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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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에서의 동정이 同情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두 페이지를 넘기면 동정이 童貞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오로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童貞 없는 세상을 꿈꾸며 사는 주인공 준호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평생이라고 하는 시간이 썩 긴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겨우 수능 시험을 치렀고, 소설은 대학 입학 원서 접수하기까지의 불과 이삼 개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는 결손가정이긴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해심 많은 삼촌과 엄마가 만들어주는 안정의 울타리 안에서 그는 섹스 이외에는 아무런 고민이 없다. 독자는 이런 준호를 同情해야할까, 준호의 童貞을 同情해야할까? 그러나 그는 同情하기에는 너무나 경쾌하고 행복한 캐릭터다.

이 소설은 제6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했다. 1967년생 수상작가 박현욱에 대한 인터뷰의 한 부분이 책날개에 실려 있다.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동정 없는 세상』은 경쾌하고 재미있다. 세계를 재고 자르는 기준이 여자 친구 서영과 ‘한번 하기’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일관되는 ‘경박한’ 십대 준호의 관점에서 성인들 세계를 요모조모 살피게 하고, 요리조리 재고 자르는데, 너무 뻔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이내 큭큭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구성과 시점의 의도된 경박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되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정 없는 세상』이란 소설 자체는 결코 경박하지 않은 소설이 된다. 고작 등장인물 여섯에 한 얼뜨기 십대의 ‘총각떼기’작전을 소재로 한 소설로부터 얻어내고 있는 만만찮은 주제의 규모를 고려하면 분명 신인답지 않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소설을 재미있고 가볍게 쓰되 그 안에 진지함과 무거움을 담을 줄 안다.

이 인터뷰의 내용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일부분에는 도무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는 머리가 나쁜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만만찮은 주제의 규모’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재미있고 가볍게 쓰’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지함과 무거움’은 또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책을 읽을 때는 나도 큭큭거리며 읽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동정이 그 동정이 아니었단 말이지? 하는 반문과 함께 童貞과 同情이 함께 어우러졌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평면적으로 일관하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건다운 사건하나 없는 소설의 그 어디에서도 넘쳐나는 童貞의 가벼움만을 보았을 뿐 同情의 진지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을 맡았던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내 아쉬움을 달랬다.

 
야하면서도 건전하고 불순하면서도 순수한 젊은 호흡이 느껴지는 건 좋은데 지나치게 가볍다는 건 이 작가가 버릇 들이면 안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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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현욱의 동정, 그런것이군요.
리뷰 잘 읽었어요.^^

반딧불이 2009-09-0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발견하고는 그자리에서 다 읽었는데 남는건 아무것도 없네요.
 
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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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대한 기본상식조차 없는 내게 자신이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 (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HIV) 감염자라는 것을 알려온 사람이 있었다. 재능과 끼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까탈스럽기는 했지만, 덜렁거리는 나와는 달리 섬세함도 만만찮아서 더러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는 감기에 걸리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반인보다 심하게 앓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그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나는 그렇게도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싶으냐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

곁에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의 아픔은 육체적인 아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왜 자신이 이런 병을 앓아야하는지 또는 남들이 알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하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암이라도 걸렸으면 말이라도 속 시원히 할 수 있지 혼자서만 속앓이를 해야 하는 상황도 그를 못 견디게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수잔 손택이 얘기하듯이 질병을 무슨 천벌로 생각하거나 “뭔가 추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은유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함정에 빠진 사람은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건강과 관련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 뿐이었다.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고통만큼 확실한 자기 것은 없는 법이니 그의 고통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늘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뜬금없이 그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통해 그의 건강을 확인하고 있다. 병은 자랑하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는 내게 자랑은커녕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쳐야할 천형을 짊어지게 했다.

『푸른 알약』은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그녀의 아이를 사랑하는 만화가의 이야기이다. 에이즈는 혈액이나 애액을 통해 감염되므로 젊은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을 온갖 위험을 안고 있는 질병 덩어리로 보는 여자, 그녀의 병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솟구치는 성적 욕망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남자. 그들 사이에 동거하고 있는 에이즈 바이러스. 이들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진행될까? 질병에 대한 은유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그들과 동행하는 푸른 알약이 그들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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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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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뱃길로 백두산에 다녀왔다. 서울-속초-러시아 세관- 중국 장영자 세관을 통과해서 훈춘에 이르기까지 가는 시간만 꼬박 하루가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다다른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노랑머리에 꼬부랑말을 쓰는 외국인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모습의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훈춘에서 다시 백두산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는 옥수수 밭과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해바라기 밭이 듬성듬성 보이지 않았다면 8월의 간도지방은 오직 녹색, 한 가지 색 뿐이다. 생각 없이 따라 부르던 노래 ‘선구자’가 가슴에 얹혔고 ‘광활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에서 마대 자루에 가득 삶아놓은 옥수수와 단고기로 큰 대접을 받고 다음날 그의 묘소를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시인의 묘소에 절하고 둘러본 주변에는 봉분만으로 그것이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비석도 없는 사람들의 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독립운동 하다 죽은 사람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간도로 이주해왔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묘라고 했다. 아마도 지금쯤 무성히 자란 풀들로 봉분마저 사라진 곳도 많을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 40년대 간도(동만, 연변이라고도 한다)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토벌대에 쫓기는 조선 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간도는 중국 땅이지만 조선인들이 개척한 곳으로 조선인들이 더 많은 곳이다. 또 일본제국주의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격돌하던 최전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은 조선인들의 치열한 항일 혁명의지와 조선공산당 내에서 이념적으로 분열된 사람들의 피폐한 모습을 보여준다.

