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나쓰메 소세키 지음, 최재철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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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문』과 함께 소세키 초기 삼부작으로 불리는『산시로』는 1908년 아사히신문에 연재 되었다.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의 문학기자로 옮긴 다음해다. 1904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명료하게 이름이 등장하고 그것이 책의 제목이 된 경우는 『산시로』가 처음이다.

산시로는 구마모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과생으로 진학한다. 그는 일본의 최남단 규슈의 후쿠야마에서 기차를 타고 혼슈의 도쿄로 간다. 기차에서 만난 여자와 나고야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되는 23세의 오가와 산시로. 한 모기장 속에서 잠을 자게 되지만 깔려있는 시트를 둘둘 말아 여자와 자기 사이에 흰 경계선을 만들고 수건 두 장을 깔고 반듯하게 잠을 잔다. 다음날 산시로는 여자로부터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이라는 말을 듣는다.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은 도쿄에 처음 도착해서 전차의 땡땡 울리는 소리,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 큰 빌딩이 줄지어선 모습, 어딜 가나 목재가 방치되고 돌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도쿄의 대단한 활력에 놀라고 불안해하면서도 그는 차츰 도시 생활에 적응해 간다. 고향의 연고로 알게 된 이과대학원생 물리학자 노노미야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 같은 강의를 듣는 돈키호테형 청년 요지로, 세속을 초월한 듯 아무런 욕망이 없는 ‘위대한 어둠’이라는 별명의 히로타 선생, 아름다운 신여성 미네코, 실물크기의 미네코 그림을 그리게 되는 화가 하라구치 등이 산시로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내 연못에서 처음 만난 미네코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산시로는 그녀를 마음에 두게 된다. 마음을 온통 그녀에게 빼앗기고 있지만 산시로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는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이다. 결국 그는 미네코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는커녕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흔히 『산시로』를 풋풋한 사랑소설, 청춘 교양소설이라고 부른다. 어느 곳에 중점을 두느냐의 문제겠지만, 둘 다 옳고 또 둘 다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랑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사랑고백은커녕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는 산시로의 담백한 사랑 때문에 답답함을 너머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일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직 생기기 전이었나 회의하면서 나는 이 답답함을 그동안 보고 읽은 영화적, 문학적 사랑에 내가 너무 오염된 탓을 했다. 하지만 소세키가 산시로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미네코는 교육받은 여성이고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 명의의 소액당좌예금통장을 가지고 있다. 당시는 호주인 남자가 생활비를 책임지고 여자로부터 가사활동이나 육아를 제공받고, 성적 욕망을 충족 하던 시기였다. 남자가 여자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권력구도 속에서 미네코는 경제적 주체로 등장하는 예외적 여성인 셈이다. 미네코에 비하면 산시로는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교육비와 하숙비를 송금 받고 있다. 학문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지 못한 상태이다. 산시로뿐만 아니라 『산시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정신은 살아있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모두 독신자이거나 미혼이다.

『산시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랑이야기뿐만이 아니다. 도쿄와 지방도시와의 현격한 발달의 차이, 대학의 강사나 연구원인 노노미야의 잦은 이사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당시의 경제 상황, 요지로와 히로타 선생의 입을 통해서 전하는 문학과 사회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 등. 근대문학의 갖가지 요소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 자체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것으로 2007년 9월 21일 발행 수정판 2쇄다. 수정판이라는 말을 적어놓지나 말던가. 수정까지 거쳤는데도 내 눈에는 오자가 모래알처럼 박힌다. 18-19쪽에는 오탈자 3개가 몰려있다. 종이 질은 좋은지 모르겠으나 스탠드 밑에 어떤 각도로 놓아도 반사가 되어 눈이 너무 피로 했다. 주석을 책 뒤편에 모아두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45번 주석은 똑같은 번호가 세 번이나 나온다. 내 독서량이 극히 미약한 탓인지 이런 주석처리는 아직 보질 못했다. 출판 관계자분, 오자를 직접 찾기 불편하시거든 언제든 연락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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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3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주신 글이어서.. ^^
일본 영화 중에 '좋아해' 라는 영화가 있는데 알고 계실 수도 있겠다 싶어요. 반딧불이님. 그 영화에 등장하는 두 남녀는 약 15년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수끼다.. 일본어로 '좋아해' 라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는 걸로 영화가 끝나는데 정말 한편의 수채화 같이 아름답거든요. 산시로의 담백한 사랑 처럼 답답함을 너머 화가 날만도 한데 저는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게 본 영화로 남아서 글을 읽어가며 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언급하신 소설처럼 그렇게 사회상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건강하셨지요?!...반딧불이님.
날도 많이 푸근해졌습니다. ^^

