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기 위하여
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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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방학 중 가마쿠라 해변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난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며 선생님과 꽤 친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선생님은 나에게 두툼한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을 한다. 선생님의 유서에는 자서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외아들인 선생님은 스무 살 무렵 장티푸스로 거의 동시에 부모님을 잃는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맡아 관리하던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한 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하는 등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병이 낫는다.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친구 K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고, 주인집 따님과 삼각관계에 빠진다. K가 따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선생님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따님을 달라고 하고, 주인아주머니는 며칠 후 그 사실을 K에게 알린다. 사실을 알고 난 이틀 후 K는 자살 한다. 이후 선생님은 따님과 결혼 하여 살고 있지만 아내는 K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친구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혼자 시달리며 자식이 없는 것도 천벌이라 여기는 선생님은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마음>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아버지, 선생님, 친구 K, 노기대장, 천황, 아내의 어머니 등. 육체의 병으로 인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정신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한 자살이 있다.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는 데서 죽음은 일률적인 반면 각각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차별적이다. 특히 자살의 경우.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이다.

노기대장, K, 선생님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다. 천황의 군인으로서 반란군에게 깃발을 빼앗긴 노기대장. 일본인의 무사도 정신에 따르면 이러한 불충은 할복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기대장은 세이난(1878년 메이지 10년) 전쟁이후 35년 동안 죽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천황이 서거하자 따라 죽는다. 그에게는 칼로 배를 찌르는 한 순간보다 지난 35년간의 세월이 훨씬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할복보다도 더 잔인한 형벌을 스스로 치루고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기대장에게 있어서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다.

선생님은 친구 K를 자신의 하숙집으로 불러들여 물질적으로 심정적으로 돌봐주고 있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도움으로 K는 안정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숙집 따님을 사이에 두고 K와 선생님은 삼각관계에 빠진다. K로부터 따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 선생님은 K 몰래 주인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하고 아주머니는 그 사실을 K에게 전한다. 소식을 들은 이틀 후 K는 자살한다. 선생님은 K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삶을 살아간다. K의 자살은 사랑의 실패 때문일까? 선생님의 배신 때문일까? 사랑의 실패나 친구의 배신은 선생님만 알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K는 본가와 양가로부터 의절 당하고 곤궁한 생활을 선생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육체를 채찍질함으로써 영혼이 빛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외부적 요인들은 오히려 그를 정신 지향적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K가 자살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자라는 존재. 통제되지 않는 세속적 욕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유서의 마지막에 남은 먹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하는 의미의 글귀다. ‘더 빨리’라는 말이 선생님과 따님의 관계를 알게 된 이틀 보다는 훨씬 더 일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K는 자신의 정신을 배신하는 몸과 마음에게 진 자신을 구차하게 여겨 스스로 단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또 일본인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고 여기는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선생님은 K가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또 빼앗길 수 없다는 강박과 그것을 지키겠다는 욕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불러온 결과는 참담했다. 소중한 것을 지켜냈다는 안도감보다 K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던 작은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사회에 나아가지도 않고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K에 대한 속죄감으로 살고 있다가 천황의 서거소식과 노기대장의 순사 소식을 듣는다. 선생님은 메이지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메이지의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메이지 정신’에 순사하겠다고 결심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메이지 정신’은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메이지 정신’을 ‘메이지 10년대에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메이지 20년대에 정비되고 확립되어 가는 근대 국가체제 안에서 배제되어 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메이지 20년의 정신이 메이지 10년대의 정신과는 이질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고유의 메이지 정신이 변질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메이지 정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살을 할 만큼 선생님은 목적 지향적 인간도 사회적 인간도 아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후기 메이지 정신이 초기 메이지정신을 배반하는 것에 강한 혐오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만 나의 추측일 뿐 ‘메이지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소세키만이 알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인간은 다분히 이성적일 수 있지만 자살을 실행하는 되는 순간은 또 다분히 감정적이기도 하다. 노기대장의 순사소식을 들었을 때 선생님은 그가 죽은 이유는 납득이 잘 안되지만 자살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살아온 날에 대해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선생님은 노기대장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다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변질 되어가는 메이지 정신을 지켜보는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했을 것이다.

