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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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새벽, 첫차, 첫인상, 첫키스, 첫사랑. ‘첫’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에서는 아련함이 묻어난다. 녹슨 기억을 더듬어야 할 만큼 나이가 든 때문일까, 그래도 여전히 ‘첫’자가 붙은 단어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첫’을 몇 번 발음 해보니 입이 열려 발음이 되는 순간 이미 윗니 안쪽에 혀가 달라붙고 가슴께까지 숨이 막힌다. ‘첫’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이러할진대 오감을 통째로 뒤흔드는 사랑이라는 말과 합해진 첫사랑은 지구 밑을 지나가는 거대한 용암의 뒤틀림처럼 한 인간의 삶에 덮친 황홀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투르게네프 자신이 『첫사랑』은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고, 어머니의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을 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하니 말이다. 『첫사랑』은 나이 마흔이 된 독신남자의 입을 빌린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열여섯 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와 함께 칼루가 관문 근처 별장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별채의 허름한 곁채로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스물한 살의 딸 지나이다와 이사 온다.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지나이다 알렉산더로브나 곁에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 젊은 청년들이 몰려다닌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주인공 역시 이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녀의 곁에 있는 많은 남성들이 그의 경쟁자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나이다는 그들의 열정을 유치하리만큼 즐길 뿐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의 남성들에게 당당하게도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라고 말할 뿐이다. 

자신을 정복할 수 있는 남성의 출현을 기대하는 지나이다는 자신의 곁에 있는 지위, 부, 열정, 권력 등을 상징하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이 자신을 추종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추종자의 일원이면서 이것을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블라디미르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 따른다. 질투에 몸을 떨면서 사랑의 무모함에 휘둘리는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지나이다의 꿈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아버린다. 

물보라가 치는 분수 옆에서 내가 사랑하고 날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은 화려한 옷도 입지 않았고, 보석도 지니고 있지 않고, 아무도 그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날 기다리며 내가 나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갈 겁니다. 내가 그에게 가서 그이와 함께 머물려고 하고, 그이와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바스락 대는 나무 아래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려고 할 때 나를 제지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랑, 그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지나이다의 사랑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지위도 부도 열정도 권력도 아니다. 어린아이 같은 블라디미르는 더더욱 아니다. 그녀의 사랑은 ‘정원의 어둠속으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는 사랑이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버린다. 집안으로 날아든 익명의 편지와 오랜 염탐을 통해 스스로 현장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에게도 지나이다에게도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때로 광적인 발작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고 신중한 아버지가 오히려 더욱 커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지나이다를 사랑하는 블라디미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공작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진 여자가 백작이나 의사 시인 등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의 장래가 파멸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것.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비명을 삼키고 그 상처로 입술을 가져가 천천히 핥는 것 등을 보면서 블라디미르는 사랑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과 헌신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에게 학습된 첫사랑은 평생 동안 그를 지배한다. 첫사랑은 그 ‘첫’이라는 그 발음이 주는 찰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용암처럼 한 사람의 생을 영영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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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2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마디 남기고 싶지만 그냥 추천만,,,ㅎㅎ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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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루비셰프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남자는 하루 10시간 씩 잠을 자면서도 일 년 평균 60여 차례의 공연과 전시를 관람했고, 70권의 학술서적과 단행본 100권 분량의 연구논문, 학술자료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능력의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는 몇 가지 생활 원칙을 세워놓고 철저히 지켰는데,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등이었다. 하루 종일 의무적인 일에 매달려야하고 진종일 시간에 쫓기면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늘 잠이 모자라 머리만 닿으면 눈이 감기는 즐거운 일이라곤 없는 현대인에 비하면 그는 거의 귀족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은 다했다고 한다. 비결이 뭘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시간통계법이었다. 그는 매일 자기가 사용한 시간을 계산하고 월간, 연간 통계를 냈다. 그가 77세 때 낸 통계는 이렇다. “러시아어로 된 서적 50권 읽음-48시간, 영어원서 2권 읽음-5시간, 불어 원서 3권 읽음-24시간, 독어 원서 2권 읽음-29시간, 7편의 논문을 인쇄에 넘김” 어떻게 50권의 책을 48시간 만에 읽을 수가 있나? 나 같으면 글자는 읽지도 않고 50권의 책을 펄렁펄렁 한 장씩 넘기기만 해도 48시간 이상 걸릴 것 같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이 와서 질문하고 답하고 할 때도 시간을 계산하여 적었다고 한다. 시간을 계산하여 적는다고 시간이 붙들어 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나처럼 계산이 느리고 열 번 계산하면 열 번 다 다른 답이 나오는 여자는 계산하는데 낭비하는 시간이 더 걸릴 터이니 차라리 지네 다리에 운동화를 신기고 벗기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일 터이다. 더구나 무계획, 무대뽀, 막무가내, 대충대충, 얼렁뚱땅, 내키는 대로 같은 어휘들과 친한 나는 그가 외계인처럼 느껴진다. 두 달 동안 내 몸에 창궐하는 두드러기 때문에 진득하니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못된 성질은 더 못되어지고 짜증이 늘어가고 토막 난 시간을 어찌 주어 담을 수 없을까 싶어 집어든 책이었는데 책을 읽고 이렇게 막막해 보기도 처음이다. 저자의 말처럼 “천재는 분석될 수 없고 따라서 연구해보았자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천재는 그저 바라보고 감탄하면 되는 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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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네다리에 운동화를 신기고 벗기는 일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라는 말씀에 100% 동감해요~.ㅎㅎ
첫인사부터 드려야하는데,,,^^;;프레이야님의 페이퍼에서 보고 왔어요~.천재는 그저 감탄하면 대상이라는 말씀 역시 공감하구요,,,오늘은 무척 더웠어요,,,장마가 시작이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 들은건지,,,날씨도 오락가락하네요,,