반딧불이 2010-01-31 22:51   좋아요 0 | URL
그간 평안하셨는지 저도 궁금했습니다만 안부를 여쭙지도 못했네요. 새해 첫날부터 이상하게 들락거릴 일이 많아서 잠시 소원했어요. 날짜를 보니 꼬박 한달만에 리뷰를 올리는 거네요. 영화는 아직 못봤는데 현대인들님이 주신 정보가 있으니 화가 나진 않을거에요. 꼭 챙겨 볼께요. 건강하세요.

라로 2010-02-0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출판 관계자분, 오자를 직접 찾기 불편하시거든 언제든 연락하시기 바란다."라니!!
저도 종합편 기대할께요,,,,님 덕분에 소세키에 대해 조금 알게 되어 기뻐요,,,하지만 아직 읽을 엄두는 안나고 님의 리뷰나 앞으로의 종합편으로,,,^^;;;;

근데 요즘 많이 바쁘세요???

반딧불이 2010-02-05 00:12   좋아요 0 | URL
나비님~ <도련님> 읽어보세요. 금방 반하실거에요~
바쁘자고 작정하고 바쁜건 아니구요. 이상하게 새해 첫날부터 나가게 되더니 바깥일이 너무 많아요. 이렇게는 살수 없다!!! 제발 설날까지만이다.. 혼자 빌고 혼자 다짐하고있답니다.

바밤바 2010-02-2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글 정말 잘 쓰시는 듯^^

반딧불이 2010-02-22 16:19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을....저도 바밤바님의 글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류에 들고자 길을 떠난 근대의 청년으로 <산시로>를 읽었는데요. 물론 여성을 찾아 떠난 길이기도 하구요. 그런 면에서 모리 오가이의 <청년>속의 고이즈미 준이치와 매우 비슷하죠. 소설도 물론 비슷하구요. 실제 <청년>속엔 나쓰메를 닮은 강연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연구자들은 그가 나쓰메라고 하죠.
'반딧불이'님의 나쓰메 소세키 서평을 죽 읽으며 가졌던 생각을 좀 써 볼게요. 중세적 교양 혹은 감정과 힘겹게 싸우는 나쓰메의 주인공들이 그걸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 섰을 때 묘하게도 천황, 아버지, 선생님 같은 인물들에 다시 등을 기대죠. 애국주의 혹은 순결주의에 시선을 빼앗기는 그들을 보며 전 불편함을 가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쓰메가 근대에 대해 갖는 생각의 안일함을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나쓰메가 좋은 작가란 건 인정하지만 그가 식민주의와 천황의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묻자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네요.

반딧불이 2010-04-07 16:51   좋아요 0 | URL
파고세운닥나무님. 우선 반갑습니다.
문학작품은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소세키 읽기가 끝나면 당대의 작품들을 찾아볼까 해요.

사실 저는 아버지, 선생님, 천황이 근대의 일본인들에게나 소세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몹시 궁금해요. <마음>의 리뷰를 쓸 때 생각을 보태볼 작정이에요. 그런데 '나무'님과는 좀 다른 생각이 드는군요. 나무님께서는 '근대적 주체로 섰을 때 묘하게도 천황, 아버지, 선생님 같은 인물들에 다시 등을 기'댄다고 하셨는데 저는 어느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도련님>에서는 늙은 하녀 하나가 있을 뿐 고아나 마찬가지죠. <산시로>에는 어머니만 있을 뿐 아예 아버지는 등장도 하지 않아요. <그 후>에서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덕목을 거스르는 인물로 나오구요. <마음>에서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병으로, 정신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선생님은 자살을 하죠.

