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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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형님은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끝마친 지금도 역시 쿨쿨 자고 있습니다. 나는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쓰기 시작하여, 우연하게도 형님이 자고 있을 때 글을 마치는 나를 묘하게 생각합니다. 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참에서 영원이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

 
   
 

『행인』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이 마지막 단락을 읽은 건 지난 4월 13일 새벽 3시 4분이었다. 그리고 울었다. 주인공 이치로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까진 무릎처럼 아직까지도 마음이 쓰라리다. 양은냄비 풀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날씨는 입안을 껄끄럽게 했고 천안함 소식들은 쓰라림을 보태주었다. 이 계절 내내 듣고 있는 베토벤의 소나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제 오늘 아파트 주변과 양재천에는 벚꽃이 절정이다. 내가 평생 먹어도 남을 분량의 팝콘 이 튀겨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포라로이드 카메라와 디카를 가지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개나리 벚꽃 흐드러진 도로를 배경으로 현상되어 나오는 내 얼굴이 마음과 달리 화사하기까지 하다. 내 마음을 배반하는 내 얼굴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스스로를 배반한다고 수상히 여긴 건 내가 아니라 이치로였고 소세키였건만, 그의 불안한 영혼이 내게 건너오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소세키는 내게 눈물을 선물했고, 그동안 잘 유지되어왔던 작가와 독자의 객관적 거리는 무너져 내렸다. 슬픔이 찾아왔다고 해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법.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을 여미기 위해 선무당 푸닥거리 같은 이 글을 적는다. 혹시라도 소세키가 백 대 후의 독자로 예감한 사람 중의 하나에 나도 끼어들 수 있다면 그의 불안과 우울을 위해 이 글을 소지 올리는 심정으로 적는다. 
 

소세키의 소설 중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첫 작품이다. 그동안 보아온 책들은 제목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내용을 대변하는 것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친절한 설명이 붙어있었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등은 그냥 책의 내용인지 제목인지 달리 구별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서로 묻어가는 제목이다. <그 후>는 연재 예고문에서 도쿄대학생이던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을 쓴 것이기에 <그 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문>은 소세키가 아무 제목이나 정해보라고 하자 모리다 소헤이와 고미야 도요다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아무데나 펼쳐보고 눈에 띄는 문이라는 단어를 골랐다고 했다. <피안 지날 때까지>는 설날에 시작해서 피안(일본에서는 춘분, 또는 추분 절기의 전후 7일간을 피안이라 칭함)지날 때까지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지어진 그간의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행인』은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다. ‘행인’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가는 사람’, 혹은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치로에게 꼭 맞는 제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로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지나가는 사람, 즉 행인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모두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결국은 혼자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나 또한 너에게 행인일 뿐인 것이다.

『행인』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치로의 동생 지로가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지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녀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듯이 이야기 한다. 오카다와 오카네, 오사다와 사노, 미사와와 미친 여자,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맹인 여자 그리고 형으로부터 형수와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 남녀가 관계 맺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서로 간에 적당히 절충하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결혼을 했지만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와 엉뚱한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살다 죽은 여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형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뛰어난 학자이지만 불안증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과는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특히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자기 아내와도 소통이 안 되고 결국은 아내를 의심하게까지 된다.

그는 인간의 불안은 ‘앞서 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불안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맥박이 뛰는 불안이다. 그의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헤맨다. 그는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게 떠돌아다니는 탓에 무엇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립다. 그의 불안을 잠재울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 나이가 되도록 학문만을 한 탓에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기교는 배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게 되지만 아내는 때릴수록 얌전해져서 자신의 인격의 타락만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는 죽거나, 미치광이가 되거나, 종교를 갖거나 해야 할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이치로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까?

소세키는 이치로라는 이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놓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이치로는 연구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지의 칼날위에 서있지만 감성의 그네를 탈 줄 모른다. 그는 타인에게 다가갈 때에도 가슴으로 가다가지 못하고 머리로 다가간다.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고 교양을 연마하였지만 그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소세키가 그리는 반성하지 않는 근대의 전형적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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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늘 로베르브레송의 '무셰트' 라는 영화를 특별상영했는데 가정과 사회 모두에게서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14살 소녀 무셰트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영화였어요. 모두들 서로를 착취하고 차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지극히 행인일 뿐이었던 그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죽음을 택했어요.<이치로는 어느쪽이었을까요?-저도 궁금해지네요..>

반딧불이님께 눈물을 선사한 소세키, 그의 언어와 이야기들과 함께 한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으신 지금의 사진 속 모습에서, 마음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셨네요. 그리고 아직도 그 슬픔 속 여운이 가라앉아 계신듯 글에서 느껴집니다.

반딧불이 2010-04-19 01:05   좋아요 0 | URL
요즈음 같은 날은 영화든 책이든 작가가 주인공을 죽이는 건 보고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행인>에서 자기 마음에 갇힌 남자를 만들어 꼼짝 못하게 해놓고는 다음 작품인 <마음>에서는 결국 소세키도 주인공을 죽이지요.

이 리뷰로 푸닥거리를 해서인지 조금 낳아졌어요. 현대인들님. 사진은 정말 제가 생각해도 아이러니였어요. 벚꽃 탓이었다고...그냥 꽃을 탓해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늘 밋밋한 제목을 달던 나쓰메가 이 소설엔 꽤 의미있는 제목을 단 것 같습니다. 나쓰메는 왜 늘 밋밋한 제목을 달았을까요? 고양이의 마음(<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을 猫心이라잖아요? 이걸 학자의 자세라고도 하던데, 늘 주의 깊게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두는 나쓰메의 태도가 제목마저도 밋밋함을 갖게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0 00:00   좋아요 0 | URL
사람과도 세계와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또 소세키 개인의 문제로 보면 그가 어릴적 양자로 왔다갔다하면서 제대로 이름을 갖지 못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지금까지의 소설들이 세계(근대)와 자아의 대립구도였다면 <행인>은 인간 내면의 문제를 그리는 쪽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만약 소세키가 이치로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하신대로 갈등의 위치가 좀 옮겨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일본인들에게 정전의 위치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급하신대로 일본의 문화가 이 소설 속에도 충분히 담기니까요.
일본의 국민소설로 <행인>을 읽는 게 우리에겐 덜 부담스러울 듯 합니다. <마음>보다는요. 물론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반딧불이 2010-04-2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소세키를 일본의 국민작가로 명명하면서 <마음>을 정전으로 든다면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주인공 '나'에게 초점을 둔다면 그건 분명히 과거와의 단절이잖아요. 어쩌면 소세키는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 모두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일수도 있을거란 생각을 해봐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0 13:1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단절을 단절로 보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일본인들이 하니까요. 그게 문제일 터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