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현아, 대학이 해방구가 될 때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6. 유상운, 탐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7. 소진형, ‘실용적인 학문’의 성립 사정

8. 황민호, 졸업하기 싫은 학교

9. 현수진, 대학 안팎에서의 역사학

10. 유리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강의 노동은 그 대가가 철저히 ‘강의 시간만을 노동 시간으로 계산하여 시급으로 책정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아닌‘ 일들이 따라붙는다. 새로운 강의를 개발해도 개발에 들어간 시간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개발한 강의는 정규직 교수의 것이 되며 강사 배정 역시 정규직 교수의 권한이다. 강사는 강의를 만들고 연구하고 실행하지만 그 강의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수강생들의 과제와 시험 채점도 강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기에 당연히 시급에 산정되지 않는다. 그 외에 학술대회를 열고 장소를대여하고 학회지를 편집하고 논문을 수합하고 심사위 - P104

원을 섭외하는 등 ‘학계‘를 움직이기 위한 수많은 일들또한 노동이 아니었다.
나는 몇 명의 정규직과 수많은 비정규직 및 하청노동자들이 벌처럼 움직여 유지되는 이 대학이 어떤곳인지 새로이 깨달았다. 대학이 매혹적인 공간이라고여겼던 것은 나의 착각이자 짝사랑이었다. 노동자로서다시 마주한 대학은 잔인한 공간이었다.

- 신현아 - P105

실학의 반대에 있다고 여겨지는 성리학에서 가장중요한 학자인 주희(朱熹)도 자신이 하는 성리학이 실학이라고 단언했다. 중국 남송 대에 주희는 문장의 표현이나 형식에 방점을 두는 사장학, 즉 전통적인 관점의 문학으로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이야말로 개인의 윤리와 국가의 통치를 가 - P136

능하게 하는 실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실학과 실용적 학문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실‘ 그리고 ‘실용적‘이라는 말은 그 외연이 넓어져 뉘앙스만 남고 정확한 의미를 간취하기 어려운 단어가 된다. - P137

‘실’, ‘실학’, ‘실용적 학문‘은 동아시아에서 몇백 년동안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학문을 비판하는 정치적 단어였다. 12세기에 주희는 아름다운 문장 쓰기를 정치라고 착각하는 기존의 정치가들을 비판하면서 실학이라는 말을 썼고, 사회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던19세기 지식인들은 변화를 지체시키는 전통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면서 실용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용적 학문은 배우기만 하면 실용성이 생기는것이 아니라, 제도와 조건이 마련되어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 소진형 - P147

이러한 지역 언론의 특성은 대학 교육을 수행하는초석이 된다. 비판적 사고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무장해 끊임없이 취재하고 글로 쓰기 때문이다. 주요언론의 지면은 연예인 가십과 소모적인 정치인 이야기로 채워지기 일쑤고, 지역의 이슈는 쉽게 사장된다. 반면에 지역 신문은 민주주의를 담보한 언론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일상 속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솔루션 저널리즘[5]이다. 지역 신문은 자발적으로 이슈를 발굴해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

[5] 문제 중심 저널리즘이 사회 문제를 폭로, 반복적으로 조명하는 것에 주목하는 반면 솔루션 저널리즘은 동일한 문제가 올바른 대응을 통해해결된 구체적 사례와 그 증거를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써 문제에 책임이있는 집단에게 무언의 압력을 줄 수 있는 준거점을 마련한다. 이규원·이미나, 『솔루션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참고.

- 황민호 - P160

그러나 학계는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공역사(publichistory)라는 개념이 대두되었다. 공공역사 개념은 거칠게 말하자면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공중(公衆)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종류의 역사 생산 및 실천을 의미한다. 학교의 역사 교육과 박물관의 역사 전시, 역사다큐멘터리와 사극, 유튜브의 역사 콘텐츠까지 공공역 - P178

사가 포괄하는 범위는 매우 넓고 다양하다. 공공역사는 학계가 독점하던 역사 지식 및 생산의 독점적 권위를 해체하고 역사의 민주화를 추구한다.