소세키 작품의 어떤 주인공의 어떤 점을 애국주의, 순결주의로 빠지는 걸로 보셨는지....
사실 저는 소세키의 정치적 입장이 어떠한지가 몹시 궁금해요. 다만 <만한 이곳저곳>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배가 아프다는 말이 제국주의로 뻗어가는 자국에 대한 불편한 소세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짐작해보고 있을 뿐이에요.

이론서나 비평을 가능하면 아직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저 나름대로의 생각을 모아보고 나중에 참고하려구요. '나무'님의 댓글 덕분에 이것저것 생각해볼 거리가 생겼네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8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마음>을 놓고 얘기해 볼게요. 선생의 죽음이 일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건 우선 노기대장과의 관련성이겠죠. 노기대장의 죽음을 순사라 일컫는 선생은 곧 죽음을 결심하잖아요. 노기대장과 선생은 메이지 신민으로서의 일치감을 갖는거죠. 두 자살을 우선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 역시 곧 죽음을 맞는데, 천황과 노기대장을 언급하며 ‘뒤를 따르’니 ‘면목이 없’니란 말을 되뇌죠. 세 죽음의 모습이 모두 다르지만 그 안엔 국가란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세 죽음을 그리는 작가의 태도 속에 비판적 거리를 저는 찾지 못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긍정하지도 않구요. 그건 나쓰메답지 않으니까요. 이것을 애국주의로 해석하는 게 무리일까요? 순결주의는 세 죽음의 이유가 친구에 대한 배신, 천황에 대한 배신, 결국은 국가에 대한 배신 때문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구요. <그 후>의 다이스케가 국가에 별무관심인 듯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어요. “문학자도 공로병(恐露病)에 걸려있는 동안에는 아직 멀었다. 일단 일러전쟁을 경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애국주의-전쟁의 현장에선 제국주의가 되겠죠-가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요?
나쓰메의 소설을 꼭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누구나 심리소설로 읽을 까닭도 없을테구요. 그리고 정치적 언설이 아니더라도 그의 정치 의식, 사회 의식이 소설 속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챙겨보는 게 적어도 식민 경험을 지닌 우리가 갖는 일종의 책임 아닐까 합니다.
나쓰메를 꼼꼼하게 읽고 계시는 ‘반딧불이’님을 만난 반가움을 이런식으로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못 본 나쓰메의 여러 구석들을 ‘반딧불이’님이 꼼꼼이 보고 계셔서 리뷰를 고맙게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4-09 23:08   좋아요 0 | URL
닥나무님께서 말씀 하신 애국주의와 순결주의가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인지 이제 이해되었어요.
<마음>은 거의 죽음의 향연이라고 해야할 만큼 죽음이 많이 나오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선생님은 죽음은 노기대장과 천황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있고 그리고 K의 죽음은 도와도 관련이 있구요. 이것은 말씀처럼 애국주의나 순결주의로 보시는 것이 마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러한 죽음들이 남아있는 주인공 '나'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더 관심있어요. 그러니까 쇼군이나 천황에게 죽음(할복)으로 충성을 확인하던 사람들 세대가 모조리 죽게되는 이 상황이 과연 남아있는 주인공에게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이제는 번, 막부, 천황 등의 공통항으로 묶이던 끈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생각해보는거죠.

<그후>의 다이스케가 하는 말은 러시아문학을 좋아해서 없는 돈으로 신간서적을 사 나르는 친구에게 한 말이죠. 그대로 옮겨보면 "그가 러시안 문학에 너무나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다이스케가 문학가라도 공로병에 걸려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일단 러일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야기가 안된다고 비꼬아준 적 있었다." 저는 이말을 서양문물(외국문학포함)을 무조건 좋은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닥나무님 말씀처럼 소설을 꼭 정치적 사회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소세키를 읽다보니 저는 궁금해서 아니 답답해서 못견디겠어요. 소세키가 평생 다섯번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더구나 최고교육을 받은자로서, 거기다 신문사에 있었잖아요. 이런 사람이 정말 교묘하게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것(피안지날때가지 읽었습니다)이 신기할 정도에요.

