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십야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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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에는 <소세키의 다양성>이라는 글이 있다. 고진에 의하면 소세키가 쓰기 시작할 무렵에 일본에는 文이라는 장르가 있었고 마사오카 시키가 제창한 ‘사생문’도 이 ‘文’ 에 속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文’에서 소세키의 소설이 태어나고 다양한 작품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단편소설이라고 알고 읽고 있는 소세키의 단편들은 소설이 아니라 ‘文’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노스롭 프라이의 장르론을 예로 들어 픽션을 소설, 로맨스, 고백, 아나토미로 구분하고 이 모든 장르를 다 쓴 소세키의 글의 다양성에 대해 말한다.

『몽십야』는 소세키의 단편을 묶은 것이다. 8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모두 24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고진의 말에 따른다면 ‘단편소설’이 아니라 ‘문’이라는 글이다. 처음 소세키의 단편을 읽을 때 이것을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이것이 소세키가 소설을 쓰기 위해 메모해 둔 것이거나 다양한 소설의 형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마음』을 읽으면서 고진의 글을 보았으니 그것이 단편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알고 마지막 남은 몇 편의 ‘文’을 읽었다.

<쾨버 선생>, <편지>, <삼산거사>, <쾨버선생의 고별>, <전쟁과 혼란>, <시키의 그림>, <회상>, <이상한 소리>등이 그것이다. ‘文’이라는 형식을 알고 나니 그것을 모르고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읽었을 때의 미심쩍음은 사라졌다. 이것을 어떻게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의 글이 있는 그대로 전해져왔다. 짧게는 한두 쪽 분량밖에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소세키의 일상이나 일상을 대하는 소세키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회상>은 그가 30분 죽음을 경험한 병원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죽음에 대한 소세키의 마음가짐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로서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의 병실 바로 옆에 입원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유일하게 자기만 살아남은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던 듯싶다.

소세키는 <회상>이 ‘평범한 개인의 병상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고풍스러운 멋이 들어가도록 써볼 예정‘이란다. 병상일기는 맞지만 ‘평범한 개인’이라는 말에는 온전히 동의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소세키는 빨리 완성해서 젊은 사람들이나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옛 향기를 맛보게 하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 소세키가 얘기하는 고풍스러운 멋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이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내가 하이쿠와 같은 고풍스런 정취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는 그의 글 속에서 가장 일차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文’과 ‘하이쿠’를 섞어서 쓴 것인데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이긴 하다. ‘文’의 내용에 맞는 하이쿠와 시를 적절히 안배해서 사실의 전달과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30분간의 죽음을 체험하고 나서 소세키는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가 신문지상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안부를 전해오자 세상의 관심이 자신을 병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하고 정신적으로 소생하게 만들었다며 병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의 말이 그냥 하는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따스함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내의 진정한 깨달음이 느껴졌고 그가 외치던 ‘나의 개인주의’가 타자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으로 ‘文’이라는 형식의 소세키 단편도 모두 읽었으니 소세키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 『명암』만이 남았다. 왠지 책장을 넘기기가 싫어서 며칠 째 아직도 다섯 쪽을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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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5-2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웅진에서 나온 <마음>과 함께 실린 <꿈 열흘 밤>으로 단편들을 봤네요. 최근엔 창비세계문학전집 일본편에도 <이상한 소리>가 실려 있어 한 번 더 봤구요.
文을 현대의 갈래로 말하자면 수필이나 교술로 이해하는 게 맞겠죠? 가라타니의 책을 못 봐 짐작만 해봅니다.
보통 일본문학의 주류인 사소설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거리가 꽤 멀다고 하는데 文이라는 갈래를 중간에 놓으면 그의 소설과 사소설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입니다.
고민해 볼 거리네요.

반딧불이 2010-05-24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소세키의 '문'은 수필과 교술과도 다른 것 같아요. 수필이 성찰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내재되어 있고 깊이가 있다면 '문'은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어줍잖은 제 생각이지만 사소설이 소설을 쓰기위한 도구로 일상을 사용 또는 조작하기도 한다면 소세키의 소설은 일상을 있는 그대로 소설로 드러내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네요. 말이 되는 소린지...원.

