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안더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

그러니까 관건은 방사능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위원회(IAEA)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꽤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조차도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거짓정보를 생산·유포하는 데 협력해왔다. 예를 들어, 1959년에 맺어진IAEA와 WHO 사이의 협약은 WHO라는 유엔 기구가 국제 원자력 추진세력 앞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협약은 방사능에 관한 한, WHO의 독자적인 조사·평가와 그 연구결과의 공개를 일절금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WHO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상황에 대한 학술대회를 두 차례나 개최하고도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채 그냥 앵무새처럼 IAEA의 견해를 되풀이하여,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가 수천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WHO의 굴종적인 행태는 관계된 관료·과학자들의 왜소함뿐만 아니라, ‘원자력체제‘가 얼마나 가공할 반생명·비윤리성에 기반하고 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다. - P251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시작된 원자력발전 시스템은, 핵무기에 못지않게 생명과 평화에 위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핵무기는 일란성쌍생아라는 사실이다. 이번 호에 전재 · 소개된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의평론가 가라타니 고진(行人)이 "원전은 핵무기 개발을 전제로 한 산업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꿈꾸는 국가는 원전을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이것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 P251

그러나 원자력발전 시스템의 존속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될 제일 절박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의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P252

핵에 대한 무관심 · 무감각의 결과는 반드시 묵시록적 상황을 낳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이기도 했던 독일철학자 귄터 안더스가 생전에 한 말이다. 그는 핵에 대한 무관심·무감각은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는 경제성장과 효율성의 원리에 압도적으로 지배되면서 세계 자체가 거대한 기계로 변했고, 인간은 한갓 그 기계의 부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양심과 책임과 윤리의식,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 P252

상상력의 결여는 현대인의 숙명이 되었다- 이것이 안더스의 비관적인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핵 없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 P253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
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256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중심, 자립적 생산·생활 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61

그런 만큼 독일의 자세는 단연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르켈 독일 수상이 원전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안전위원회’와 함께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 그리고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임명함으로써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정한 결론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양심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비판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윤리위원회‘에는 원자력에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위원회 구성 멤버는 가톨릭의 추기경, 프로테스탄트 목사,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을 포함한 몇몇 학자, 소비자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 등열일곱 명이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미란다슈라즈는 지난 6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에서, 윤리위원회가 이렇게 구성이유는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전력회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정책을 이른바 관계 당국이나 기업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주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새삼 극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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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이라는 부모는 늘 돌아서면 마를 눈물이나 낳을 뿐이니까. 하지만 오 년 뒤에 터진 삼촌의 그 눈물은 도대체 어느 호적에 올라 있었던 것일까?
"그래 그 여자 내 가슴에서 떠나보낸 기라. 그제서야 알았지. 우리가 진짜 우리로 사는 인생이 을매나 되겠어여. 다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생 아이라여? 그란데 그 여자하고 살았던 시절은 그래도 내가 나로 살았던 시절이구나, 그걸 깨달은 거라. 그 여자 여관에 버려두고 밤이 늦어 감포에서 경주까지 걸어갔지. 달도 참 밝은 밤이라. 한 손에 수면제 약병 들고 미친놈처럼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후의 명시 더 로드낫 테이큰」을 읊으면서 말이라. 투 로드 디버지드 인 어 옐로 우드, 앤 쏘리 아이 쿠드 낫 트래블 보쓰……… 이 불후의 명시가 그래 통속적인 시라카는 거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다친 자리가 아픈지 온갖 인상을 쓰면서도 삼촌은 또 ‘앤 비 원 트래블러 롱 아이 스투드‘ 라고 중얼거렸다. - P172

보름달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노란빛이 환하게 마음을 밝혔다. 명부전 돌아가는 진회색 축대 밑에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빛꽃을 피웠다. 아기 손바닥 같은 초록 잎이 더운 공기 머금은 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가느다란 꽃대를 따라 애기똥풀 노란 꽃이 끄덕끄덕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버렸다. 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는 모양이었다. 대웅전 마당으로 향하던 예정은 그만 오후 햇살이 옴큼옴큼 내려앉은 명부전 섬돌 한쪽에 앉아버렸다. 애기똥풀 꽃대처럼 여윈 예정의 그림자가 섬돌의 윤곽을 따라 비뚜름하게 명부전 맞배지붕 날카로운 그림자 사이로 섞여들고 있었다. 봄바람은 애기똥풀 노란꽃잎이나 흔들 줄 알았지, 예정의 마른 그림자나 떨리게 했지, 사래에 매달린 풍경 속 눈 뜬 붕어 한 마리 제대로 흔들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 P181

