 수 있었어. 빅토리아가 사라지고 아버지는 거의 매일 빅토리아를 찾으러 돌아다니셨다고 했어. 아버지는 세스와 이모부 때문에 빅토리아가 집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스를 보안관 아저씨에게 신고해서 세스를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고, 이모부는 이모부의 엄마에게 보내버렸단다. 이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제서야 알게 된 빅토리아는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구나. 아버지가 병이 생긴 것도 다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 집에 혼자 있으면서 빅토리아는 복숭아 과수원을 혼자 운영했단다.

 

3.

1954년 인근에 댐 공사를 한다고 했어. 그렇게 되면 빅토리아가 살고 있는 마을과 과수원은 모두 물에 잠기게 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반발을 했지만,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난 이 마을에 미련이 없어서 가장 먼저 정부에 집과 땅을 팔았단다. 이 일로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했단다. 루비앨리스만 그녀를 똑같이 대해주었어. 빅토리아는 마을에서 루비앨리스만이 유일한 친구였단다. 어느날 루비앨리스가 쓰러지셨는데, 다행히 빅토리아가 발견하여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단다.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가 인근에 있는 대학교에 무작정 들어갔단다. 자신의 복숭아 나무들을 이전하고 싶은데 방법을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무작정 만난 교수님이 자신의 학교에 괴짜 식물학 교수가 있다면서 그가 도와줄 거라면서 소개해주었어. 그 교수의 이름은 그리니였어. 그리니 교수는 빅토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겠다고 했어. 어찌 보면 그것도 식물학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프로젝트이자 연구일 수 있거든.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빅토리아의 복숭아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단다. 이제 집도 이사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 세스가 찾아왔단다.

세스도 어느덧 스물두 살이었어. 빅토이라는 세스가 돈 때문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스는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하러 왔다고 했어. 윌슨은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친구가 죽인 것이라고 했어. 하지만 빅토리아는 왜 말리지 않았냐고 했고, 세스는 그 당시 상황에서 말릴 수 없다고 했어. 빅토리아는 그 친구에게 자수를 해서 죗값을 받으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죽고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단다. 빅토리아는 화를 내면서 세스를 다시 내쫓았단다. 하나 밖에 없는 식구이지만 세스를 용서할 수 없었어.

빅토리아는 아이올라의 집을 정리하고 파오니아로 이사를 갔단다. 파오니아 생활은 친절한 이웃과 그리니 교수의 도움으로 잘 적응해갔단다. 다행히 이전한 복숭아 나무들도 건강하게 열매를 맺기 시작했어. 그렇게 혼자 생활도 적응해서 살다 보니 가슴 속 한 켠에 늘 아픔을 주는 아들이 자주 생각났어. 아들의 생일에 헤어졌던 그곳을 가보았단다. 그곳에 눈에 띄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 놓는 의식을 하면서 아들의 생일을 기념했단다. 그 이후 매년 아들의 생일에 그곳을 찾아서 돌멩이를 올려놓았단다. 1962년 아들의 13번째 생일날누군가 그곳을 다녀간 것 같은 흔적이 있었어. 작은 발자국들도 있었고빅토리아는 혹시 라는 생각을 하면 긴장을 했단다. 그리고 그 다음해도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갔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단다.

 

4.

또 시간이 흘러 1970아들의 생일날 그 바위에 갔다가 깜짝 놀랐단다. 비닐 봉지 안에 편지가 돌에 괴여 있었어. 빅토리아는 그 긴 편지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단다. 그 편지는 잉가 테이트라는 사람의 편지였어.

1949년 잉가는 빅토리아를 두고 간 블루를 또 다른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아들처럼 정성스럽게 키웠대. 이름은 루카스라고 짓고 자신의 친아들 맥스웰과 비슷한 달수인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쌍둥이라고 했어. 잉가의 남편 폴은 그리 성격이 좋은 이가 아니었어. 맥스웰은 그런 아빠를 쏙 빼 닮았단다. 그에 반해 루카스는 차분하고 병든 동물들도 잘 보살펴주었어. 그런데 루카스는 커가면서 피부색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어. 그래서 늘 우울해 보였단다. 잉가는 루카스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가 루카스를 처음 만난 곳을 가게 되었고, 큰 바위 위에 정돈된 돌멩이를 보게 되었단다. 그때가 빅토리아가 왔다가 작은 발자국을 봤던 그 때였단다. 그 돌멩이를 보고 잉가는 루카스의 친엄마가 이곳에 왔다고 직감했단다. 그리고는 루카스의 친엄마가 나타나서 루카스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했단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그곳에 오지 않았어.

