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杉謙信―越後の龍、戰國に飛翔する (新·歷史群像シリ-ズ 16) (單行本)
學習硏究社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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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쇼, 쇼와 시대(정확히 말하면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 최고의 통속 소설가였던 기쿠치 간은, 생전에 "일본무장담日本武將譚"이란 책에서, 일본의 전국시대(1467~1590)에서 가장 출중한 장수로 두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여기에는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니,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급을 아무리 붙여놔도 이 두 사람과 전투에서 맞붙으면 여지없이 격파당할 것"이라고 대못을 박고 있다. 실제로 조각조각 갈라진 일본 통일에 나서고, 통일을 이루고, 다시 재통일한 세 사람 위에다 "최강의 두 장수"를 놓은 것이다. 

그 한 사람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에 소재로 등장하였고, 2006년 NHK 드라마 "풍림화산"에 주역으로 등장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이 책의 주인공인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다.("풍림화산" 드라마에서는 가수 각트가 켄신을 연기했었다) 이 두 사람은 따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듀오로 묶이는 경우가 더 많다. 

● '호랑이'로 묘사되는 신겐과 용으로 묘사되는 켄신. 

● '지지 않는' 신겐과 '호쾌하게 이기는' 켄신. 

● '겉과 속이 다른' 신겐과 '의인' 켄신. 

● '부동명왕' 숭배자 신겐과 '비사문천'의 화신을 자칭한 켄신. 

● 손자병법의 애독자 신겐과 '중국시선唐詩選'을 전쟁터에서 읽은 켄신. 

이런 식으로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라이벌'이랄까? 하지만 십 수년간 대립하고 싸웠는데도,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끝난 승부라서 일본인들이 더욱 높이 평가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두 무장이 수싸움에서 벗어나 서로의 꼬리를 물고 피 터지게 싸운 단 한 차례의 결전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제 4차) 전투가 '근대의 섬멸전을 300년 전에 보는 듯한' 대단히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였다는 점(양군 동원병력 3만 2천명 대비 약 83%인 2만 4천명이 전투개시 6시간 만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함) 또 막대한 물자와 인원을 때려부은 이 결전에서도 두 사람의 정치적, 군사적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전설'을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3대 결전으로 불리는 진신任申의 난,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도바鳥羽 후시미伏見 전투에서는 패배자 쪽이 동원병력 대비 10% 정도인 2~3천명의 전사자를 낸 것만으로도 승부가 갈렸다. 거기에다 승자는 당당히 일본의 지배자로 등극했던 것이다. 

'무승부'와 '치열하기 짝이 없는 한 번의 결전'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평판이 높았다. 그런 이미지를 훗날 일본을 재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앞장서서 교범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일본 전국에 '신겐, 켄신' 붐이 일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열심히 배우고 모방한 다케다 신겐은 지위에 맞지 않게 소박하고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이에야스만큼은 아니라도 특출난 영웅성 내지 개성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풍림화산' 깃발과, 지금은 허구가 많이 섞인 것으로 판명된 '다케다의 붉은 기마군단' 같은 것들은 신겐 자신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주들 가운데 특급의 역량을 가진 건 확실해 보이지만, '오만한 독재자이자 두드러진 천재'였던 오다 노부나가나 '밑바닥에서 출세한 인간심리 조종의 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개성은 좀 부족했다. 

반면, 켄신은 분명 두드러진 개성의 사람이었다. 켄신과 자주 엮이는 신겐은 라이벌의 개성에 의해 반사적으로 개성을 획득하게 된 면도 있을 것이다. 켄신은 흔히 '의인' '난세의 성장聖將' 같은 말로 칭송받곤 한다. 낯간지러운 수사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행동논리가 독특한 것이었던 건 사실이다. 

"인의仁義".  

유교규범이 조선에서 전해지기 전이었던 당시에 이 단어는 절의 스님들이나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사어死語였다. 물론 그 의미를 알면서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당시의 시대를 지배한 논리는 흔히 '거취의 논리'로 불리던, 형편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현실주의였고, "인의" 같은 단어는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나 쓰는 단어였다. 