파고세운닥나무 2010-05-2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도 근대의 작가이니까요. 근대의 문학 갈래론을 들이밀 수 밖에 없는 게 후대를 사는 우리들이라는 생각입니다. 文이라는 일본 고유의 갈래가 있다해도 말이죠. 서정-서사-극(헤겔), 서정-서사-극-교술(조동일) 가운데, 혹은 또 다른 무엇을 취하든 그의 글도 틀거리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찌됐든 그의 단편을 소설로 봅니다. '있는 그대로'라 말씀하셨지만 밀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밀도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죠. 나쓰메는 밀도가 낮아 그 모습이 수필(교술)에 가깝게 보이는 것이구요. <이상한 소리>도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지만 작가의 머리를 떠나 글로 표현되는 것이 곧 창작이겠죠. 그 안에 허구 혹은 꾸밈이 있을테구요.
중언부언해봅니다.

반딧불이 2010-05-26 00:01   좋아요 0 | URL
음...사실 제게는 소설이든 수필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소세키를 읽고 나서 제게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라는 것이 이 장르의 문제에 대한 것인데요. 시, 소설, 수필 뭐 이런것들이 그닥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있어요. 소세키는 문예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제 식으로 바꾸면 문학이구요. 이 문학을 과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하는 것이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해버렸어요. 기존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소세키의 '자기본위''개인주의'같은 나만의 언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해보게 되었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05-26 10:22   좋아요 0 | URL
일본인 특유의 자기 스타일 고집을 말하면 제겐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소통하고, 교류하며 공통점을 찾아내기보단 우리만의, 나만의 것만을 찾아내다보면 결국 고립을 자초하죠. 갈래론을 말씀드린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습니다.
나쓰메가 '자기본위'나 '개인주의'를 말할만한 충분한 작가라 생각하지만 자신의 글이 동서양의 어느 갈래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특유한 것이라 말한다면 난감하죠.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작가들이 대체로 그런 모습이구요. 사소설을 비판적으로 이해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구요. 이론과 연구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반딧불이 2010-05-2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나무'님 글을 읽다보니 저는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일본인이라는 시각보다는 그저 문학인으로서의 소세키에게 더 주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소세키의 '개인주의'니 '자기본위'니 하는 것도 문학을 하려는 사람의 자기고민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읽었던듯 싶습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본받아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소세키가 '개인주의'나 '자기본위'를 내세운것은 '동서양의 어느 갈래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특유한 것'이라 말한다거나 '이론과 연구의 무용함을 주장'하기 위해 고민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스스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고 근대화가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그 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일본인 작가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냉정한 비판이 전제된 후라면 수용해야할 것은 마땅히 수용해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라로 2010-06-0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많이 쓰셨네요~.
찬찬히 밑에서부터 읽어올라와야겠어요~.ㅎㅎ
오늘은 그냥 인사만~~.
잘 지내시죠????

반딧불이 2010-06-04 13:16   좋아요 0 | URL
엉? 나비님 돌아오신거에요? 다시 뵈서 반가워요~
 
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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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는 소세키가 일본 귀족자재들만 다닌다는 학습원에서 한 연설이다. 국가주의를 학습시키는 학습원에서 개인주의를 얘기한다는 건 소세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일년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만 영문학은 고사하고 문학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소세키. 문학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그는 '자기본위'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논리적 뼈대를 삼아 평생동안 자기의 문학론을 펼쳐나갔다.   

아래 글은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를 있는 그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문장의 연결관계를 고려해서 서너개 접속사를 고친것 말고는 모두 소세키의 말 그대로이다. 


대학시절 영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영문학은 제쳐두더라도 제일 먼저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고 유학길에 올랐다. 1 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비로소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방법 외에는 나를 구할 길이 없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입각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니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문예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를 간신히 생각해내어 이 ‘자기본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라든가 철학적인 사색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침으로 주어졌고 이 네 글자로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불안은 사라졌고 어떤 방향에서 분명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게 된 기분이었다.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정리해서 귀국 후 훌륭하게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야했다. 고등학교에도 대학교에도 사립학교에도 나가서 돈벌이를 해야 했고 신경쇠약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시시한 창작품을 잡지에 게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가 기획했던 사업을 중도에서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저술한 『문학론』은 그 기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패의 유해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기형아의 시체일 뿐이었다. 혹은 멋지게 건설되지도 않은 채 지진으로 무너져버린 미완성 시가의 폐허와 같은 것이었다. 저작의 사업은 실패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때 확실히 포착했던 자기 자신이 주인이고, 다른 사람은 손님이라는 신념은 오늘날의 나에게조차 특별한 자신감과 안정감을 부여해 주고 있다.

