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체험
제1부 형성
3장 성 입문
남자 내민다 던진다
빼앗는다 꺾는다 소유했다 가졌다 먹었다
이사도라 덩컨 <나의 생애>

4장 레즈비언
레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여자가 처한 상황의 복잡성을 반영하기에 훨씬 더 복잡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암컷은 종으로서의 힘을 자기의 개별적인 생활에 통합시키는 대신, 그 개별적 목적과 분리된 이해관계를 가진 종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은 인간 여자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음핵과 질이라는 두 기관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유아 단계에서는 음핵이 여성 에로티시즘의 중심부이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여자아이들의 경우 질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의견이다. 아무튼 질은 부수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음핵 체계는 성년기에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일생 이 에로틱한 자율성을 보존하고 있다. 음핵의 경련은 남자의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거의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일종의 붓기와 가라앉기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성교에 간접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며, 생식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침투되고수태되는것은 질을 통해서다. 질은 남자의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에로틱한 중심부가 되고, 이런 개입은 언제나 일종의 폭행 성질을 띤다. 옛날에 여자가 자기의 어린이세계에서 뿌리 뽑혀 아내로 사는 삶에 던져진 것은 실제 또는 위장된 유괴에 의해서다. 그녀를 소녀에서 여자로 바꾸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처녀성을 ‘빼앗는다‘거나 처녀의 꽃을 ’꺾는다‘거나 하는 말이 있다. 이런 처녀성의 상실은 지속적 발전의 조화로운 결말이 아니라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며, 새로운 시기의 시작이다. 쾌락은 이때 질의 내부 표면이 수축함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수축이 명쾌하고 결정적인 오르가즘으로 이어지는가? - P512

한 주기는 어린 시절의 독립성을 영속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주기는 그녀를 남자와 아이에게 바치는 것이다.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자를 남자와 종에 예속시킨다. - P513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에, 그녀의 무기력은 그 본래의 역할을 심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많은 남자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가 성교를 원하는지 혹은 그저거기에 복종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죽어 있는 여자와도 동침할수 있다. 성교는 남자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 없으며, 자연적 종료도 남자의 충족에 의해서다. 여자가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않아도 수태는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 여자에게 수태는 성적 과정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반대로 종이 여자에게 요구한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서서히, 고통스럽게 임신, 출산, 수유 속에서 실현된다. - P514

결혼의 구조가, 매춘부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로 상호성 없는 관계의 증거다. 여자는 자신을 주고, 남자는 여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취한다. 남자가 열등한 존재들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녀와의 정사는 언제나 허용됐지만, 운전기사나 정원사에게 자기를 내맡기는 부르주아 여자는 사회적으로 지위를 박탈당한다. 그토록 맹렬한 인종주의자인 남부 미국인들은 남북전쟁 이전이나 오늘날이나 변함없이 관습에 의해 흑인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권리를 귀족처럼 위풍당당한 교만함으로 행사한다.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노예시대에는 살해당했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집단폭행을 당할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와 동침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녀를 ‘소유했다‘거나 ‘가졌다‘고 말한다. 역으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가졌다‘고 말하는 대신에 때로 속된 말로 ‘먹었다‘라고 말한다. - P514

남자들의 섹스 용어는 군대 용어에서 착안한 것이다. 연인은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처럼 팽팽하며, 사정할 때는 ‘발사한다‘. 그것은 기관총이며 대포다. 그는 공격이니, 습격이니, 승리니 하는 말을 지껄여 댄다. 그의 성적 흥분에는 알 수 없는 어떤 영웅주의적 취미가 있다. "한 존재에 대한 다른 존재의 점령으로 이루어지는 생식 행위는 한편으론 정복자라는 관념을,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된 물건이라는 관념을 부과한다. 그래서 가장 문명화된 사랑 관계를다룰 때도 사랑의 관념에 전쟁의 관념을 선명하게 투사해서 정복, 공격, 습격, 공방전, 패배, 항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허용하는 이 행위는 오염시키는 쪽에는 일종의 자부심을, 오염당하는 쪽에는 비록 동의했을지라도 다소의 굴욕감을 준다"고 방다는 쓰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신화를 도입시킨다. 즉, 남자가 여자를 더럽힌다는 신화다. - P515

자기를 객체로 만들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수동적 객체인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잠자는 여자도 죽은 여자도 아니다.
??? - P520

발자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서 정신적인 것을 별개로 하고, 여자는 칠현금처럼 그것을 켤 줄 아는 남자에게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 P529

여자가 그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인정하지 않는 커다란 이유는 그 속에서자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표현된다. 남자는 ‘팽팽해지는‘ 반면에 여자는 ‘적신다‘. 단어에는 젖은 침대나 소변을 잘못 보아 야단을 맞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들어 있다. - P529