반딧불이 2009-06-21 23: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나비님. 반갑습니다. 첫인사라는게 뭐 따로있나요. 이렇게 뵈면 인사지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하레 2009-09-2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 글 너무 재밋네요.ㅎㅎ
두드러기는 다 가라앉았을지 궁금...

반딧불이 2009-09-28 19: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레님. 제 못된 성정이 다 드러나는 글로 처음 뵙게 되네요. 그래도 재미있으셨다니 참으로 다행이에요. 두드러기는 떠날듯 떠날듯 하면서 미련을 갖고 아직도~ 안가고 있답니다. 혹 하레님께서 얘를 보내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아시면 살짝 일러주세요.(두드러기가 못듣게 속삭임 모드로...ㅎㅎ)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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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나의 첫마디는 “아니 그레고르 잠자는 계속 잠이나 자지 왜 깨어나서 날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나?”였다. 알랭 드 보통도 나한테는 도통 인연이 닿지 않는 그야말로 보통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검색하다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책을 마주쳤는데 그 책의 저자가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니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작가였고 목차를 훑어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알라딘 헌책방에 『동물원에 가기』,『우리는 사랑일까』가 있어 준비해두었었다. 『동물원에 가기』가 옮긴이의 이름이 낯익고 책이 얇아서 먼저 집어 들었다.

아홉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 이 책은 얇다. 처음 한번 읽고 책 뒤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 헌책사길 잘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가 8500원짜리를 3830원에 샀다. 내가 읽으면서 밑줄을 긋기 전에는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비록 3830원에 샀지만 8500원의 값이 궁금해 다시 읽어보았다. 얇은데다가 만화 같은 그림도 중간 중간 끼어있어 가벼워 보이기까지 한다. 책 표지를 홀딱 벗기고 보니 책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인다. 고흐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나도 마시고 러시아의 가루비누인지 자루비노항인지로 가는 뱃바닥에 널브러졌던 압셍트 빛보다 좀 진하고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해서 나를 한숨짓게 하는 딥 블루 빛이다. 책값 때문에 별 얘기가 다 나왔지만 정작 알랭 드 보통이 내게 더 이상 보통이 아니게 된 건 책 표지 때문은 아니다.