세 사람의 죽음은 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노기대장의 순사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고, K의 자살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단죄의 의미가 강하며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배신을 지켜볼 수 없다는 자의적 결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마음』은 처음 주인공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 부분은 선생님의 유서로 끝난다. 편지로 남겨진 유서가 이 소설에서는 워낙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주인공 ‘나’는 자연스레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잊혀 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무의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세키는‘나’의 육체적 아버지는 그 근원에 맞게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처리했다. 또 정신적 아버지라 할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아버지를 잃게 만든 소세키의 의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또 한가지 기억해두어야할 것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과연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육체도 정신도 아닌 바로 마음이라는 것.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능하면 다른 이론서들은 참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다 읽고 난 후에 내 나름대로 선행자들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읽으면서 끝내 이론서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그리고 『그 후』를 번역한 윤상인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이었다. 고진의 글은 설득력있고 치밀했지만 동의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소세키가 ‘『마음』이라는 비극적인 작품에서 과거를 강렬히 환기시킴으로 거기서 이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발언은 내 의견과 같은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윤상인의 글은 고진의 글보다 성글다는 느낌이 강했고 언어의 표피적 의미에만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책이 제목에 어울리게 문학과 근대와 일본에 대한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두고두고 참고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음>의  다른 판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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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4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4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4-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읽고 반딧불이님의 리뷰로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마음>이 <그후>보다 더 단순하고 완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소세키가 더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21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소세키 책 중 가장 리뷰를 쓰기가 어려웠어요. 여러가지 이야기거리가 많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역시 '죽음'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긴 글 읽으시느라 애쓰셨네요.

바밤바 2010-04-2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소설의 등장인물을 보며 숨기고팠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때가 있답니다.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에 나오는 나비처럼 세상의 파도에 허우적대고 있는 근자인데 소세키는 이미 그러한 삶을 겪고 글로 남겼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14   좋아요 0 | URL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하는 건가요?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지는 않으셔야할텐데요.
'나의 소년 시절은'으로 시작해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는 '길'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어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타니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도 잠깐 나쓰메를 언급하죠. '고백'의 양식을 말하며 당시 작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나쓰메를 꽤 호의적으로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 <언어와 비극>도 꼭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윤상인 교수의 책을 호의적으로 봤는데요.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었구요. 나쓰메를 비판적으로 읽는 연구자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5 21:31   좋아요 0 | URL
근대문학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소세키이고보니 고진의 책에서 여러차례 언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어와 비극>에서는 '소세키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소세키의 글의 다양한 양식을 다루었습니다. 소세키를 보는 고진의 관점은 새로웠지만 '선생님'이 자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다가 K의 등장으로 알게된다는 부분은 잘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그 후>의 공로병 이야기가 나와서 꼼꼼하게 확인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용한 부분과 제가 읽은 책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보다 더 치밀한 근거로 주장이 뒷받침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들은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구요.
 
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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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형님은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끝마친 지금도 역시 쿨쿨 자고 있습니다. 나는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쓰기 시작하여,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글을 마치는 나를 묘하게 생각합니다. 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참에서 영원이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

 
   
 

『행인』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이 마지막 단락을 읽은 건 지난 4월 13일 새벽 3시 4분이었다. 그리고 울었다. 주인공 이치로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까진 무릎처럼 아직까지도 마음이 쓰라리다. 양은냄비 풀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날씨는 입안을 껄끄럽게 했고 천안함 소식들은 쓰라림을 보태주었다. 이 계절 내내 듣고 있는 베토벤의 소나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제 오늘 아파트 주변과 양재천에는 벚꽃이 절정이다. 내가 평생 먹어도 남을 분량의 팝콘 이 튀겨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포라로이드 카메라와 디카를 가지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개나리 벚꽃 흐드러진 도로를 배경으로 현상되어 나오는 내 얼굴이 마음과 달리 화사하기까지 하다. 내 마음을 배반하는 내 얼굴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스스로를 배반한다고 수상히 여긴 건 내가 아니라 이치로였고 소세키였건만, 그의 불안한 영혼이 내게 건너오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소세키는 내게 눈물을 선물했고, 그동안 잘 유지되어왔던 작가와 독자의 객관적 거리는 무너져 내렸다. 슬픔이 찾아왔다고 해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법.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을 여미기 위해 선무당 푸닥거리 같은 이 글을 적는다. 혹시라도 소세키가 백 대 후의 독자로 예감한 사람 중의 하나에 나도 끼어들 수 있다면 그의 불안과 우울을 위해 이 글을 소지 올리는 심정으로 적는다. 
 