사실 여성에게 관능의 양상은 남성의 경우와 전혀 같지 않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질의 쾌감이 결정적 오르가슴에 도달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성들의 고백이 흔치 않고, 정확성을 기하려는 경우에도 그녀들은 지극히 모호한 채로 있다. 반응은 개개인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남자에게 성교는 명확한 생물학적 목적인 사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 P542

그리고 대단히 복잡한 수많은 다른 의도를 통해 이 목적이 조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은 결말처럼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욕망의 충족이나 적어도 그것의 소멸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여자에게는 목표가 처음에는 불확실하고, 생리학적이라기보다 심리학적 성격을 띤다. 여자는 일반적으로흥분과 관능적 쾌감을 원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사랑 행위의 어떤 명확한 결론도투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여자에게 성교는 결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을 수반하지 않는다. 남자의 쾌감은 화살처럼 상승하다가 어떤일정한 문턱에 다다르면 완성된다. 그리고 오르가슴 속에서 불시에 죽어 버린다. 성행위의 구조는 완결되고 중단된다. 여성의 쾌락은 생식 체계에 늘 집중된 것이아니라 온 육체에 퍼져 있다. 진정한 오르가슴보다는 오히려 질의 수축이 리듬에맞추어 사라졌다가 다시 형성되고, 때때로 극점에 도달했다가 그다음 헝클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죽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파동 체계를 형성한다. 여성에게는어떤 최종 단계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쾌락이 무한을 겨냥한다. 여성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뚜렷한 만족감보다는 흔히 신경이나 심장의피로 혹은 심리적 포만 상태다. 만족하거나 또한 기진맥진하더라도 여자는 결코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없다. - P543

여성의 유순함은 대단히 애매한 개념이다. 대부분 젊은 처녀는 상상계 속에서반신이나 영웅이나 한 남자의 지배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 나르시시즘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녀는 현실에서 이런 권위의 육체적 표현을 감내할 준비가 전혀되어 있지 않다. 그와 반대로 대개 자기가 숭배하고 존경하는 남자를 거부하고,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 구체적인 행동의 열쇠를 환상에서 찾는 것은오류다. 왜냐하면 환상이란 주체가 환상으로서 만들어 내어 마음속에 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와 흐뭇함이 뒤섞인 상태에서 강간을 꿈꾸는 어린 소녀는 강간당하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견딜 수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 P546

한편, 여자의 성적 역할이 대부분 수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의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인 게 아닌 것처럼, 이런 수동적인 상황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마조히즘적인 것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 주체성의 확립을 유지하면서 애무나 흥분이나 삽입을 자신의 쾌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또한 연인과의 결합을 추구할 수도 있고 그에게 자신을 맡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지,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타인의 의식意識을 통해 자기를 순수한 물체로 만들고, 또 자신에게도 물체로 표상하며 물체인척할 때 마조히즘이 나타난다. "마조히즘은 나의 객체성으로 타자를 매혹하기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나의 객체성에 나 스스로가 매혹되기 위한 시도다." 사드의 쥘리에트 『규방철학 에서 젊은 처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지만,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기 때문에두 사람은 전혀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채털리 부인이나 케이트는 전적으로 자기를 상대방에게 내맡기는 데 동의하고 있으므로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마조히즘을 말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하고, 이 소외된 제2의 자기가 타인의 자유에 의해 확립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 P547