내게는 지적 사치 혹은 허영심이 있는 것 같다. 좋게 얘기하자면 지적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굳이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내게는 감각적인 것들을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어왔다. 어디서 학습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로 인해 늘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어왔는데 최근 들어 몸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지적 허영심과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경시경향을 알랭 드 보통은 교묘한 방식으로 건드리고 간다. 그가 <일과 행복>에서 정리해놓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의 의미변화는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마르크스를 이렇게 경쾌하게 인용하는 글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진정성>은 클로이를 만나 저녁을 먹고 키스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에 따른 유혹자의 심정적 층위를 그려놓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지만 과연 그녀는 그의 거짓말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가 아무리 계획을 짜고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을 해도 결국 사랑은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우연에 의해 목표에 이른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노력이 없었더라도 그 우연이 일어났을까는 생각해볼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가 읽은 다양한 영역의 책과 선인들의 말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의 글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면에 있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보여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또 너무나 사소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 앞에 되살려내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감정의 층위들을 낱낱이 해부해 언어화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감각적이면서도 동시에 지적인 글이 매력적이다. 그의 다른 글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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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16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참 좋아해요.
리뷰 잘 읽었어요. 반갑구요.^^

반딧불이 2009-06-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도 보통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저는 늦게 알았지만 보통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참 많은것 같아요.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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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보고 싶은 책과 봐야할 책은 넘쳐나는데 책에 관한 책까지 읽어야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책의 세계, 아니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넓어져 가는 책의 세계를 나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모티머 J.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읽는 방법』, 박민영의 『책 읽는 책』,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책의 제목은 모두 거기서 거기지만 저자들의 이력은 모두 각각이다.  모티머 J.애들러는 철학자이며 사상가이고,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본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평을 듣는 젊은 소설가이다. 진정한 독서가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한다는 말로 나를 반성하게 했던 박민영은 책 만드는 일과 저술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헤세는 이미 우리의 청소년기부터 책꽂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할배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의 이력이 다르듯이 그들이 쓴 책의 내용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 애들러의 책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가 분명해서 요약 정리하기가 쉽다. 독서에 관한 강의 자료를 준비해야한다면 이 한권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게이치로의 책은 그가 소설가이기 때문인지 ‘책읽는 방법’이라는 제목보다 ‘소설 읽는 방법’이라는 제목이 어울릴 만큼 소설 읽는 방법서에 더 가깝다. 박민영의 책은 그가 대상으로 한 독자가 있으므로 미리 독자유형을 살펴보고 읽는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민영의 책은 다른 독서에 관한 책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내용이 알차서 부담스럽지 않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들 세권의 책은 독서에 관해 저자가 맘먹고 쓴 책이지만 헤세의 책은 이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헤르만 헤세는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다. 이 책은 헤세가 쓴 수많은 에세이 중에서 책과 독서에 관한 것만을 골라 편집했다고 한다. 독일 주르캄프 출판사의 편집장을 역임한 폴커 미켈스가  편집을 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편집자의 의도와 편집능력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자의 편집능력 때문인지 헤세의 글을 단숨에 떠내려간 독서에 관한 책처럼 보인다.  책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지만 결론은 책에 머물지 않고 인간으로 향한다.   

 

이십여 년 만에 헤세의 글을 다시 대하는 것 같다. 이십여 년 전의 나는 그의 글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당시의 내게 독서는 그저 해치워버려야 하는 일, 책은 읽어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니 어느 작가의 글맛은 알고 읽었으랴마는 헤세의 글에서 나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사람들이 강권하다시피해서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섬』도 내게는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했다.  나중에 그의 『일상적인 삶』을 읽고 생각을 고쳐먹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에게 깊이 빠져보지 못했다. 그르니에보다 더 심한 헤세는 20여년을 방치해두었던 셈이다. 아니 내가 그를 방치해둔 것이 아니라 헤세가 나를 방치해 두었다는 말이 더 옳다. 그는 폭넓은 감동의 올가미로 나를 포획했지만 옥죄지 않고 열어둔다.