소세키의 소설 중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첫 작품이다. 그동안 보아온 책들은 제목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내용을 대변하는 것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친절한 설명이 붙어있었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등은 그냥 책의 내용인지 제목인지 달리 구별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서로 묻어가는 제목이다. <그 후>는 연재 예고문에서 도쿄대학생이던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을 쓴 것이기에 <그 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문>은 소세키가 아무 제목이나 정해보라고 하자 모리다 소헤이와 고미야 도요다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아무데나 펼쳐보고 눈에 띄는 문이라는 단어를 골랐다고 했다. <피안 지날 때까지>는 설날에 시작해서 피안(일본에서는 춘분, 또는 추분 절기의 전후 7일간을 피안이라 칭함)지날 때까지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지어진 그간의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행인』은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다. ‘행인’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가는 사람’, 혹은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치로에게 꼭 맞는 제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로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지나가는 사람, 즉 행인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모두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결국은 혼자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나 또한 너에게 행인일 뿐인 것이다.

『행인』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치로의 동생 지로가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지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녀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듯이 이야기 한다. 오카다와 오카네, 오사다와 사노, 미사와와 미친 여자,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맹인 여자 그리고 형으로부터 형수와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 남녀가 관계 맺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서로 간에 적당히 절충하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결혼을 했지만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와 엉뚱한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살다 죽은 여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형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뛰어난 학자이지만 불안증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과는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특히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자기 아내와도 소통이 안 되고 결국은 아내를 의심하게까지 된다.

그는 인간의 불안은 ‘앞서 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불안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맥박이 뛰는 불안이다. 그의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헤맨다. 그는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게 떠돌아다니는 탓에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립다. 그의 불안을 잠재울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 나이가 되도록 학문만을 한 탓에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기교는 배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게 되지만 아내는 때릴수록 얌전해져서 자신의 인격의 타락만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는 죽거나, 미치광이가 되거나, 종교를 갖거나 해야 할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이치로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까?

소세키는 이치로라는 이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놓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치로는 연구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지의 칼날위에 서있지만 감성의 그네를 탈 줄 모른다. 그는 타인에게 다가갈 때에도 가슴으로 가다가지 못하고 머리로 다가간다.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고 교양을 연마하였지만 그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소세키가 그리는 반성하지 않는 근대의 전형적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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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늘 로베르브레송의 '무셰트' 라는 영화를 특별상영했는데 가정과 사회 모두에게서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14살 소녀 무셰트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영화였어요. 모두들 서로를 착취하고 차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지극히 행인일 뿐이었던 그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죽음을 택했어요.<이치로는 어느쪽이었을까요?-저도 궁금해지네요..>

반딧불이님께 눈물을 선사한 소세키, 그의 언어와 이야기들과 함께 한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으신 지금의 사진 속 모습에서, 마음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셨네요. 그리고 아직도 그 슬픔 속 여운이 가라앉아 계신듯 글에서 느껴집니다.

반딧불이 2010-04-19 01:05   좋아요 0 | URL
요즈음 같은 날은 영화든 책이든 작가가 주인공을 죽이는 건 보고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행인>에서 자기 마음에 갇힌 남자를 만들어 꼼짝 못하게 해놓고는 다음 작품인 <마음>에서는 결국 소세키도 주인공을 죽이지요.

이 리뷰로 푸닥거리를 해서인지 조금 낳아졌어요. 현대인들님. 사진은 정말 제가 생각해도 아이러니였어요. 벚꽃 탓이었다고...그냥 꽃을 탓해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늘 밋밋한 제목을 달던 나쓰메가 이 소설엔 꽤 의미있는 제목을 단 것 같습니다. 나쓰메는 왜 늘 밋밋한 제목을 달았을까요? 고양이의 마음(<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을 猫心이라잖아요? 이걸 학자의 자세라고도 하던데, 늘 주의 깊게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두는 나쓰메의 태도가 제목마저도 밋밋함을 갖게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0 00:00   좋아요 0 | URL
사람과도 세계와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또 소세키 개인의 문제로 보면 그가 어릴적 양자로 왔다갔다하면서 제대로 이름을 갖지 못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지금까지의 소설들이 세계(근대)와 자아의 대립구도였다면 <행인>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그리는 쪽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만약 소세키가 이치로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대로 갈등의 위치가 좀 옮겨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일본인들에게 정전의 위치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급하신대로 일본의 문화가 이 소설 속에도 충분히 담기니까요.
일본의 국민소설로 <행인>을 읽는 게 우리에겐 덜 부담스러울 듯 합니다. <마음>보다는요. 물론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반딧불이 2010-04-2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소세키를 일본의 국민작가로 명명하면서 <마음>을 정전으로 든다면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주인공 '나'에게 초점을 둔다면 그건 분명히 과거와의 단절이잖아요. 어쩌면 소세키는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 모두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일수도 있을거란 생각을 해봐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3:1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단절을 단절로 보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일본인들이 하니까요. 그게 문제일 터이구요.
 