'반가움을 이런식으로 해서 죄송합니다'<==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게 나쓰메의 모호함이라 생각됩니다. '과거와의 단절'이라 하셨지만 그것 역시 모호하죠. 그리고 그 뒤로 나쓰메와 그의 주인공들은 숨어버리구요. 그걸 '일본적'이라 일본인들이 말하며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리뷰에 강상중의 책들이 있던데요, 그의 책을 보며 아쉬웠던 건 그 역시 여느 일본인과 같이 나쓰메를 읽고 있어서에요. 전공인 정치학이 어찌 나쓰메를 만나면 쑥 들어가고 그저 작가와 인물의 심리만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천황에 관해서도 그래요. 자이니치의 부당한 현실을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천황에 관해 나쓰메가 선명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는데도 강상중은 정치학을 말할 때는 자이니치의 비참함을 얘기하지만 나쓰메에게선 또 제쳐두니까요. 그런 면에서 자이니치 서경식은 다르죠. 나쓰메에 대해선 일절 언급을 하지 않거든요. 모호함 뒤에 숨은 정치적 시선을 서경식은 아는듯 해요. 그것을 일본적이라 말하는 일본인들의 음흉함도 못마땅해하는 것 같구요.
나쓰메의 정치적 언설에는 그의 정치관이 좀 더 또렷이 드러납니다. 그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덜 드러냈을 뿐이지 없지는 않았죠. 없다고 믿고 싶은 사람-여기에 일본인들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비극인듯 합니다-들이 많으니 언제부턴가 안 보이는 거겠죠. 늘 그게 아쉬워 이리 긴 댓글을 달아보았습니다. 나쓰메에 대한 다른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반딧불이 2010-04-10 16:58   좋아요 0 | URL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견지했던 것은 근대에 대한 소세키의 입장과 그것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자국에 대한 그러니까 일본의 제국주의에 관한 소세키의 입장은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어요. 후기작으로 갈수록 그러한 면이 궁금해졌던 것이구요. 말씀처럼 '일본적'이라 말하면 달리 할 말이 없는듯 싶습니다.

강상중의 책은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가 글을 쓴 목적이 자이니치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소세키의 작품만에 국한했지만 말씀하신 정치적 언설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여쭙도록 할께요. 도와주실거지요? 닥나무님께서 다른 리뷰를 기다린다고 하시니 갑자기 리뷰 쓰는 일이 부담스러워지는군요. 어쨌거나 성의껏 댓글을 달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0 21:4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근대'를 밑절미 삼아 나쓰메를 읽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와 민족을 만드는 데 그가 한 역할에 관심이 많구요. 누구 말마따나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면 그러한 상상을 하는 데 있어 나쓰메가 소설로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강상중에게 과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전의 양식을 띠는 글속에 자이니치의 현실을 뉘엿뉘엿 말하지만 작가와 주인공이 부닥친 현실을 밑둥에서부터 정치하게 보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적어도 그가 우리 사회에 일본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자이니치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갖는다면 말이죠.
제가 리뷰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부담을 드리는 말도, 입에 발린 말도 아니구요. 저도 배우는 처지라 잘 알지 못하지만 서로 같고 다름을 알아가는 가운데 배웠으면 합니다.
 
풀베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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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길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풀베개』의 시작 부분이다. 화가인 화자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시와 그림, 즉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 산을 올라가다가 비를 만난 화자는 비를 피해 들어간 찻집에서 주인 노파로부터 가까운 온천장에 시집을 갔다가 돌아온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인해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다니던 은행이 망해버리자 남자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그림 도구를 들고 여행을 온 남자는 온천장으로 찾아들고 주인공 나미를 만난다. 나미는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나미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미의 주변 인물들을 알게 된다. 주변 인물 이래봐야 골동품을 수집하는 그녀의 아버지, 그림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달마의 족자를 걸어놓고 잘 됐다고 득의양양해하는 관해사의 주지, 입대를 앞두고 있는 나미의 사촌 동생 규이치가 전부다. 화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관 주변의 절과 연못 등을 둘러보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단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이야기는 나미의 조카 규이치를 요시다의 정거장까지 마중하는 것으로 끝난다.