헤세의 글을 읽으면 전혀 반대의 이미지인 레고블록이 떠오른다. 레고블록이 0.2마이크론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것처럼 헤세의 글은 치밀하고 힘이 있다. 또 레고블록이 2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책이라는 물질세계와 독서라는 정신적 행위로까지 폭넓게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헤세의 글은 부드럽지만 뜻이 깊다. 불순한 맛이 끼어들어있지 않은 이 맑은 글은 햇차를 맛보는 느낌이다. 그는 책을 아끼고 쓰다듬으며 사랑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어버려야 할 대상, 해치워버려야 할 일로 여기는 나의 생각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는 저자의 입장에서만 글을 쓰지 않는다. 자신 또한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 또 많은 책을 정리해서 이사를 해야 하는 책의 주인으로써,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문단의 선배로써, 문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맑고 깨끗하게 밝혀 두었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아끼고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래 그가 책속에 만들어둔 세계문학 도서관을 곁눈질 하며 내 책꽂이를 더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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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0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독서의기술도 있군요.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09-06-0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유용하게 쓰여야할텐데....)
 
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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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실험 중 액체질소 폭발로 얼굴을 잃었다. 검붉은 거머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흉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붕대복면을 하고 생활을 한다. 그러나 얼굴을 감추고자 한 붕대복면은 오히려 자신을 더 잘 드러내는 형국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괴물 대하듯 한다. 일상적인 소통도 점점 멀어져 마침내는 가장 가까운 아내조차도 초급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듯 아주 기본적인 말 이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이전과 같은 타인과의 소통이 그리웠고 그 대안으로 가면을 생각하게 된다.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욕망과 치밀한 계획은 성공한다. 가면을 완성한 사내는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확인한 남자는 자기 가면의 완결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면의 얼굴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인인 자기 아내를 유혹한다. 
 

인간에게 얼굴은 어떤 의미일까? 가지고 태어난 맨얼굴 외에 또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변할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이 아베 코보가 『타인의 얼굴』을 쓰게 된 동기가 아닐까 싶다. 이미 『모래의 여자』에서 문명화의 정도는 피부의 청결도에 있다거나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틀림없이 피부에 있을 것이라던 저자의 생각은 『타인의 얼굴』에서 더욱 심화 확장된다.

플라스틱 인공기관에 대한 기사를 보고 찾아간 전문가의 입을 통해 저자는 “얼굴이라는 것은 결국 표정을 말하는 것이고, 표정이라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주는 통로라고”말한다. 결국 가면을 갖는 것은 타인과 연결되는 두 개의 통로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하나의 신체에 두 개의 얼굴. 물론 관리가 잘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면의 얼굴에 아내가 너무나도 쉽게 유혹 당하자 사내는 그만 가면의 얼굴에 심한 질투심을 느끼며 가면의 얼굴과 붕대복면의 분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남자는 가면을 만들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가면을 쓰고 아내를 유혹한 사실 등을 노트에 모두 적어 자신이 정해놓은 장소에 두고 아내를 부른다. 그리고 노트를 읽은 아내와의 화해를 기다린다.

가면, 복면, 탈 등 이름도 용도도 다양한 모든 가면을 통틀어 말할 수 있는 기본 속성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얼굴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얼굴...... 스스로 선택한 표정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선택된 표정”이다. 노트를 읽은 아내의 귀가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시간은 불안하게 두근거린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찾아간 곳에 아내는 없고 대신 아내의 메모가 기다리고 있다.

“가면은 가면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알림으로써 가면을 쓰고 있는 의미도 있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여자의 화장인들 결코 화장임을 숨기려고 들지는 않습니다. 결국 가면이 나빴던 것이 아니고 당신이 가면 다루는 법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아내는 처음부터 그가 가면의 얼굴을 한 남편임을 알아보았고 그런 남편의 행위에까지 연민을 느껴 가면놀이에 동참했지만 부정한 아내로 자신을 몰아가는 남편의 유치한 가면놀이 방식에 화해의 가면놀이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처럼 얼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성형수술로 가공된 얼굴이 부끄럽다기보다는 많은 돈을 들일수록 자랑스럽게 또 당당하게 떠벌릴 수 있는 시대다. 1960년대에 발표된『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와 함께 아베 코보의 실종삼부작이라 불리는 『타인의 얼굴』은 당시보다도 비주얼시대라는 지금의 현실에 더 밀착된 소설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모래의 불모성이 건조함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유동성에 있다는 것을 진단한 저자는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유동성 속에서 얼굴의 의미에 내포된 존재의 위태로움, 타자성 등을 되짚어보게 해준다. 『불타버린 지도』에서 어떻게 그의 사상이 전개될지 몹시 궁금한데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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