‘민생단 사건’을 박사논문으로 쓴 한홍구 박사는 ‘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논문의 주제에 담을 길 없는 그러나 빼놓기에는 또 너무나 암담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뜻이리라. 이 민생단 사건으로 처형된 항일 혁명가가 최소 500여명이라고 하는데, 일제의 토벌대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항일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초기에는 혁명, 투쟁,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거의 신경증적 발작으로까지 보여질 정도이다. 밥을 설익게 하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용변을 자주 보느라 혁명과업을 게을리 한다고 민생단, 동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도 패배주의를 조장한다고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니 말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해연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정지사에 근무하는 측량기사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잔인한 운명에 휩싸이게 된다. 이정희는 토벌대의 정보를 빼내다 발각되자 자살한다. 그 충격으로 해연은 아편에 빠지기도 하고 그녀가 죽은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심리적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해연이 용정의 사진관에 일하다가 혁명조직의 또 다른 일원인 여옥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여옥과 경성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 토벌대의 습격으로 여옥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고 해연은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된다. 같은 혁명조직원들이지만 중국공산당이 우선이냐 조선 공산당이 우선이냐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해연은 살아남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전반부에서는 내내 최인훈의 『광장』이 떠올랐고, 후반부에서는 캔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오버랩 되었다. 전반부에는 보들레르, 바쇼, 푸쉬킨 등이 등장하면서 시적인 문체의 아름다움이 읽는 이를 매료시킨다. 후반부는 이정희를 중심으로 혁명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어두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록으로 읽는 이마저 격랑에 휩쓸리는 느낌이다. 내가 다녀왔던 용정의 그 이름 없는 무덤들 중에 이정희의 무덤도, 그녀를 사랑했으나 혁명에 치여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무덤도 함께 있을 것만 같다.  

* 어디서 눈동냥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가가 꼭 붙이고 싶어한 제목이 있었다고 했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 인지 <사랑하라, 희망없이>인지 그것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보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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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5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5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8-2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너무 좋아요.
밤은 노래한다, 이런 내용이었군요.
전 읽어보지 못한 김연수의 소설이라 넙죽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09-08-25 10:2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저도 김연수의 소설은 처음이었어요. 문체도 아름답고 흡인력도 있고,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게되고 조선족에 대해 다시생각할 기회가 되었어요.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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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열네 살 때 수도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7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치고 신경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시계공장에서 실습을 하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 거래 견습공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46년, 69세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작품이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지만 헤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가 짧은 시간 몸담았던 수도원에서의 방황과 고통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서 헤세는 한스 기벤라트라는 아름답고 순수하며 섬세한 소년으로 형상화된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속물적인 내면을 지닌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한스는 아버지는 물론이려니와 학교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마을의 수재다. 한스는 뛰어난 인재들만 골라 뽑는 주 시험에 당당하게 2등으로 합격하여 아버지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고 모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한다.

포룸,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등 그 이름만으로도 로마나 그리스의 환영이 되살아나올 것만 같은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에서 한스는 헬라스 방을 배정받아 유별난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중에서도 한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이올린과 시에 능했지만, 선생들로부터는 '불만에 가득 찬 혁명적인 인물'로 낙인찍힌 헤르만 하일너였다. 예술이 가진 불온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하일너와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한스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원인모를 두통에 시달리며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끝내는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증세는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한스는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아, 나는 피곤합니다/아, 나는 지쳤습니다/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주머니에도 없습니다."라는 라틴어 시구를 주절거리곤 했다. 이 노래를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증세를 정신박약의 불치병으로 받아들인다. 한스는 다른 마을에서 온 엠마에게 사랑을 느끼고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기계공이 되기로 한다. 하지만 곧 엠마의 사랑이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또 대장장이의 푸른 작업복을 입자 그동안 공부를 위해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한스에게는 고민이나 사랑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좋아하던 낚시나 수영, 토끼 기르기, 숲 속의 산책 등을 함께 할 친구도 없었다. 오직 라틴어와 역사, 그리스어와 시험만을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쓰고 찾아온 것은 죽음의 유령이었다. 차가운 달빛이 비치는 가을밤. 한스는 위로자가 이끄는 대로 검푸른 강물위로 떠내려갔다.