『풀베개』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기차역에서 끝을 맺는다. 이 독특한 구성 속에 소세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론을 담았다. 산길을 올라가 그가 머물렀던 곳은 예술의 세계이고 규이치가 전쟁에 나가기 위해 몸을 실은 기차역은 문명의 세계이다. 산속에서 그가 대하는 모든 사물들은 섬뜩하리만큼 아름답지만 문명의 대표주자인 기차에 대한 그의 묘사는 자못 비판적이다. “풀로써 베개를 삼는다.”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의 예술론은 문명과 충돌하고 개조하려는 의지보다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문명과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가는 “네모난 세계에서 상식이라고 부르는 한 모퉁이를 마멸하고 세모꼴 속에 사는”사람이다. 또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한 사람이다. 그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 예술가가 왜 소중한 사람인지 단지 정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그의 글은 자신의 이런 정의를 보여주듯이 동백, 목련, 모과, 차, 모든 감정을 다 담고 있는 인간의 얼굴 등에 대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듯하다.  

개미대가리 만한 글자들을 모아서 그가 만들어 내는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십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기차를 꼽은 그가 현대 문명의 위험에 대해서도 토로하지만 무지개로 옷감을 짠 듯한 그의 아름다운 글 앞에서 그것은 뜨거운 물에 죽어 떠오르는 해파리 같다.  그가 펼치는 예술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성’이다. ‘개성’은 그의 작품 전편에 떠오르겠지만 남은 작품들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지켜 볼 문제다. 
 

 

 

* 책속에는 일본의 고유어들이 많이 나온다.  책 뒷편에 '주'로 모아 두었는데 책 읽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읽다가 의미가 통하지 않아 찾아보다보면 감동과 의미의 맥이 툭툭 끊어지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혹 관계자들께서 보시면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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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07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딸아이가 자원봉사를 도서관에서 했어요.데리러 갔다가 책들을 둘러보는데
소세끼의 책들이 많은거에요~. 님 생각하며 소세끼의 책을 하나 고르려고 보다가
'몽십야'라는 책의 두께에 기죽어서 당분간 반딧불이님이 올려주시는 글로 만족하기로 했다는~.^^;;;
저도 님의 글을 읽지 못해서 섭섭했다우~.^^;;;
보고 싶었어요~.헤헤헤
뒤늦게나마 부비부비~.^^

반딧불이 2010-01-07 11:50   좋아요 0 | URL
나비님. 몽십야는 소세키의 단편을 모두 모아놓은 책이에요. 이책은 소세키의 책을 좀 읽어보시고 난 후에 읽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어요. <도련님>은 부담없이 아주 재미있게 보실 수 있으실거에요. <마음>도 저는 아주 재미있게 보았어요. 언제나 귀여우신 나비님. 새해에도 변함없이 많은 분들께 사랑받는 나비님이시기 바래요.
 
도련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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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1906년 도 작품인 『도련님』은 한 청년의 사회생활 입문기이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하녀인 기요의 보살핌으로 자란 도련님은 좌충우돌 막무가내로 아니꼬운 꼴을 못보고 입에 발린 소리 못하고 보이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도련님은 시골 촌구석의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에 수학교사로 부임한다. 도련님이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학교선생들과 학생, 그리고 하숙집 주인이 전부다. 하지만 그곳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교묘한 언술로 사람들을 이간질 하는 사람, 쥐꼬리만 한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사람, 언제나 당하기만 하는 사람 등등이 다 모여 있다. 도련님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각각의 별명을 붙여준다. 교장은 너구리, 교감은 빨간 셔츠, 영어는 끝물 호박, 수학은 거센 바람, 미술은 떠버리 등. 도련님에게는 사람들의 원래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련님은 오직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르고 꼭 그 이름만큼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런 틈새에서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귀 얇고 성질 급한 도련님의 하루하루는 순탄치 못하다. 오직 그가 의지하는 것은 성품이 대쪽 같다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주는 기요뿐이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에 일본의 작은 마을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강산이 열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또 그만큼 소세키의 인물창조가 성공적이라는 얘기도 되겠다.