켄신은 15년 간의 스님 생활을 거쳐 속세로 환속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과는 어느 정도 다른 가치관이 자리잡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가치관을 현실에 이입시키는 것은 그만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켄신은 분명히 능력적으로 혜택받은 사람이었다. 

한 가지 짚어둘 점은, 켄신이 생각하는 '인의'는 현대의 보편적인 윤리기준이나 인륜과는 달랐다. 이 점은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그는 몰락하는 기성권위와 실력자들의 하극상에 치이는 귀족들에게는 분명 '의인'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민중의 히어로는 절대 아니었다. 

켄신은 언제나 스스로를 불교계의 수호 사천왕 중 하나인 비사문천의 현신이라고 생각했다. 악귀들로부터 불교의 법을 지켜내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을 숭배하고 그와 일체화되려고 했던 켄신은 난세에서 유린당하는 기성질서를 수호하는 '파사현정破邪現正'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 '파사현정'의 수단은 직접적 무력개입,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과 싸움으로 '인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 사람의 특징이다. 만화책이나 슈퍼히어로물, 또는 게임에서 그런 싸움은 모순 없이 해피엔딩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리 모든 여건이 좋더라도 '정의'와 '싸움'이 엮이면 모순이 안 엮이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켄신이 갖춘 여건은 '부유한 영지의 경제력'. '실질적인 힘도 없는 기성권위에게서 받은 대의명분', '전쟁의 신'으로 불리던 타고난 전투 지휘관의 능력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는 물과 기름과 같은 모순을 넘어 정의로운 전쟁의 상을 만들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최소한 현대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켄신의 '정의로운 전쟁'은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켄신의 영지였던 에치고(越後, 지금의 니이가타 지방, 소설 "설국"의 무대)는 원래부터 특산품 교역으로 부유한 땅이었다. 거기에다 켄신의 시대에는 조선에서 수입된 금광기술 '흡취법'을 이용한 금광 채굴의 활성화로 노다지가 쏟아지는 '대금광시대', 호경기의 절정을 맞고 있었다. 켄신의 일평생동안 마구마구 파내도 그 후 50년간(1620년 후반에 폐광) 금줄이 마르지 않았다는 이 '아사히朝日 산 금광'의 전설이 켄신에게 무제한적인 전쟁 수행의 자유를 주었다. 켄신이 동시에 두 방향, 심할 때는 네 방향으로 적대영주와의 싸움을 벌여도 움츠러들지 않는 물질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금괴를 쏟아부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켄신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무력개입으로 만든 전선에서 불모의 일진일퇴를 계속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이 간토의 호오죠 씨나, 고슈의 다케다 신겐과 같은 막강한 세력이었다는 것이 분명한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거기에 '영토 욕심은 없다'고 천명한 스스로가 자신이 점령한 영토에 옛 지배자들을 복권시키거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직접지배를 지양했던 것은 무수한 뒤통수를 맞는 원인이었고, 이것이 배신자를 응징하기 위한 보복전, 즉 배신자에 대한 철저한 물적, 인적인 파괴와 약탈로 이어졌다. 강자에 맞서 약자를 구한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전쟁도 이렇게 되자  애매한 모순을 각지에서 노출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수렁에 빠진 켄신을 구원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 통일'을 위해 맹렬한 팽창주의를 계속하던 오다 노부나가라는 공공의 적이 등장함에 따라 그의 발목을 잡던 여러 세력들이 단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겐이 죽고 없는 그 당시에서 '전쟁의 신' 켄신은 노부나가를 쓰러트릴 역할을 기성권위(특히 노부나가에게 멸망한 무로마치 막부의 잔여 세력)와 여러 영주들에게 기대받았다.   