- 현수진 - P179

그보다도 큰 장탄식이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봐도 한 인간의 문장이 아닌 경우다. 어떤 교수님들의원고는 아무리 봐도 거기 적힌 이름보다 많은 사람이쓴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모를 수 없다. 도대체교수님 아닌 누가 그 원고들을 썼단 말인가? 그것은 모른다. 대학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아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이 썼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번역기의일차 생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뭔가를 원고라며넘기는 교수님들도 있다. 이 학부 교재라는 것은 아예별거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걸까? 더 중요한 책은 이렇게 안 하실까? 아니면 이 교수님의 원고는 일괄적으로 다 이런 식인데, 단지 책의 중요도에 따라 교정 - P194

공의 수준이 달라지는 걸까? 여러모로 봤을 때, 적어도교재를 쓰는 일에 있어서는, 이 교수님들이 노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도대체 얼마를 드려야 노고에 합당하다고 여기실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 수있는 것은 많지 않다.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교수님들의 얼굴이 궁금해 꼭 한 번 검색해 본다.(하여튼 스무 교수님들 중 두엇의 얼굴은 꼭 검색해 보게 된다.) - P195

얼마 전 인터넷에서, 실험용 쥐 rat을 ‘랫드‘라고 부르는 과학계의 해괴한 표기법에 대한 이야기를 봤다.[1] ‘랫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나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약간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에는 나도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다. ‘랫드’는 물론 일하다가 종종 마주치는 단어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또한 책의 바깥과 안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정해진 규범을 따르거나 규범을 정해 고치는 것이 우리 교정공의 일이다. 기본적으로 ‘랫드’ 같은 게 나오면 표기법에 맞도록 다 고쳐야 맞는다.


[1] "가장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과학용어 중에 실험용 쥐 rat를 "랫드"라는 해괴한 표기로 쓰는 전통이 있음. 왜 이걸 랫드라고 쓰는지 아무도 모름. 근데 교과서 같은 데도 저렇게 쓴 책 많음. 심지어 국가 법령 같은 데서도 저렇게 씀. 그냥 단체로 이상한 표기인 걸 다 알면서도 그냥 다 같이 틀리는 거임", 곽재식(@JaesikKwak), 2022년 10월 6일, 오후 10:38. Tweet. - P197

자, 사장님은 나를 왼쪽으로 당기고 동료님들은 나를오른쪽으로 당긴다. 원청업체는 앞에서 나를 당기고교수님들은 뒤에서 나를 당긴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아래로 당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위로 당긴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교정지를 양쪽으로 동시에 당기고 싶다. 이것이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당하고 있는 얼차려의 구성이고 가련한 예비-책들이 처한 상황이다. 말 못하는 책들, 그러나 만들어져야만 하는. - P200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나 교정공이란 이를테면 사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정공이 개입할 수있는 지면은 오늘날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는 교정공이 개입할 수 없는 지면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아와 어의 다름도 점차 사라지는 듯, 아와 어가 다르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어와 어가 다르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의 다름도 사라지는 중인 것만 같다. 가끔 우리가 견딜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합쳐졌던 적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으니 이상한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감히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겠니? 말하는 얼굴들을 보면 그야말로 박살이 나 있다. 전에도 이랬던가? 이러지 않았던가? 우리 산산조각의 양상이 과연 바뀌는 것이라면, 산산조각을 대하는 우리의 양상도 분명 바뀌는 것이겠다. 내가 지금 맞게 대하고 있나?
글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살 난 우리 사이에 쌓이고 녹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서로 합쳐지려고 이어지려고 이를 악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틀림없이 그렇다.

- 유리관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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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10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랫드 ㅋㅋㅋ

서곡 2023-03-10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인간의 문장이 아닌 경우 ㅎㅎㅎ

햇살과함께 2023-03-10 22:23   좋아요 1 | URL
교정공의 애환:;; 대학출판사 책이 왜 그렇게 편집이 엉망인지 이해가 되는 글입니다..
 

Ch.14 The Rise of Prussia
Frederick, the First Prussian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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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체험
제1부 형성
3장 성 입문
남자 내민다 던진다
빼앗는다 꺾는다 소유했다 가졌다 먹었다
이사도라 덩컨 <나의 생애>