권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타인의 머리 위에 무리하게 강요할 수 있는 도구이거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이기이다. 금력 역시 개성을 확장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유혹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극히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돈을 유혹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 유혹의 힘으로 타인을 자신의 마음에 들도록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평소에 사람은 자신의 개성이 발전할 수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자신과 딱 들어맞는 직무를 발견하기까지 매진하지 않으면 일생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만큼 개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사회로부터 허락되어 있다면, 타인에 대해서도 그의 개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경향을 존중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정리해보면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려고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에 부수되는 의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자기의 금력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것에 동반되는 책임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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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6-0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시마 유코를 참 좋아합니다. '반딧불이'님이 꼭 읽어보셨으면 해서요^^ 이미 읽으셨는지도 모르겠네요.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데 아버지와는 꽤 다른 소설 세계를 갖는 분이에요.
<불의 산>이란 소설을 읽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다른 소설들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도 아울러 했구요.
일본 여성작가들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 분의 소설을 대하니 꽤 풍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06-04 13:1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읽기는커녕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걸요. 두권으로 나와있네요. 요즈음 목이 말을 안들어서 책을 못보고 있어요. 나아지는대로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6-04 22:08   좋아요 0 | URL
속히 나아지시길 기원합니다.
저도 가끔 목이 아프거든요. 일전엔 목을 돌리면 소리가 계속 나길래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봤는데 괜찮다고 하더군요. 저는 불편한데 말이죠.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과 어깨가 아프더라구요.
건강하세요~
 
나츠메 소세키 문명론
나쓰메 소세키 지음, 황지헌 옮김 / 소명출판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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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강연록을 모았고 2부에는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을 비롯해서 평론 등을 모아 시론(時論)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강연록은 1911년 6월부터 1914년 11월까지의 총 8편을 실었다. 1910년 위장병으로 대량의 토혈을 한 후 다음해 2월까지 병상생활을 한 후이다.

2월에는 문부성의 문학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했고 8월에 관서지방에서 개최된 아사히신문사 주최 강연회에 참석했다. 아사히신문사 주최 강연회였으므로 반드시 소세키가 강연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강연을 할 때마다 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하지만 아카시에서의 <도락과 직업)>, 와카야마에서의 <현대 일본의 개화>, 사카이에서의 <내용과 형식>, 오사카에서의 <문예와 도덕> 등은 강연이 순차적으로 진행될수록 내용상으로 점점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제1고등학교에서의 <모방과 독립>,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의 <무제>, 이 모든 내용들은 학술원 보인회에서 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라는 열매를 위한 밑거름이었다.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의 강연은 공업학교라는 특색을 감안해서인지 기술과 예술을 비교 설명하는 방식인데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고 내용 또한 쉽고 간단하다.

2부의 時論에는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과 수여를 거부한 <박사문제의 전말>, 전쟁과 군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점두록>등 총 11편이 실렸다.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은 그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사히신문 입사의 변>에는 노골적으로 나타나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내 강의가 항상 개가 짖는 것처럼 생각되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내 강의가 형편없었던 것은 거의 반쯤은 이 개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소세키에게 신문사 쪽에서 제의가 왔다. 출근할 필요도 없고 매일 서재에서 용무를 보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생활비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급료를 준다는 것이었다. 다만 교사로서의 돈벌이만 금지했다. 소세키는 신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는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고 한다. 입사의 변에 실린 마지막 말은 죽는 날까지 글쓰기를 계속했던 소세키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은 명예나 영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되어 일한다는 말이 있다. 괴짜와 같은 나를 괴짜에 가장 알맞은 처지에서 일하게 해준 아사히신문을 위해서, 별난 인종으로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은 나의 즐거운 의무일 것이다.”