소세키는 그의 직업이 교사였던 경험 때문인지 유난히 교사의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많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바람직한 행동을 하거나 본받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상은 어떤 것일까? 소세키는 바람직한 교사상을 내세워 독자를 계몽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도 교사이기 이전에 욕망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사의 입을 빌려 얘기하는 교육정신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여전히 실천이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는 『도련님』은 못된 인간들을 혼내준다는 내용을 기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 권선징악을 내용으로 하는 고대소설의 변형 같은 이 소설은 가볍게 읽힌다. 그래서 소세키식 유머(?)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놓치기 쉽다. 내가 『도련님』에서 관심 있었던 부분은 물고기를 낚고 난 후의 도련님의 태도다. 물고기를 잡은 손이 미끄덩거리자 비위가 뒤틀렸다거나, 바닷물로 박박 씻고 난 후에도 가시지 않는 비린내에서 정내미가 뚝 떨어져 다시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그는 흔들리는 배에 벌러덩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감상하는 일이 낚시보다 훨씬 더 좋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도 비슷하게 언급된다.

무슨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자기도 쥐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스스로를 해군 제독에 비유하면서 쥐가 출현할 온갖 가능성을 타진하고 섬멸작전까지 세우지만 결국 쥐 두 마리의 동시출현에 혼쭐이 나 끝내 쥐잡기를 포기한 고양이. 이것은 소세키의 성정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고 제국주의의 발을 내딛기 시작할 무렵 소세키는 이런 일본의 국민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뉘앙스가 작품 곳곳에 배어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쥐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까지 읽은 소세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들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들은 그가 가진 불교적 세계관, 소세키에 있어서의 명명행위, 소세키식 유머 등이다. 다음 작품들에서도 이와 같은 단초들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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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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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3세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부제가 말해주듯이 책 속의 여자들은 책을 읽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신분이나 연령대는 참으로 다양하고 책을 읽는 장소, 자세, 옷차림까지 볼거리도 넉넉하다.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은 여자이지 책은 아니다. 저자는 다양한 신분과 연령을 넘어 그녀들 곁에 있는 책이 당대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림속의 여자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화려한 드레스로 성장을 한 아름다운 여자, 곧 아이가 나올 것만 같은 만삭의 여자, 들고 있는 책의 행만큼이나 주름이 많은 노파에까지 이른다. 책을 읽는 장소 역시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숲속의 벤치, 소파나 침대 등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서있거나 앉아 있지만, 읽던 책은 떨어뜨리고 한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간 채 몽롱한 시선으로 누워있는 여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발가벗은 채로 책을 읽고 있는 여자들의 그림이다. 오롯하게 자기를 만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발가벗은 모습과 독서를 관련지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발가벗고 하는 일이라곤 섹스와 목욕 이외에는 없는 내게 전라의 모습으로 책을 읽는 여자의 심리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시대에 여자의 손에 들려있던 책은 종교서적이었다. 17,8세기 스웨덴의 루터교회는 그들의 교회 공동체 회원이 되기 위한 자격으로 글을 읽는 능력을 요구했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 했을 때 그녀들은 교리문답에 관한 지식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던 읽기 능력을 세속적인 지식의 섭렵에도 적극 활용하였다. 위생이나 육아정보를 읽고 생활에 활용하여 출산의 고통을 덜기도하고, 문학작품을 통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거나 자아인식,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회의 등 권위에 대해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책 읽는 사람은 위험하다’가 아니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말은 정치가, 독재자, 지배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들을 겨냥한 말이다. 말 속에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적대의식과 독서는 남자의 전유물이라는 지적 우월감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다. 일군의 계몽주의자들은 독서의 폐해만을 인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가 일치한다. 교육이론가 카를 바우어는 " 책을 읽을 때 생기는 신체 활동 부족은 상상력과 감정이 억지로 뒤바뀌는 것과 결부되어서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래가 들끓고, 가스가 차고, 변비가 생기도록 만들 것이며, 잘 알려진 것처럼 특히 여자의 경우 생식기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간서치를 자처하는 조선의 검서관 이덕무조차도 “언번전기를 탐독해서는 안 된다. 집안일을 내버려두거나 여자가 할 일을 게을리 하며, 더욱이 돈을 주고 빌려 보는 데 빠져서 가산을 기울인 사람도 있다”고 여자의 지나친 책읽기를 경계하였다.