아름답고 영민한 한 소년을 이렇게 일찍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누구인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으로부터 멀리 두고, 이성 친구는커녕 교내에서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없이 학업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헤세는 부모의 세속적인 욕망과 국가 교육의 문제,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를 합법적으로 수행하는 교사 등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제도교육의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한 소년을 위한 진혼곡에 다름 아닌 이 책은 1906년 출간되었는데 그로부터 100년도 더 넘게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고등학교의 필독 도서 목록에 버젓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 일 뿐이다.

 

 

 

밑줄 긋기

 

학교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72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軍紀)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72

 

국가나 학교가 해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보다 귀중하고 심오한 젊은이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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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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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권의 시집을 낸 한국 서정시의 적자 문태준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산문 역시 시 만큼이나 서정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책은 ‘느린 마음’ ‘느린 열애’ ‘느린 닿음’ ‘느린 걸음’ 의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런 구성에 맞춰 읽기보다는 어린 시절 그가 보아온 풍경과 가족들의 모습, 또 하나의 가정을 일구고 아내와 아이들을 거두는 중년 사내의 모습 그리고 그가 읽은 많은 책과 불교적 사유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읽었다. 나누어 읽기는 했지만 그 나눔은 수채화 같은 이미지로 그리고 시인이라는 느낌으로 언제나 수렴되곤 했다.

수채화의 주인공은 어린 아이였다가 어느새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차를 끓이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또 어느새 여덟 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일찍 귀가한 날은 우렁 각시처럼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남편이지만 나는 그가 천상 시인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머니 아버지의 ‘얹힐라’ ‘소 받아라’ ‘이제 오느냐’ 등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 말 뒤의 미처 꺼내놓지 못한 어른들의 마음을 읽어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그랬고, 예닐곱 살 아들의 자라나는 모습을 곰살맞게 지켜보면서 말버릇에서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버지의 사랑에서도 또한 그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가웠던 것은 산문에서 그의 시의 단초를 발견할 때였다.

   
  그 언젠가는 소복차림의 동네 아주머니가 아침 식전에 곡을 하는 것을 여러 날 보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그 아주머니는 남편의 무덤 앞에서 길고 긴 곡을 하고서야 내왔습니다. 까마귀떼가 요란하게 구천을 날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식전바람에 곡을 하고 내려갔고, 햇무덤은 누군가 급한 일을 보러가 덩그러니 남겨진 반죽처럼 또 마르고 있었습니다.             
                                                <상여가 지나가는 오전, 부분 >
 
   





햇무덤


까마귀가 한 마리 또 두 마리 울며 날아가
죽은 나무에
나무의 폐에
흉탄처럼 내려앉는

슬픈 九天

여자는 식전바람에 곡을 하고 내려갔네
누군가 치대다 급한 일 보러가
덩그러니 남겨진
반죽처럼

또,
마르는 
햇무덤 

         <시집『그늘의 발달』에 수록> 

 산문의 몇 구절이 말을 아끼고 행을 가르자 그대로 시가 된 경우다. 아니 시가 산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산문보다 시를 먼저 보았다. 누군가 치대다 둔 밀가루 반죽과 햇무덤의 비유가 가슴에 와 닿던 시였다. 시를 먼저 본 탓인지 여전히 시가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산문과 시의 제목이 같은 <아, 24일>도 있다. 또 어릴 때 시인이 그의 부모님께 듣고 자랐던 ‘이제 오느냐’라는 말을 이제 시인이 아버지가 되어 그의 아이들에게 한다. 시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다. 또 시인의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된 시인이 있다. 시인의 말대로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을 하는 풍경이 살뜰하게 드러나는 시다.

이제 오느냐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
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시집과 산문집을 함께 읽는 즐거움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보태어야 할 즐거움은 시인의 불교적 사유와 그가 읽은 책들이다. 시인에게 책은 단지 종이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자연만한 책이 없다고 했듯이 시인이 읽은 종이책뿐만 아니라 자연의 책을 읽는 것을 간접 경험하는 즐거움도 또한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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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27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저 이 책 담아갑니다.
문태준의 첫번째 산문집이라는 것만으로도.^^

반딧불이 2009-07-28 00:19   좋아요 0 | URL
넵! 읽으실 책이 많으신걸로 아는데....천천히 읽으셔용~

라로 2009-07-2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불이님의 뽐뿌질이라니!!!ㅎㅎ

반딧불이 2009-07-28 00:20   좋아요 0 | URL
ㅎㅎ 나비님 자전거 바람이라도 빠지셨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