<박사문제의 전말>은 박사학위를 주겠다는 문부성 국장이 보내온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소세키의 답장이 실려 있는데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박사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은 <도락과 직업>의 강연 내용 중에도 나온다. “여러분들은 박사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사정과 인간과 관련된 일체의 일을 포함하여 천지우주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완전히 그와 반대여서 불구 중에서도 가장 불구적으로 발달한 사람이 바로 박사라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사는 미리 사양해 두는 바입니다.” 강연장에 참석한 사람들을 웃기려고 한 이야기이겠지만 소세키의 생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거기다가 너도 나도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 박사가 아니면 학자가 아닌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게 될 폐해에 대해서 언급해두었다.

 <점두록>은 1916년 1월에 쓴 글이다. “다시 정월이 돌아왔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자신에게 한 해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하늘이 허락하는 한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제1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 표명이다. 소세키는 이번 전쟁이 ‘내면적 배경’ 도 피비린내에 비례하는 정도의 ‘근거’도 없는 ‘천박한 활동사진이나 경박하고 선정적인 소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인도(人道)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신앙을 위한 투쟁’도 아니며 ‘의미 있는 문명을 위한 충돌’로도 평가하기 어려우며 단지 ‘군국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평론가는 니체, 헤겔, 비스마르크 등을 들먹이며 이번 전쟁의 배후에 사상가나 학자들의 이론이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고 싶어 하지만, 헤겔 같은 순수 철학자를 군인정치가와 연결시키는 것을 못마땅해 하면서 학자들은 그 정도로 실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소세키의 견해다. 현대 일본도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일 뿐이고, 사상 또한 사상일 뿐 상호간에 어떤 이해도 교섭도 없다고 단언한다. 소세키는 군국주의, 애국주의를 제창했던 트라이치케와 비스마르크의 관계조차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한다. 전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그가 <점두록>의 마지막에 한 말은 새겨 읽어야 할 듯싶다. “트라이치케는 독일이 전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정복하기까지 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를 관철하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인류가 모두 독일에 정복당했을 때, 우리들은 그 보답으로서 독일로부터 과연 무엇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독일과 트라이치케는 우선 이 점부터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일 대신 일본으로 바꿔 읽어도 소세키의 질문은 유효할까?

『문명론』은 강연록에 8편, 시론에 11편의 글이 실려 있고, 『나의 개인주의』에는 소세키의 간사이 지방 강연 4편과 ‘문학론 서’, ‘점두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요코하마 시립대학 명예교수 이즈 도시히코의 ‘소세키의 자기본위’라는 해제와 더 읽어야할 자료들을 덧붙여 두었다. 『문명론』은 하드카버에 8쪽 분량의 사진과 소세키 연보까지 합쳐 381쪽 분량이고 『나의 개인주의』는 문고판으로 사진 없이 234쪽이다. 『문명론』에서 오탈자가 12개 나왔고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못 봤다. 전작읽기가 아니었으면 나는 『나의 개인주의』만을 읽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두 권을 다 읽어야했다. 책세상 문고판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문학론 서', '나의 개인주의', '현대 일본의 개화', '내용과 형식', '문예와 도덕', '점두록'의 순으로 실려있다. 강연한 날짜 순으로 실었으면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어떤 경로로 완결에 이르는지 이해하기가 훨씬 편했을 것이다. '나의 개인주의'를 먼저 읽고 다른 것을 읽으면 마치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내용상 다른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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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키의 모든 책을 찾아 읽으시는군요. 앞으로 따문따문 읽어볼 예정인데 반딧불이님의 리뷰가 좋은 안내가 되겠네요^^

반딧불이 2010-05-16 23:02   좋아요 0 | URL
이제 제일 두꺼운 <명암> 한권 남았습니다.헉헉...