4장 레즈비언
레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여자가 처한 상황의 복잡성을 반영하기에 훨씬 더 복잡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암컷은 종으로서의 힘을 자기의 개별적인 생활에 통합시키는 대신, 그 개별적 목적과 분리된 이해관계를 가진 종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은 인간 여자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음핵과 질이라는 두 기관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유아 단계에서는 음핵이 여성 에로티시즘의 중심부이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여자아이들의 경우 질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의견이다. 아무튼 질은 부수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음핵 체계는 성년기에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일생 이 에로틱한 자율성을 보존하고 있다. 음핵의 경련은 남자의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거의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일종의 붓기와 가라앉기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성교에 간접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며, 생식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침투되고수태되는것은 질을 통해서다. 질은 남자의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에로틱한 중심부가 되고, 이런 개입은 언제나 일종의 폭행 성질을 띤다. 옛날에 여자가 자기의 어린이세계에서 뿌리 뽑혀 아내로 사는 삶에 던져진 것은 실제 또는 위장된 유괴에 의해서다. 그녀를 소녀에서 여자로 바꾸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처녀성을 ‘빼앗는다‘거나 처녀의 꽃을 ’꺾는다‘거나 하는 말이 있다. 이런 처녀성의 상실은 지속적 발전의 조화로운 결말이 아니라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며, 새로운 시기의 시작이다. 쾌락은 이때 질의 내부 표면이 수축함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수축이 명쾌하고 결정적인 오르가즘으로 이어지는가? - P512

한 주기는 어린 시절의 독립성을 영속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주기는 그녀를 남자와 아이에게 바치는 것이다.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자를 남자와 종에 예속시킨다. - P513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에, 그녀의 무기력은 그 본래의 역할을 심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많은 남자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가 성교를 원하는지 혹은 그저거기에 복종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죽어 있는 여자와도 동침할수 있다. 성교는 남자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 없으며, 자연적 종료도 남자의 충족에 의해서다. 여자가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않아도 수태는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 여자에게 수태는 성적 과정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반대로 종이 여자에게 요구한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서서히, 고통스럽게 임신, 출산, 수유 속에서 실현된다. - P514

결혼의 구조가, 매춘부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로 상호성 없는 관계의 증거다. 여자는 자신을 주고, 남자는 여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취한다. 남자가 열등한 존재들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녀와의 정사는 언제나 허용됐지만, 운전기사나 정원사에게 자기를 내맡기는 부르주아 여자는 사회적으로 지위를 박탈당한다. 그토록 맹렬한 인종주의자인 남부 미국인들은 남북전쟁 이전이나 오늘날이나 변함없이 관습에 의해 흑인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권리를 귀족처럼 위풍당당한 교만함으로 행사한다.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노예시대에는 살해당했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집단폭행을 당할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와 동침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녀를 ‘소유했다‘거나 ‘가졌다‘고 말한다. 역으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가졌다‘고 말하는 대신에 때로 속된 말로 ‘먹었다‘라고 말한다. - P514

남자들의 섹스 용어는 군대 용어에서 착안한 것이다. 연인은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처럼 팽팽하며, 사정할 때는 ‘발사한다‘. 그것은 기관총이며 대포다. 그는 공격이니, 습격이니, 승리니 하는 말을 지껄여 댄다. 그의 성적 흥분에는 알 수 없는 어떤 영웅주의적 취미가 있다. "한 존재에 대한 다른 존재의 점령으로 이루어지는 생식 행위는 한편으론 정복자라는 관념을,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된 물건이라는 관념을 부과한다. 그래서 가장 문명화된 사랑 관계를다룰 때도 사랑의 관념에 전쟁의 관념을 선명하게 투사해서 정복, 공격, 습격, 공방전, 패배, 항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허용하는 이 행위는 오염시키는 쪽에는 일종의 자부심을, 오염당하는 쪽에는 비록 동의했을지라도 다소의 굴욕감을 준다"고 방다는 쓰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신화를 도입시킨다. 즉, 남자가 여자를 더럽힌다는 신화다. - P515

자기를 객체로 만들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수동적 객체인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잠자는 여자도 죽은 여자도 아니다.
??? - P520

발자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서 정신적인 것을 별개로 하고, 여자는 칠현금처럼 그것을 켤 줄 아는 남자에게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 P529

여자가 그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인정하지 않는 커다란 이유는 그 속에서자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표현된다. 남자는 ‘팽팽해지는‘ 반면에 여자는 ‘적신다‘. 단어에는 젖은 침대나 소변을 잘못 보아 야단을 맞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들어 있다. - P529

사실 여성에게 관능의 양상은 남성의 경우와 전혀 같지 않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질의 쾌감이 결정적 오르가슴에 도달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성들의 고백이 흔치 않고, 정확성을 기하려는 경우에도 그녀들은 지극히 모호한 채로 있다. 반응은 개개인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남자에게 성교는 명확한 생물학적 목적인 사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 P542