이 책은 책 읽기가 여자에게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림과 함께 보여준다. 책의 역사는 지배자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책의 역사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자의 역사는 언제나 반대편에 있었다. 여자는 책 읽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는 생각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벤의 말을 빌리면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두뇌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이 자극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하다. 고트프리트 벤의 말이 아직도, 얼마만큼이나 유효한지.  그러나 남자들이 여자를 통해 어디를 자극받든지, 예의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드는 유쾌한 고립행위인 독서행위는 여자들에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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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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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일본 근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이름도 갖지 못한 이 고양이로 말할 것 같으면 자칭 “머리로서 활동해야할 천명을 받아 이 사바세계에 출생한 고금에 없는 고양이”다. 게다가 그는 독심술까지 터득하고 있다. 이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쥐를 잡지 않는다. 아니 잡으려고 온갖 작전을 세우고 퇴로를 차단할 궁리를 마쳤지만 오히려 쥐 두 마리의 공격을 받아 혼쭐이 난다.

이런 고양이의 주인은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집에만 돌아오면 늘 서재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면학가 인줄 알지만 그가 서재에서 하는 일 중의 대부분은 침을 흘리며 잠을 자는 일이다. 그는 하이쿠 신체시 바이올린 수채화 등에 관심을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만고지사에 관심은 많아서 “지금 울었던 야옹하는 소리는 감탄사냐 부사냐, 알고 있나?”라고 아내에게 묻기까지 한다. 고양이가 바라보는 주인은 신경성 위염에 시달리는 고집불통, 우유부단, 요령부득인 사람이다. 이런 주인이긴 하지만 늘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자연히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메이테이와 간게쓰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학자임을 자처하는 메이테이는 허풍쟁이에다가 거짓말쟁이다. 그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며 사람들을 골려주는 것이 취미다. 당연히 악의는 없다. 물리학자인 간게쓰는 ‘목매기의 역학’이라는 연설을 하기도 하고 도토리의 스태빌리티를 연구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 광선의 영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 중이다. 개구리 눈알을 뽑아 쓸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요즈음 하는 일은 유리구슬을 깎고 또 깎아 개구리 눈알처럼 만드는 일이다.

주인의 서재에는 수시로 메이테이와 간게쓰가 찾아온다. 더러 다른 사람들이 동참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쓰잘 데 없는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이 쓰잘 데 없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웃음을 준다. 고양이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인간이란 것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굳이 입을 운동시켜 우습지도 않은 것을 웃기도 하고, 재미도 없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는 것밖에 별 재주가 없는 것들”이다. 또 인간이란 동물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발이 네 개가 있는데도 두 개 밖에 사용하지 않으며 나머지 두발은 말린 대구포처럼 하릴없이 드리우고만 있다. 항상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아서 ‘바쁘다 바빠’에게 잡아먹히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소한데 얽매이고 있다. 고양이가 정의하는 인간은 한마디로 ‘오직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고생하는 자’이다.

소세키가 <호토토기스>라는 하이쿠 잡지에 연재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원래 일회분량의 글이었지만 그것이 연재된 후에 인기가 높아져서 계속 연재를 했던 소설이다. 영국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이 글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부터 1년 동안 발표된 이 글은 이제 막 근대가 시작되어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초기 근대인의 모습을 비웃기도 하고, 금전 만능주의,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중학교 교사, 미학자, 박사과정에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엮었지만 그들 각각의 모습은 근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면서 동시에 소세키 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500쪽이 넘는 이 장편소설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 쓰잘데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당대로 시각을 옮겨서 바라보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재미와는 별개로 나는 장편에 익숙하지 못하다. 고양이의 죽음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맥주를 핥아 먹고 항아리에 빠져 죽는 고양이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채 두 살도 안 된 고양이의 입을 빌려 자기 하고 싶은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는 이야기 마무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죽여 버린 것 같아 소세키가 너무 얄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한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는 소세키. 지갑속에 품었던 그를 이제 마음에 품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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