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기 위하여
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주인공 나는 방학 중 가마쿠라 해변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난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며 선생님과 꽤 친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선생님은 나에게 두툼한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을 한다. 선생님의 유서에는 자서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외아들인 선생님은 스무 살 무렵 장티푸스로 거의 동시에 부모님을 잃는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맡아 관리하던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한 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하는 등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병이 낫는다.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친구 K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고, 주인집 따님과 삼각관계에 빠진다. K가 따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선생님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따님을 달라고 하고, 주인아주머니는 며칠 후 그 사실을 K에게 알린다. 사실을 알고 난 이틀 후 K는 자살 한다. 이후 선생님은 따님과 결혼 하여 살고 있지만 아내는 K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친구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혼자 시달리며 자식이 없는 것도 천벌이라 여기는 선생님은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마음>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아버지, 선생님, 친구 K, 노기대장, 천황, 아내의 어머니 등. 육체의 병으로 인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정신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한 자살이 있다. 유한한 존재로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는 데서 죽음은 일률적인 반면 각각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차별적이다. 특히 자살의 경우.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이다.

노기대장, K, 선생님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다. 천황의 군인으로서 반란군에게 깃발을 빼앗긴 노기대장. 일본인의 무사도 정신에 따르면 이러한 불충은 할복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기대장은 세이난(1878년 메이지 10년) 전쟁이후 35년 동안 죽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천황이 서거하자 따라 죽는다. 그에게는 칼로 배를 찌르는 한 순간보다 지난 35년간의 세월이 훨씬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할복보다도 더 잔인한 형벌을 스스로 치루고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기대장에게 있어서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다.

선생님은 친구 K를 자신의 하숙집으로 불러들여 물질적으로 심정적으로 돌봐주고 있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그 따님의 도움으로 K는 안정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숙집 따님을 사이에 두고 K와 선생님은 삼각관계에 빠진다. K로부터 따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 선생님은 K 몰래 주인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하고 아주머니는 그 사실을 K에게 전한다. 소식을 들은 이틀 후 K는 자살한다. 선생님은 K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삶을 살아간다. K의 자살은 사랑의 실패 때문일까? 선생님의 배신 때문일까? 사랑의 실패나 친구의 배신은 선생님만 알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K는 본가와 양가로부터 의절 당하고 곤궁한 생활을 선생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육체를 채찍질함으로써 영혼이 빛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외부적 요인들은 오히려 그를 정신 지향적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K가 자살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자라는 존재. 통제되지 않는 세속적 욕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유서의 마지막에 남은 먹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하는 의미의 글귀다. ‘더 빨리’라는 말이 선생님과 따님의 관계를 알게 된 이틀 보다는 훨씬 더 일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K는 자신의 정신을 배신하는 몸과 마음에게 진 자신을 구차하게 여겨 스스로 단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또 일본인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고 여기는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선생님은 K가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또 빼앗길 수 없다는 강박과 그것을 지키겠다는 욕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불러온 결과는 참담했다. 소중한 것을 지켜냈다는 안도감보다 K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던 작은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사회에 나아가지도 않고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K에 대한 속죄감으로 살고 있다가 천황의 서거소식과 노기대장의 순사 소식을 듣는다. 선생님은 메이지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메이지의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메이지 정신’에 순사하겠다고 결심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메이지 정신’은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메이지 정신’을 ‘메이지 10년대에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메이지 20년대에 정비되고 확립되어 가는 근대 국가체제 안에서 배제되어 있던 다양한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메이지 20년의 정신이 메이지 10년대의 정신과는 이질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고유의 메이지 정신이 변질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메이지 정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살을 할 만큼 선생님은 목적 지향적 인간도 사회적 인간도 아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후기 메이지 정신이 초기 메이지정신을 배반하는 것에 강한 혐오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만 나의 추측일 뿐 ‘메이지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소세키만이 알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인간은 다분히 이성적일 수 있지만 자살을 실행하는 되는 순간은 또 다분히 감정적이기도 하다. 노기대장의 순사소식을 들었을 때 선생님은 그가 죽은 이유는 납득이 잘 안되지만 자살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살아온 날에 대해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선생님은 노기대장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다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변질 되어가는 메이지 정신을 지켜보는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했을 것이다.

세 사람의 죽음은 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노기대장의 순사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고, K의 자살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단죄의 의미가 강하며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의 자살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배신을 지켜볼 수 없다는 자의적 결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마음』은 처음 주인공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 부분은 선생님의 유서로 끝난다. 편지로 남겨진 유서가 이 소설에서는 워낙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주인공 ‘나’는 자연스레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잊혀 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무의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세키는‘나’의 육체적 아버지는 그 근원에 맞게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처리했다. 또 정신적 아버지라 할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아버지를 잃게 만든 소세키의 의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또 한가지 기억해두어야할 것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과연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육체도 정신도 아닌 바로 마음이라는 것.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능하면 다른 이론서들은 참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다 읽고 난 후에 내 나름대로 선행자들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읽으면서 끝내 이론서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그리고 『그 후』를 번역한 윤상인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이었다. 고진의 글은 설득력있고 치밀했지만 동의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소세키가 ‘『마음』이라는 비극적인 작품에서 과거를 강렬히 환기시킴으로 거기서 이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러운 발언은 내 의견과 같은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윤상인의 글은 고진의 글보다 성글다는 느낌이 강했고 언어의 표피적 의미에만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책이 제목에 어울리게 문학과 근대와 일본에 대한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두고두고 참고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음>의  다른 판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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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4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4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4-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읽고 반딧불이님의 리뷰로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마음>이 <그후>보다 더 단순하고 완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소세키가 더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21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소세키 책 중 가장 리뷰를 쓰기가 어려웠어요. 여러가지 이야기거리가 많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역시 '죽음'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긴 글 읽으시느라 애쓰셨네요.

바밤바 2010-04-2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소설의 등장인물을 보며 숨기고팠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때가 있답니다.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에 나오는 나비처럼 세상의 파도에 허우적대고 있는 근자인데 소세키는 이미 그러한 삶을 겪고 글로 남겼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반딧불이 2010-04-24 19:14   좋아요 0 | URL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하는 건가요?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지는 않으셔야할텐데요.
'나의 소년 시절은'으로 시작해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는 '길'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어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타니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도 잠깐 나쓰메를 언급하죠. '고백'의 양식을 말하며 당시 작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나쓰메를 꽤 호의적으로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 <언어와 비극>도 꼭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윤상인 교수의 책을 호의적으로 봤는데요.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었구요. 나쓰메를 비판적으로 읽는 연구자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04-25 21:31   좋아요 0 | URL
근대문학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소세키이고보니 고진의 책에서 여러차례 언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어와 비극>에서는 '소세키의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소세키의 글의 다양한 양식을 다루었습니다. 소세키를 보는 고진의 관점은 새로웠지만 '선생님'이 자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다가 K의 등장으로 알게된다는 부분은 잘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그 후>의 공로병 이야기가 나와서 꼼꼼하게 확인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용한 부분과 제가 읽은 책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보다 더 치밀한 근거로 주장이 뒷받침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들은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