그리고 대단히 복잡한 수많은 다른 의도를 통해 이 목적이 조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은 결말처럼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욕망의 충족이나 적어도 그것의 소멸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여자에게는 목표가 처음에는 불확실하고, 생리학적이라기보다 심리학적 성격을 띤다. 여자는 일반적으로흥분과 관능적 쾌감을 원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사랑 행위의 어떤 명확한 결론도투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여자에게 성교는 결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을 수반하지 않는다. 남자의 쾌감은 화살처럼 상승하다가 어떤일정한 문턱에 다다르면 완성된다. 그리고 오르가슴 속에서 불시에 죽어 버린다. 성행위의 구조는 완결되고 중단된다. 여성의 쾌락은 생식 체계에 늘 집중된 것이아니라 온 육체에 퍼져 있다. 진정한 오르가슴보다는 오히려 질의 수축이 리듬에맞추어 사라졌다가 다시 형성되고, 때때로 극점에 도달했다가 그다음 헝클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죽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파동 체계를 형성한다. 여성에게는어떤 최종 단계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쾌락이 무한을 겨냥한다. 여성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뚜렷한 만족감보다는 흔히 신경이나 심장의피로 혹은 심리적 포만 상태다. 만족하거나 또한 기진맥진하더라도 여자는 결코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없다. - P543

여성의 유순함은 대단히 애매한 개념이다. 대부분 젊은 처녀는 상상계 속에서반신이나 영웅이나 한 남자의 지배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 나르시시즘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녀는 현실에서 이런 권위의 육체적 표현을 감내할 준비가 전혀되어 있지 않다. 그와 반대로 대개 자기가 숭배하고 존경하는 남자를 거부하고,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 구체적인 행동의 열쇠를 환상에서 찾는 것은오류다. 왜냐하면 환상이란 주체가 환상으로서 만들어 내어 마음속에 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와 흐뭇함이 뒤섞인 상태에서 강간을 꿈꾸는 어린 소녀는 강간당하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견딜 수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 P546

한편, 여자의 성적 역할이 대부분 수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의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인 게 아닌 것처럼, 이런 수동적인 상황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마조히즘적인 것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 주체성의 확립을 유지하면서 애무나 흥분이나 삽입을 자신의 쾌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또한 연인과의 결합을 추구할 수도 있고 그에게 자신을 맡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지,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타인의 의식意識을 통해 자기를 순수한 물체로 만들고, 또 자신에게도 물체로 표상하며 물체인척할 때 마조히즘이 나타난다. "마조히즘은 나의 객체성으로 타자를 매혹하기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나의 객체성에 나 스스로가 매혹되기 위한 시도다." 사드의 쥘리에트 『규방철학 에서 젊은 처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지만,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기 때문에두 사람은 전혀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채털리 부인이나 케이트는 전적으로 자기를 상대방에게 내맡기는 데 동의하고 있으므로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마조히즘을 말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하고, 이 소외된 제2의 자기가 타인의 자유에 의해 확립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 P547