이런 관대함은 남자의 경우에 흔히 그 허영심 때문에 저지되고, 여자의 경우는 수줍음 때문에 저지된다. 여자가 자기에 대한 억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그녀의 관대함은 충분히 발휘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자에게서 성적인 만개가 상당히 늦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여자의 성적 성숙은 서른다섯 살 무렵에 절정에 이른다. 불행하게도 만약 여자가 결혼했다면 그때쯤엔 이미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불감증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녀는 아직 새로운 애인들을 유혹할수 있지만, 곧 시들기 시작한다. 그녀의 앞날은 길지 않다. 많은 여자가 성적 매력을 잃어 갈 즈음에야 겨우 자기의 욕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 P550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자연을 원용한다면, 본래 모든 여자가 동성애자라고 말할수 있다. 레즈비언은 확실히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육체를 좋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사춘기 소녀는 남자의 성기 삽입이나 지배를 두려워하며, 남자의 육체에 대하여 어떤 혐오감을 느낀다. 반면에 여자의 몸은 남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도 욕망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바와같이 남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서 설정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존재로서 설정한다. 다른 남자를 취해야 할 하나의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남자 안에서 그리고 그와 맞물려 자기 안에서 남성적 이상을 해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을객체로 인정하는 여자는 같은 여자들 안에서나 자기 안에서 일종의 먹잇감을 보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 남녀에게 적대감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성애 남녀는 남자가 지배적 주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반 남녀는 자발적으로 레즈비언들을 너그럽게 대한다. 틸리 백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녀들은 내 기분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는 경쟁자들이다.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하고, 나는 부도덕하게도 그녀들에 대해 웃어 버리고 만다." 콜레트도 클로딘과 레지 커플 앞에서 르노가 이와 같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묘사했다. 남자는 공격적이지 않은 동성애 여자보다도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애 여자로 인해 더 짜증을 낸다. 남자의 특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런 이성애 여자뿐이다. 여성 동성애는 양성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형태를 반대하지 않는다. 대개 여성 동성애는 여성성의 인수이지 거부가 아니다. 이미 본 바와같이, 여성 동성애는 흔히 사춘기 소녀들에게 아직 경험할 기회나 대담성이 없는이성애 관계의 모조품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인생의 한 과정이자 수업이며, 가장 열렬하게 동성애에 빠진 여자가 장래 가장 열렬한 아내나 애인이나 어머니가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성애 여자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은 그 선택의 긍정적측면이 아니라 부정적 면이다. 동성애 여자의 특징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데 있는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자만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 - P555

남성적‘인 레즈비언을 ‘남자를 모방하려는 의지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진짜가 아닌 것으로 규정짓는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현 사회가 정의하는 대로 남녀의 범주를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애매함을 초래하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오늘날 남자는 적극적인 것과 중립적인 것, 다시 말해서 남성과 인간을나타내지만,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과 여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인간으로 행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와 동일시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적·정치적·지적 활동이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욕망은 ‘남성적 항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자가 자기를 초월해 여러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며, 이것은 당연히 여자가 주관적 태도로 비본질적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런 해석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커다란 오해는 인간 여성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세상이 인정하는 데 있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것으로도, 어머니인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진정한 여자‘는 예전에 거세된 남자들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산물이다. 교태나 온순함 같은 이른바 여자의 ‘본능‘은 남근의 자존심이 남자에게불어 넣어진 것처럼 여자에게 불어 넣어진 것이다. 남자가 언제나 남성적 소명을받아들이지 않듯이 여자는 자기에게 지정된 소명을 그보다 한층 덜 순종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당연한 이유가 있다. - P556

다음의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즉, 자기를 객체화하는 데 대한 거부가 여자를 언제나 동성애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다수 레즈비언은 반대로 자기의 여성성이라는 보물을 자기 소유로 하려고 한다. 자기를 수동적인 물체로 변신시키는 데 동의하는 것이 주체적인 주장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 P565

이처럼 즉자 존재의 형태로 자기를 발견할 것을 염원한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자기의 타성에서 자기를 되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그녀는 현실적으로 자기를 둘로 나눌 수 없다. 그녀는 자가 가슴을 애무하지만, 그 가슴이 다른사람의 손에는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지 또한 다른 사람의 손 아래서는 어떻게 살아 있음을 느낄지 알지 못한다. 한 남자는 그녀에게 그녀의 살의 대자적 실존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 살이 타자에게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녀의 손가락이 한 여자의 몸을 어루만지고 확인할 때, 또 그 여자의 손가락이 자기 몸을 애무할 때 비로소 거울의 기적이 완전히나타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은 하나의 행위다. 각자는 자기를 떠나서 타자가 되어 버린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 육신의 수동적인무기력이 남성적 격정의 모습 아래 반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발기한 성기에서 그 매력을 너무나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들 간의 사랑은 관조다. 애무는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를 통해서 서서히 자기를 재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분리는 사라지고, 투쟁도 승리도 패배도 없다. 서로 정확히 주고받음으로써 각자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지배자인 동시에 노예다. 이런 이중성은 암묵적 합의다. 콜레트가 말하기를, "꼭 닮은 것은 성적 쾌감을 안정시키기도 한다. 여자 친구는 자신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육체, 자기 자신의 육체가 선호하는 상대의 육체를 확신에 차서 애무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 - P566

사실 동성애는 심사숙고한 성도착도,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맞게 선택된,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가 있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 P575

태도다. 주체가 이러한 선택 때문에 받아들이는 요인들 - 생리적 조건, 심리적 역사, 사회적 상황 - 이 모두 그런 선택을 설명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동성애는 여자에게 일반적으로 그녀가 처한 조건, 특히 에로틱한 상황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는 기만과 나태와 허위 속에서 사느냐, 아니면 명석함과 관대함과 자유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희극과 불균형, 실패와환상을 초래하기도 하고, 반대로 풍요로운 경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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