후와님 쓰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보니 뭐 2년에 걸쳐 읽은 저보다 더 나으시던걸요. 번역본에 따라 좀 차이가 있는듯 하니 그것만 참고하시면 좋으실듯 해요. 따문따문 읽으시고 느낌을 교환할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유리문 안에서 - 나쓰메 소세키 최후의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의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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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세키가 죽기 전해인 191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역시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연재 1회 분량씩의 짤막한 글이 총 39편 실려 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을 적은 듯 문장은 담백하고 편안하지만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가 묻어난다. 소세키는 1910년 인사불성의 위독 상태인 이른바 ‘슈젠지 대환’을 경험했고, 1914년 위궤양이 재발하여 한 달 동안 투병했다. 1915년 신년 연하장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썼다고 하는데, 소세키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개와 고양이, 어릴 적 살았던 마을, 할머니로 알고 있었던 생모에 대한 기억이 안타깝다. 또 고립되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 그동안 맺어온 인연들을 돌이켜 보는 소세키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했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믿지도 않는 신을 상정한 그의 기도는 간절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하신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나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밝고 맑은 직감을 주시어 나를 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시켜 주기를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민한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와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만나는 행복을 내려 주기를 기도한다.”

어쩐 일인지 나는 소세키의 이 기도가 상처받은 자의 자기 연민이 아니라 그렇게도 인간을 연구했지만 여전히 더 알고 싶은 것이 남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 한 인물들을 창조해 낼 때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고뇌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 콧잔등이 맵다.

“나는 지금까지 남의 일과 자신의 일을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썼었다. 남의 일을 쓸 때는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썼다.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비교적 자유스러운 공기 속에서 호흡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자신이 가진 모든 속기(俗氣)를 남김없이 벗어던질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만큼의 자만심은 없었다 치더라도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그예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 루소의 참회, 오피움이터의 참회, 그런 것들은 아무리 더듬어 가 보아도 참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서술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하물며 내가 여기 쓴 것은 참회가 아니다. 내 죄는 - 만일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다면- 지나치게 밝은 쪽에서만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소세키는 거짓으로 세상을 우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자신의 속된 기운을 작품으로 깨끗이 씻어버리려 한 모양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비록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은 쓰지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참된 사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필은 소설과 달라서 읽는 그대로 가슴에 와 얹힌다. 소세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을 읽으니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줄지어 걸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많은 주인공들 산시로, 다이스케, 소스케, 이치로, 선생님, 겐조, 그리고 이름 없는 ‘나’가 내 마음속에 돌올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랑스런 인물들을 창조해냈지만 여전히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인간을 다 그리지 못한 것만 같은 나쓰메 소세키. 누구나 안아줄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안길 수 없었던 소세키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이런 나는 여전히 헤픈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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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헤픈여자는 그런게 아닐꺼예요.. 반딧불이님. ^^
그런게 헤픈여자면 좀 헤프면 또 어떨까요?


진실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사람, 마음을 다해 세상을 살아보려 하는 이의 외로움과 고통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싶은 반딧불이님의 저 깊숙한 마음이 글 곳곳에 드러나 저 또한 울컥합니다.

길지 않은 글 속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되어요. 봄 바람이 좋은 아침이예요..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7-10 19:29   좋아요 0 | URL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소세키를 보면서 참 외로웠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어요. 덧없는 순간이지만 누군가 그에게 이 세상이 참 따뜻한 곳이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해요.

참으로 오랫만에 바람도 맑고 햇살도 따스한 날입니다. 현대인들님 가슴에 이 햇살, 이 바람 담뿍 담기시길...

blanca 2010-05-0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더 천한 부분, 더 나쁜 부분, 더 체면을 잃어버릴 만한 자신의 결점을 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그 모습이 더 숭고하고 고결해 보입니다. 작가는 그러한 것이군요.

반딧불이 2010-05-03 00:01   좋아요 0 | URL
작품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소세키의 껍질을 한겹 벗긴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작품속에서 늘 거짓된 것, 꾸민 것을 싫어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냈는데 그게 바로 소세키 자신의 모습이었나봐요.

그리고 작가이기 이전에 외로운 인간이었다는 느낌이 마음을 짠하게 하더라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5-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 나쓰메의 글들을 읽을 때 도움이 될 여러 얘기들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딧불이'님의 감상도 마음에 다가오구요.
저도 찬찬히 그의 소설을 읽어봤으면 좋았을텐데요. 헐레벌떡 읽어왔다는 생각을 더러 합니다.

반딧불이 2010-05-03 18:1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읽을수록 애정이 가서 이러다 소세키 빠~가 되는건 아닌가..염려도 되었었는데 닥나무님의 즐거운 딴지(?) 덕분에 저도 좀 더 공부할 기회가 되었어요. 저도 감사드립니다.