피안 지날 때까지
나쓰메 소세키 지음, 심정명 옮김 / 예옥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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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의 전속 작가였던 소세키는 1910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총 104회에 걸쳐 『문』을 연재했다. 이후 그는 위장병으로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8월 슈젠지 온천 요양 중에는 증상이 악화되어 대량의 피를 토하게 되고, 이른바 ‘修善寺 의 大患’이라고 부르는 30분 죽음을 체험한다. 병상생활과 관서지방 여행을 하면서 간간히 강연을 하던 1911년 위장병이 재발하여 다시 입원하게 된다. 9월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던 다섯째 딸 히나코가 갑작스레 죽는다. 『피안 지날 때까지』는 1912년 1월부터 4월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이것은 소세키가 딸의 죽음과 본인의 짧은 죽음을 체험한 후의 첫 작품인 셈이다. 
 

죽음을 체험하고 나면 사람이 변하는 것인가. 『피안 지날 때까지』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이다. 소제목이 붙어있는 것도, 각각의 소제목마다 화자가 다른 것도 새로웠다. 하지만 그것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지 이야기로 통합되고 있었다. 
 

주인공 게이타로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직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별 성과도 없이 분주히 다니면서 취직을 부탁해 놓고 있다. 한편 친구인 스나가는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도 있고 손을 써주겠다는 친척들이 있지만 이러쿵저러쿵 말만 늘어놓으며 직업을 갖기를 자꾸 미루고 있다. 하루 종일 하숙방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게이타로는 집을 비우는 일이 없는 스나가를 자주 찾게 되고, 그나마도 미안해지면 특별한 볼일도 없이 거리로 나다니곤 한다. 너무나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게이타로는 하다못해 소매치기라도 맞닥뜨리기를 바랄 정도다. 학교를 졸업해도 먹고 사는 게 힘들다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속박이라며 한탄하던 게이타로는 급기야 경시청의 탐정 같은 일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탐정은 소세키가 ‘무릇 세상에 천한 가업치고 탐정과 고리대금업자만큼 천한 직업은 없다’고 쓸 만큼 가장 경멸하는 직업중의 하나이다. 게이타로 역시 자신이 탐정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남의 어두운 면을 관찰할 뿐 스스로 타락할 위험성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의도를 지닌 직업’인 그런 나쁜 일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연구자, 아니 인간이라는 기묘한 존재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경탄하며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다. 
 

‘대머리를 붙잡는 것처럼’ 하나같이 ‘세상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가운데 게이타로는 취직을 부탁했던 스나가의 숙부 다구치로부터 연락을 받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덤빈다. 그러자 어떤 사내가 전차에서 내린 뒤 두 시간 이내에 하는 행동을 정찰해서 보고하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탐정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일에 뛰어든 게이타로. 
 

탐정이라는 직업이 정확하게 언제 처음 등장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업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탐정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생각나는 것이라곤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운 형사 콜롬보 밖에 없다.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지문을 채취하고 밤낮으로 남을 미행하고, 뒤통수치는 질문을 밥 먹듯이 하면서 닦달하다가 꼼짝 못하게 옭아 넣는 수법을 쓰는 사람이 내가 가진 탐정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부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긴장되면서도 음침한 것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소세키는 내가 알고 있는 이와 같은 탐정의 수법은 단 한 가지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이미 소설 전면에 깔아놓은 복선이 이것을 예상하게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복선조차도 다 읽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탐정 역할을 맡은 게이타로가 하는 일은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료함에서 해방되면서 동시에 다구치가 자기에게 맡긴 탐정의 역할을 하고 직업도 얻게 된다. 그리고 스나가의 신상에 얽힌 비밀, ‘고등유민’을 자처하는 마쓰모토의 입을 통해 그의 인생관을 듣는다. 치요코에게서는 어린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듣고, 모리모토에게서는 그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듣지만 게이타로에게는 여전히 간접 경험이다. “요컨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그가 얻은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전부 고막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게이타로의 바람대로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어두운 면을 경탄하면서 바라보는 인간 연구자가 된 셈이다.
 