이런 관대함은 남자의 경우에 흔히 그 허영심 때문에 저지되고, 여자의 경우는 수줍음 때문에 저지된다. 여자가 자기에 대한 억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그녀의 관대함은 충분히 발휘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자에게서 성적인 만개가 상당히 늦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여자의 성적 성숙은 서른다섯 살 무렵에 절정에 이른다. 불행하게도 만약 여자가 결혼했다면 그때쯤엔 이미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불감증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녀는 아직 새로운 애인들을 유혹할수 있지만, 곧 시들기 시작한다. 그녀의 앞날은 길지 않다. 많은 여자가 성적 매력을 잃어 갈 즈음에야 겨우 자기의 욕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 P550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자연을 원용한다면, 본래 모든 여자가 동성애자라고 말할수 있다. 레즈비언은 확실히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육체를 좋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사춘기 소녀는 남자의 성기 삽입이나 지배를 두려워하며, 남자의 육체에 대하여 어떤 혐오감을 느낀다. 반면에 여자의 몸은 남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도 욕망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바와같이 남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서 설정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존재로서 설정한다. 다른 남자를 취해야 할 하나의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남자 안에서 그리고 그와 맞물려 자기 안에서 남성적 이상을 해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을객체로 인정하는 여자는 같은 여자들 안에서나 자기 안에서 일종의 먹잇감을 보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 남녀에게 적대감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성애 남녀는 남자가 지배적 주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반 남녀는 자발적으로 레즈비언들을 너그럽게 대한다. 틸리 백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녀들은 내 기분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는 경쟁자들이다.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하고, 나는 부도덕하게도 그녀들에 대해 웃어 버리고 만다." 콜레트도 클로딘과 레지 커플 앞에서 르노가 이와 같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묘사했다. 남자는 공격적이지 않은 동성애 여자보다도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애 여자로 인해 더 짜증을 낸다. 남자의 특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런 이성애 여자뿐이다. 여성 동성애는 양성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형태를 반대하지 않는다. 대개 여성 동성애는 여성성의 인수이지 거부가 아니다. 이미 본 바와같이, 여성 동성애는 흔히 사춘기 소녀들에게 아직 경험할 기회나 대담성이 없는이성애 관계의 모조품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인생의 한 과정이자 수업이며, 가장 열렬하게 동성애에 빠진 여자가 장래 가장 열렬한 아내나 애인이나 어머니가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성애 여자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은 그 선택의 긍정적측면이 아니라 부정적 면이다. 동성애 여자의 특징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데 있는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자만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 - P555

남성적‘인 레즈비언을 ‘남자를 모방하려는 의지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진짜가 아닌 것으로 규정짓는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현 사회가 정의하는 대로 남녀의 범주를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애매함을 초래하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오늘날 남자는 적극적인 것과 중립적인 것, 다시 말해서 남성과 인간을나타내지만,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과 여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인간으로 행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와 동일시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적·정치적·지적 활동이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욕망은 ‘남성적 항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자가 자기를 초월해 여러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며, 이것은 당연히 여자가 주관적 태도로 비본질적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런 해석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커다란 오해는 인간 여성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세상이 인정하는 데 있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것으로도, 어머니인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진정한 여자‘는 예전에 거세된 남자들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산물이다. 교태나 온순함 같은 이른바 여자의 ‘본능‘은 남근의 자존심이 남자에게불어 넣어진 것처럼 여자에게 불어 넣어진 것이다. 남자가 언제나 남성적 소명을받아들이지 않듯이 여자는 자기에게 지정된 소명을 그보다 한층 덜 순종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당연한 이유가 있다. - P556

다음의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즉, 자기를 객체화하는 데 대한 거부가 여자를 언제나 동성애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다수 레즈비언은 반대로 자기의 여성성이라는 보물을 자기 소유로 하려고 한다. 자기를 수동적인 물체로 변신시키는 데 동의하는 것이 주체적인 주장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 P565

이처럼 즉자 존재의 형태로 자기를 발견할 것을 염원한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자기의 타성에서 자기를 되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그녀는 현실적으로 자기를 둘로 나눌 수 없다. 그녀는 자가 가슴을 애무하지만, 그 가슴이 다른사람의 손에는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지 또한 다른 사람의 손 아래서는 어떻게 살아 있음을 느낄지 알지 못한다. 한 남자는 그녀에게 그녀의 살의 대자적 실존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 살이 타자에게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녀의 손가락이 한 여자의 몸을 어루만지고 확인할 때, 또 그 여자의 손가락이 자기 몸을 애무할 때 비로소 거울의 기적이 완전히나타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은 하나의 행위다. 각자는 자기를 떠나서 타자가 되어 버린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 육신의 수동적인무기력이 남성적 격정의 모습 아래 반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발기한 성기에서 그 매력을 너무나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들 간의 사랑은 관조다. 애무는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를 통해서 서서히 자기를 재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분리는 사라지고, 투쟁도 승리도 패배도 없다. 서로 정확히 주고받음으로써 각자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지배자인 동시에 노예다. 이런 이중성은 암묵적 합의다. 콜레트가 말하기를, "꼭 닮은 것은 성적 쾌감을 안정시키기도 한다. 여자 친구는 자신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육체, 자기 자신의 육체가 선호하는 상대의 육체를 확신에 차서 애무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 - P566

사실 동성애는 심사숙고한 성도착도,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맞게 선택된,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가 있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 P575