이렇게 노부나가와의 대결구도가 고조되던 1574년부터 1577년에 이르기까지 켄신은 한 곳의 전선에 초점을 맞추고 점령지에 직속 부하들과 백성들을 이주시켜 직접지배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영토를 확대, 3년만에 영토를 2배로 불렸다. 이전 25년간 수십 번의 사투를 벌여 얻은 땅이 손톱만했던 데 비교하면, 정의의 입장에서는 어찌됐든 물적으로는 엄청난 성과였다. 

그리고 1577년, 가가(지금의 카나자와 현) 테도리 강手取川 전투에서 노부나가 휘하의 용장 시바타 가쓰이에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1천 500명의 목을 벰으로써 노부나가 세력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노부나가의 일본 동북부 지방의 대외팽창을 2년간 정체하게 만든 이 켄신의 생애 마지막 싸움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한 신겐과 켄신'이란 이미지를 후세에 확립시켰던 것이다.  

서두에 쓴 기쿠치 칸의 '전국 최강론'은 이런 전설에 기인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일본에서, 특히 설국 니이가타 지방에서 위인으로 찬양받는 건, 그가 의인이어서 그렇다기 보단,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뼈대에, '의인으로 살고 싶어한' 개성이 덤으로 붙어서 신화화 된 것이 아닐까. 그가 갖고 있던 모순이 없지 않은 정의론을 극복할 만큼 그의 무용담이 화려했기 때문에 그는 위인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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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2-0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다,도쿠가와,도요토미도 중요하지만 다케다나 우에스키도 빼놓으면 섭섭하지요.한참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전국물이 유행할 때 다케다 신겐의 전기소설이 번역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트레인지러브 2011-02-07 18:45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일본 전국물이 유행할 때 나온 다케다 신겐의 전기라..
제가 다케다 신겐 관련해서 처음으로 본 책(한글판)은 1부는 다케다 신겐, 2부는 오다 노부나가를 주인공으로 한 "야망패자"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아마 노이에님께서 아시는 그 소설과는 다른 책으로 압니다(98년 초판이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그 책에 빠져서 신겐의 팬이 되는 사람이 많았는데 몇년 후 그 책 쓴 작가가 일본 우익 세력에게 포섭되어서 반한발언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상품성이 떨어져서인지 요즘은 울나라에선 재판도 안 되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8 16:32   좋아요 0 | URL
대하소설이지요.전국물이 분량이 많지요. 음...그 우익 세력에게 포섭된 작가가 누굴까요...

스트레인지러브 2011-02-08 19:45   좋아요 0 | URL
"이자와 모토히코"라고, "역설의 일본사" 라는 책을 지은 작가입니다.
처음에는 일본사에 대해서 참신한 해석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2004년(?)부터 이시하라 신타로와 김완섭 같은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반한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당시 새역모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네요. 아, 그리고 "야망패자"는 "무사"로 이름 바꿔서 2005년 재판되었다는군요;; 이건 제가 착각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8 20:57   좋아요 0 | URL
아...그 양반...<역설의 일본사>는 저도 갖고 있습니다.새역모 세미나에 참석한 모습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작가로서는 상당히 재능이 있는 편입니다.야망과 패자는 양억관 씨 번역이군요.양 씨가 일본 관련 책을 많이 번역하는 편이지요.

새역모는 자기들이 만든 교과서 채택률이 영 시원찮으니까 2년 전 자기네들끼리 분열해 버렸습니다.이자와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스트레인지러브 2011-02-09 11:03   좋아요 0 | URL
이자와는 우익 세력에 가담한 이후로 입지가 줄어든 것 같더라구요.

2006년 도쿄 근처의 후나바시 시립 도서관에서는 새역모에 가담한 이자와에게 배신감을 느낀 사서가 이자와의 책을 모아 도서목록에서 제외시키고 세절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외에도, 방송국 출연도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노이에자이트 2011-02-09 17:43   좋아요 0 | URL
여하튼 작가건 교수건 너무 앞장서서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간 좀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인지러브 2011-02-09 18:3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