2010-05-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리 2010-05-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야 반디님 서재를 찾아와서,추천도장 꾹 찍고 갑니다.
쌤의 따뜻한 열정 덕에 소세키를 읽어가는 시간들이 더 즐거워요. 늘 감사드리는 거, 아시죠?(전..퍼렁이여요ㅎㅎ)

반딧불이 2010-05-07 00:56   좋아요 0 | URL
유리님께서 소세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셨는걸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행복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저 역시 감사드려요. 퍼렁쌤~

프레이야 2010-05-10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딧불이님의 소세키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한 느낌이에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반딧불이 2010-05-10 10:4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요즈음은 영화 리뷰전문가 같으셔요. 가끔은 저를 위해 문학관리뷰와 책 리뷰도 올려주셔요.
100년후를 기대하고 작품을 썼던 소세키가 기운빠져 있으니까 마음이 짠 하더라구요.
 
길 위의 생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이레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道草(みちくさ)』이고 『한눈팔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번역자의 말에 의하면 道草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라고 한다. 책 내용으로 보자면 후자가 더 어울리는 제목 같다. 어떤 의미로 제목을 붙였든 이 소설은 소세키가 완성한 최후의 소설이며 유일한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자전적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적 두 번 씩 버려졌던 일이나 친가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양가와 친가가 소세키를 사이에 두고 돈을 주고받은 사실들은 이미 고모리 요이치가 쓴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에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소세키가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을 당시를 배경으로 주변 인물들과 아내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세계적인 공황도 문제였겠지만 소세키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소세키가 다달이 얼마간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아내는 고집이 세고 히스테리를 심하게 앓는다. 소세키에게는 딸 다섯 아들 둘이 있었지만 이 책은 셋째 딸의 출산시기가 배경이니 아직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다. 아들을 기다렸는지 셋째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그렇게 같은 것만 낳아서 어떻게 할 셈이냐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아내를 힐난’한다.

아이들도 산적한 일에 방해만 되는 존재일 뿐 각별한 정이 없었던 듯싶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이 남았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세키는 제법 잘 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소세키를 마중 나온 딸은 ‘좀 더 멋진 사람일줄 알았다’며 옆 사람에게 소곤거렸다고 한다. 딸이 아버지에게 실망한 것처럼 아버지도 예뻤던 딸의 모습이 변해 있어서 실망한다. 둘째 딸에 대해서는 ‘턱이 짧고 눈이 큰 그 애는 푸른 바다 거북이가 둔갑이라도 한 듯한 모양’이라고 표현하며 ‘셋째 딸만 예쁘게 자라주리라는 기대는 아무리 욕심 많은 부모의 눈이라 할지라도 바라기 어려웠다’고 썼다.

천식을 앓는 누이, 병약한 형, 커다랗게 열린 동공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아내, 호시탐탐 돈을 뜯어 가려는 양부모, 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역시 도움을 원하는 장인. 소세키 주변인물들은 모두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세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세키는 제 지갑에 여유돈이라고는 없으면서도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의 피를 빨 수 없어 제 피를 빠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열거하다보니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을 하며 별 걱정 없이 생활이 가능했던 <그 후>의 다이스케 같은 인물은 소세키의 희망사항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소세키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늘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가졌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동안 읽어왔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소세키 소설들이 모두 사건다운 사건하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솔직히 소설적 재미는 없다. 대신 소세키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다. 책을 다 읽고 나 후 옮긴이의 글에서‘완성된 최후의 소설’이라는 말을 봤다. 어느새 소세키의 소설을 다 읽었단 말인가,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는 학생들에게 소세키의 작품을 추천할 때 우선 <산시로>를 권하고 “나이 들면 <길 위의 생>을 읽으십시오.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지금 읽으십시오.”라고 꼭 주를 단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읽어온 것이 소세키의 작품이었다면 <길 위의 생>은 소세키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작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던 듯싶은데 이 책은 그런 작가에 대한 환상을 깨고 생활인 소세키를 정면으로 맞대면하게 해주었다. 환상은 깨졌지만 애착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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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2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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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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