스나가의 이야기 가운데는 러시아 작가 안드레예프가 쓴 독일어 번역본 <게당케>라는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복수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여자가 보는 앞에서 문진으로 남자를 때려죽인다. 이성과 감성의 극점에서 일이 완결되었다. 소세키는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전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고등유민’은 적극적으로 근대와 맞서는 느낌이었다. 『피안 지날 때까지』에도 여전히 고등유민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근대에 맞선다는 느낌이 현저하게 격감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전의 작품들이 세계와 자아의 대립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자아 내부의 문제들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덧) 안드레예프의 소설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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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정신의 풍경'에서 언급되는 나쓰메소세키는 '도련님'을 통해 일본문화 중 '기리義理'에 관해 엿볼 수 있음 이었어요. 그러면서 기리 때문에 정의를 행할 수 없다는 말이 품는 뜻, 즉 일본 사회에서 기리가 도덕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구속력을 갖는 점을 언급한 것이었거든요.

일본의 유명한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의 근대를 섹스<여자들이 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 것>라고 본다고 했고 일본의 사상가인 다케우치는 근대라는 기간이 오직 동양과 서양 사이의 긴장들에서만 출연했고 전쟁은 단지 그러한 긴장관계들의 가장 최근의 일일 뿐이라고 하던데요... 소세키에서의 근대란 개인의 출연.. 개인 내부의 문제로의 침잠일까요? ...반딧불이님?

물론 소세키의 죽음 30, 40년 이후 '근대의 초극'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이는 모든 서양적인 것의 초극으로 그리고 결국 대동아 공영권들의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로 귀착되기는 하지만은요.
<나쓰메소세키의 책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모든 것이 언제나 잡거하는 식의 일본 문화의 특성에 주목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아니 어쩌면 데이비드 하비가 그랬듯이 근대성의 신화 가운데 하나인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문제일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

반딧불이 2010-04-11 11:48   좋아요 0 | URL
소세키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근대가 야기하는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여성의 성과 자유연애, 개인의 탄생, 인간 내면의 출현 등등이요. 이런 것들은 소세키가 의도적으로 쓴 것같지만 일본인들의 정신적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기리(義理)에 대한 것은 소세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우리나라의 이식적 근대와는 달리 일본은 자발적 근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소세키는 이렇게 반성없이 그것도 너무나 빨리 진행되는 근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보관함에만 담아두고 있는 <일본 정신의 풍경>을 빨리 보고싶어져요. 현대인들님. 소세키 책,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실 거에요.

반딧불이 2010-04-1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행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여우님의 의견 적극 참고 하면서 일단 끝까지 가겠습니다. 다 모아지고 부끄럽지 않으면 여우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늘 모자란 글을 아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퀴벌레
데이비드 조지 고든 지음, 문명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오래전이었는데 식품보관하는 찬장 바닥에 설탕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딸아이가 흘려놓은줄 알고 무심코 지나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바퀴벌레의 소행이었다. 어느날 딸아이가 툴툴거리며 미술도구들을 치우고 있었다. 누가 물감가지고 서랍속에 장난을 쳤다는 것이다. 깨알보다도 작은 색색의 물감이 마치 과립물감처럼 서랍속에 흩어져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퀴벌레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내가 아는 바퀴벌레는 아주 정직한 동물이었다. 설탕을 먹으면 하얀 똥을 싸고 물감을 먹으면 노란색, 연두색, 빨간색 등 색색의 똥을 싼다. 신기해하면서 찾아보았던 기억으로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소화기관의 구조탓이라고 들었다. 바퀴벌레는 음식을 가리지 않지만 상당한 미식가로 알려져 있다. 지방이나 단백질보다도 녹말이나 설탕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오이나 샐러리는 싫어하지만 사람의 속눈썹을 잘라먹기도 하고 코딱지도 먹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퀴벌레가 노린 것은 털이 아니라 눈물관의 미네랄과 습기란다. 바퀴벌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여일을 견디는데 이것은 바퀴벌레의 정상적인 생명의 절반이라고 한다. 40여일을 안먹고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정상수명이 100일도 안된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라웠다. 그러나 바퀴벌레의 수명은 그 종류에 따라서 300 - 600여일까지 다양했다.