1969년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고, 젊은이들을 전쟁에 보내려고 추첨을 했단다. 그러니까 추첨에 당첨된 사람만 군인이 되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걸 생일로 결정했어. 맥스웰과 루카스는 쌍둥이라고 했으니 생일이 모두 8 31일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만 8 31일도 당첨되고 말았단다. 잉가는 슬픔에 빠져 루카스만이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어. 그러면서 루카스에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어. 그리고 같이 병무청에 가서 루카스의 입영을 막으려고 했단다. 잉가가 두 아들 모두 군대에 간다는 소식에 이성을 조금 잃었던 것 같구나. 루카스에게 그렇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면 루카스가 좋아할까. 당연히 루카스는 충격에 빠지겠지. 루카스는 그날 바로 집을 나갔단다. 그리고 얼마 후 루카스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고 했어.

맥스웰은 군대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신체검사에서 어렸을 때 부러진 팔 때문에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었단다. 그래서 입대가 취소되었어. 이후 맥스웰은 입대취소라는 실망에 젊은 혈기까지 어우러져 술과 약물에 빠졌어. 그러던 어느날 맥스웰은 술에 취해 토악질을 하다가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죽고 말았단다. , 잉가가 너무 불쌍하구나.

장례식장에 루카스도 왔어. 잉가는 루카스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지만 다시 떠났단다. 루카스도 젊어서 그런지 잉가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다시 루카스가 떠나고 나서 잉가는 루카스의 친엄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단다. 그 편지가 바로 빅토리아가 본 편지란다.

빅토리아는 가장 친한 이웃 젤다에게 자신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단다. 빅토리아는 젤다의 응원에 힘입어 잉가에게 연락하고 만나기로 했단다. 잉가와 빅토리아는 오랜 시절 서로 모른 채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줄로 연결되어 있었단다. 빅토리아와 잉가는 만나 한참을 이야기했단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 그리고 일 년 뒤. 안전하게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루카스 빅토리아와 잉가는 함께 루카스를 맞이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이야기를 다시 하다 보니그래도 많이 까먹지 않고 이야기한 것 같구나. 그렇다고 아빠가 한 이야기에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고…^^ 지은이의 데뷔작이라고는 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작품이었어. 아빠가 서두에서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이 소설은 기대를 가득하고 읽어도 그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었을 것 같구나. 아빠가 최근 몇 달 내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좋았단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주인공 빅토리아가 복숭아 나무처럼 다시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좋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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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416)

그랬다. 젤다의 말이 옳았다.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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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셸리 리드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저수지 아래 시커먼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자갈이 깔린 물가를 따라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을 이 땅이 단단히 붙잡아 줄 거라고, 아들도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한 건 꽃피는 사랑에 관해 조언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66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셸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 P164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문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 P188

세스는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그를 스물두 살이 아니라 여든 살의 노인으로 보이게 했다. 세스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순간 나는 한때 동생을 아꼈던 어린 누나의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두려움과 혼란을 풀어내고 애틋함만 남기고 싶었다. 동생을 구해주고 싶었다. 동생의 악함과 세상의 악함을 내 선한 행동으로 상쇄하고 싶었다. 나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내 안에 있었다고, 그러니 네 안에도 생각지 못한 면이 존재할 거라고 세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 P277

긴 진입로를 벗어나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나를 만들어준 이 공간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트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았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채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4

초여름 빗물로 불어난 하얀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매우 아름다웠다. 곧 저수지가 될 거니슨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댐이 건설되고 거니슨강 하류에 수문이 개방되어도, 지금 흐르는 강물의 일부는 변함없이 아래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더라도 강물은 어떻게든 물길을 찾아내 꾸준히 흐를 것이다. 그러면, 노스포크강을 따라 새로운 삶을 꾸린 나는 그 반대편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P322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흙 두 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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