태도다. 주체가 이러한 선택 때문에 받아들이는 요인들 - 생리적 조건, 심리적 역사, 사회적 상황 - 이 모두 그런 선택을 설명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동성애는 여자에게 일반적으로 그녀가 처한 조건, 특히 에로틱한 상황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는 기만과 나태와 허위 속에서 사느냐, 아니면 명석함과 관대함과 자유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희극과 불균형, 실패와환상을 초래하기도 하고, 반대로 풍요로운 경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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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3 The Sun King
The Sun King of France
Louise XIV, “visible divinity” - God’s representative on earth
He decided to build a huge new palace in Versailles.
During his reign, France became the largest and most important nation in Europe.
But in the last years of his life, France lost some of its new territory.
Dauphin died, his grandson’s wife died, grandsons died.
When he died, his only remaining grandson, a sickly five-year-old, inherited the throne of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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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하영, 혼란스러운 강의실 만들기
벨 훅스,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
탁선미 외,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4. 우재형, 노동문제 동아리 활동기

"페미니스트 강의실은 갈등과 긴장의 공간이자 때로는 끊이지 않는 적대감의 공간이 된다. 서로가 가진 차이점을 대면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관한 생각을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갈등을 무서워하기보다는 새로운 생각을 위해, 그리고 성장을 위해 갈등을 촉매제로 사용해야 한다." [1]

[1] 벨 훅스, 윤은진 옮김,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모티브북,
2008), 138-139쪽 - P59

대학의 위기, 더 정확히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 여성주의 관점의 전공 수업을 유지하려 한 투사 같은 교수자들도 있었다. 철학과의 ‘여성주의 철학‘, 사회학과의 ‘젠더사회학‘ 전공 수업은 다양한 분과 학문을 바라보는 세계관으로서의 여성주의를 소개하려는 시도였다.[7]

[7] 전공과목으로 여성주의 철학을 개설한 한림대학교 철학과 고(故)장춘익 교수의 교육 실천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탁선미 외,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2022, 곰출판) - P63

20대 초중반의 남녀 대학생들이 성인기로 진입하기 전 준비 단계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 시기의 생각과 주장으로 이들의 정의로움 혹은 선악을 판명해 버린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다. 10대 시절 자신만의 - P67

사고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적어도 대학에서 성인으로 잘 살기 위한 기술을 익혀야 한다. 선택의 기준, 세상의 작동방식, 타인과 공존하는 법, 갈등을 해결하는 법 같은 것들 말이다. 후기 청소년기 대학생들이 마주한 넓고 다양한 생각과 현실 앞에서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며 그 마음을설명해 주는 이론과 개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바로 페미니즘과 여성학, 여성주의 관점이라는 것을 나는 알려 주고 싶었다. - P68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여학생들조차 ‘여자인 나를 자꾸 강조하게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정함에 민감한 세대의 여학생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정하는 것조차 공정이라는 문법에서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다. 낯설고 어쩐지 싫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알려 주기 위한 첫 단계는 친숙함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 P70

어찌 보면 황당한 일화이지만 내게는 이러한 갈등과 긴장 하나하나가 사소하지 않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이 느끼는 반발심과 불편함은 그 자체로 교육적 의미가 있다. 페미니즘 교육은 고정된 지식을 전달하는 강 - P71

의가 아니라 세계관을 익히며 연습하는 워크숍에 가깝다. - P72

그럼에도 나는 이 혼돈을 더 버티고자 한다. 여성·학 수업이 대학 공동체에서 멀어진 과거가 남긴 교훈은 여성학이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배움의 주체들에게세상을 보는 감각을 깨우고 그 세상과 화해할 자원을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안전한 공간에서 느끼는 혼란함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기 전 다른 관점, 다른 감각을 상상할 수 있는 틈을 허락할 것이다. 아직 성인으로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후기 청소년기 대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학습과 연습의 기회, 아직은 그래도 되는 공간과 시간이다.

- 신하영, 혼란스러운 강의실 만들기 - P73

내가 이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이념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는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마땅히 따를 만한 정합적인 논증이 마련되지않는 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아직 노동이 인간의 다른 활동에 비하여 특별한 의미나 우위를 갖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 P87

이러한 나의 입장에 대해 같은 동아리의 어느 부원은 지나치게 최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견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학내의 노동 환경은 ‘최소한의 인권‘마저도 보장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철학자 칼 포퍼는 이렇게 썼다.

추상적인 선의 실현보다는 구체적인 악의 제거에 집중하라.

- 우재형, 노동문제 동아리 활동기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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