요즈음은 거의 바퀴벌레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의 300여 쪽에 이르는 페이지의 대부분에 바퀴벌레 그림이 나온다. 한두마리씩 나오기도 하고 무더기로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끔찍하다거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안생긴다. 오래 함께 지내다보면 친구가 되는걸까?

이 책의 원제목은 『바퀴벌레(The Complet Cockroach) 지구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생물에 대한 포괄적 지침서』이다. 바퀴벌레는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예고 없이 불쑥불쑥 나타난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멸시받은 생물이 되었다. 그러나 3500여종에 달하는 바퀴벌레는 이 지구상에 대륙이 형성될 즈음 나타나 공룡의 출현과 사멸을 지켜보았으며 침팬지와 비슷했던 동물이 인간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지켜본 장본인이다. 화석을 연구한 지질학적 증거로 보면 인간보다 3억 4천만년이나 앞서 있다고 한다.

발열성(냉혈) 무척추동물로 몸 속에 등뼈는 물론 뼈나 연골같은 지지구조가 하나도 없다거나 위 속에 이빨이 있다거나 두개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들은 무지한 내가 접하는 최신 정보다. 바퀴벌레는 닭같은 육류보다 세 배 이상 단백질이 풍부하며 맛은 새우맛이라고 한다. 바퀴벌레로 잼을 만들어먹기도 하고 날것으로 먹는 민족도 있고 숯불에 그을려 먹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것보다 바퀴벌레가 더 싫어하는 인간유형이 아닐까 싶다.

'세상 모든 생존의 지존'이라는 바퀴벌레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책에서 내가 관심있었던 부분은 카프카의 『변신』에 관한 부분이었다. 여전히 넘어야할 산으로 남아있는 카프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놓는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프란츠 카프가의 『변신』은 1915년 11월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이 흉측한 벌레가 많은 독자들이 가정한 대로 정말 바퀴벌레 였을까? 
 

이 실존주의적 고전의 저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카프카는 표지에 그레고르의 변태된 모습을 그린 삽화를 싣지 못하게 했으며, 특히 출판업자에게는 "곤충 그 자체의 모습도 그려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통보하였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삽화가인 오토마 스타크는 책의 초판에 사용될 표지를 만들었는데, 가운과 슬리퍼를 신고 있는 한 남자가, 공포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남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는 열린 문이 있고, 그 문을 통하여 심연의 암흑만이 보일 뿐이다.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곤충을 설명하기 위해 주의 깊게 선택한 단어들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다. 독일어 원본에서는 그레고르를 ungeheueres Ungeziefer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첫 번째 단어는 '집에서는 설 장소가 없는 괴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두 번째 단어는 '희생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불결한 동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첨가하여 '괴물 같은 해충'이라는 뜻도 있다. 이처럼 두음(頭音)을 일치시킨 문장은 '악독한 벌레와 '거대한 공충'으로 해석되어왔다. 여기에 대한 단서는 많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잠자는 정확히 어떤 종류의 곤충으로 변한 것일까? 그의 변태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레고르는 빈대처럼 납작하다고 했다. 너무나 얇아 베개 밑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고, 이빨을 사용하여 문의 열쇠를 조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문은 "둥근 갈색의 복부, 아치모양의 갈비뼈에 의한 구분" 그리고 "눈앞에서 어찌해볼 수도 없이 물결치는 그 많은 다리들......" 한참 이후에, 잠자의 가정부는 그레고르를 미스터카퍼(mistkafer)라고 불렀는데, 많은 학자들에 의해 '늙은 쇠똥구리'라고 해석되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쇠똥구리'라고도 한다. 이런 여러가지로 보아 『변신』의 상징주의와 고대 이집트의 내세에 대한 믿음 사이에는 그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려 비평가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내세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믿음은 왕쇠똥구리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데, 왕쇠똥구리의 유충은 땅 속에서 부화되어, 건조하고 생명이 없는 사막의 모래를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프카가 바퀴벌레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41세에 죽기 직전에, 소설가인 막스 브로드에게 그의 소설 원고를 포함한 모든 서류를 소각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렇지만 브로드는 죽어가는 작가의 요청을 무시하기로 결심했고, 수년이 지난 후에, 카프카의 일기들을 모아 출판할 수 있었다. 일기의 어느 부분에도 그레고르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가장 그럴 듯한 가능성으로, 『변신』의 신비한 주인공은 소원해지고 이간된 저자 바로 그 자신이며, 그는 바퀴벌레처럼 그의 짧은 인생 동안 인간성에 의해 고통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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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3-2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잘 읽고 갑니다.^^
놀랍고 진지하고 풍부한 느낌을 줘요. 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3-26 01:3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신 거 아닐까요. 고맙습니다.
 
나츠메 소세키 문학예술론
나쓰메 소세키 지음, 황지헌 옮김 / 소명출판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나쓰메 소세키는 1900년 그의 나이 34세에 영국유학 길에 오른다. 그의 말대로라면 영국에 머물렀던 2년여의 세월은 그에게 있어 가장 불유쾌한 시간이었다. 연간 1800엔이라는 비용이 정부로부터 지급되었지만 그 돈으로 영국에서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듯싶다. 그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허름한 하숙집으로 이사를 하고 입고 먹는 것을 아껴 책을 사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작품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문학론』의 서문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본인의 소회가 가장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문학론 서>는 이 책이 어떻게 착상이 되었으며 어떤 인연을 거쳐 어떤 연고로 출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밝혀두었다. 소세키는 이런 과정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싶다. 어째서 자신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 영국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고 공부했는지, 하라는 영어공부는 제쳐두고 왜 영문학을 공부했는지, 키 크고 피부가 투명할 만큼 흰 영국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으로 서문을 가득 채웠다. 대부분의 이론서들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이나 본문을 간결하고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서문을 대신하는 경우와는 달리 소세키의 <문학론 서>는 억누르고 억눌러도 조금씩 터져 나오는 사적인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이 서문을 나는 여러 차례 읽었다. 읽을 때마다 조금씩 이 예민한 사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었다.

문학론, 회화론, 연극론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가 대학에서 강의 했던 자료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원래 유학당시 소세키는 문학이 어떤 필요에 의해 태어나고 발전화고 쇠퇴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문학서를 읽고 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피로써 피를 씻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이런 연구계획은 원래 10년을 기한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동경에 돌아왔을 때 그는 대학 강의를 의뢰받게 되고 그는 이 연구 자료로 강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이 책은 강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순문학을 하는 학생들을 배려한 탓인지 그는 설명을 위해 예를 드는데 그 예들은 너무나 탁월하다.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소설가라기보다 차라리 수사학자라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소세키는 문예가의 이상(理想)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미적정조, 진실에 대한 이상, 사랑 도덕에 대한 이상, 장엄에 대한 이상이 그것이다. 이 네 종류의 이상이 시세에 따라 유행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인데 소세키 당시의 문예의 이상은 ‘진’이었던 것 같다. ‘진;을 중시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넘어 미와 선과 장엄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고 한다. 소세키가 예를 들고 있는 작품들은 모파상이나 셰익스피어인데 그들의 작품이 문예의 네 가지 이상 중 지나치게 한가지에만 편중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문학예술론>은 문학전공자들이 읽어야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사생문이나 비평가의 태도, 창작자의 태도 등 곱씹어 읽어야할 내용들은 따로 노트를 마련해 둔다. 공들여 읽어야했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그의 문학론을 토대로 작품을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너무 오래 소세키바라기를 하다 보니 자꾸만 다른 책에 추파를 던지고 싶어진다. 헤픈 여자의 고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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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3-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소세키 길라잡이에 감사 드려요.
요 책도 담아갑니다. 정독해야할 책 같군요.^^

반딧불이 2010-03-16 01: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서실에서 일독하신후 구입하셨으면 해요. 문학이론서라서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03-2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론서라면 다른 것보다는 분명 어렵겠네요.
사르트르도 그렇고 누구도 그렇고 문학이론서라면 정독도 못하고 퉁겨져 나온 적이 많아서..
그냥 이 길라잡이로 만족하렵니다ㅠ


반딧불이 2010-03-22 01:42   좋아요 0 | URL
저도 문학론만 읽고 회화론 연극론으로부터 튕겨져 나왔어요. 요약정리는 했지만 서재에 올려도 아무도 안보실듯 하고, 보여드려도 별 도움이 될것 같지 않더라구요. 마음님. 나중에라도 혹시 기회가 되시면 말씀나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