꽃 향기 훈훈한 봄볕을 너무 머금었는지 바람은 저 혼자서 무거워져 건듯 불어오다가 둥근 기와 박은 토담 모양으로 펼쳐진 비질 자국이 여전한 명부전 앞마당만 공연히 한 번 더 쓸어버리고는, 차령산맥 바로 밑이라 더이상 자라지 않고 가늘기만 한 대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인 뒤란을 휘돌았다. 북한계선까지 치밀고 올라온 대나무들은 예정이 지금 머무는 곳이 온대지역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예정의 마음은 사스래나무와 누운잣나무가 자라는 추운 지방의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바람 끊어진 자리 어디쯤에서 시선은 자꾸만 아물거리기만 했다. - P182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 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나이많은 보살들의 얘기를 듣는 사이사이에 예정은 수의를 지을 때면 늘 읊조리던 그 열여섯 자를 중얼거렸다. 어떤 죄도 짓지 말며 무릇 선이란 받들고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깨끗하게 한다면 그게 바로 부처님이 가르친 모든 바라. 열심히 열심히 그 말을 되뇌며 연등을 만들었건만 허전한 마음만은 영영 메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의를 지을 때만 해도 원하는 바로 그곳에 들어앉아 있던 마음자리가 며칠 연등을 만드느라 풀어지더니 그만 초파일에 뜻하지 않은 쪽으로 터져나왔다. 제비 맞으러 나온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 꽃잎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줄기를 잘랐다면 아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배어나왔겠지. 따가운 그 노란이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달래주었겠지. - P183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인생이란 꼭 이십 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저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전등을 밝히며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 더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나는 지옥 그 밑바닥까지도 갈 수 있다구. - P192

평범한 한국인을 쥐에 비유하는 것은 그를 간첩에 비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발언이었다. 말하자면 그 미국인의 발언은 비유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사로 확연해지는 이 경계선이 체제의 틀이 됐다는 점은 놀랍기도하다. 이런 경계선 바깥, 그러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타자들이 흩뿌려지는 그 영역에는 거지, 부랑자, 장애인, 미친 사람, 간첩, 빨갱이, 전과자 등이 있었는데, 이들끼리는 서로 비유가 가능했다. 낯선부랑자는 간첩으로 의심받았으며 포스터에서 간첩은 곧잘 쥐꼬리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졌다. 빨갱이 짓은 미친 짓이며 정신병자는 전과자처럼 사회와 격리시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 P210

막상 그가 비행기 조종사 복장에다가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복개천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쥐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을때, 그의 돌출 행동을 비웃기만 하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만류하기시작했다. 암모니아가스로 가득한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질식사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가 들어가서 질식사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의 사체를 찾으러남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 게 고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낯빛도 바꾸지 않고 그 우스꽝스러운 왕진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자, 분위기는 점점 더 희극적으로 바뀌어갔고 사람들의 반응도 격렬해졌다.
"으사양반, 미친 지랄을 할라 캐도 곱게 하란 말이 있어여. 저 무 - P223

슨 지랄병이 도졌길래 그 지랄을 한단 말이고?"
"그캉께 들어가서 뒈지든지 말든지 그냥 냅버려두자캉께 뭔 구경 났다고 사람들이 이키 나왔나 안 카나."
"저래 들어가서 뒈지면 그것도 국립묘지에 갖다 묻는가?"
"지랄한다. 국립묘지가 쓰레기 매립장이가. 여 보라카이, 쥐포선생. 거 들어가봐야 아무것도 없다캉께로"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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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신문기사를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조선일보기사가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조선일보에 글을 실은 적이 없었다. 펼쳐보니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유미리에 관한 기사였다. 아버지는 유미리라는 이름에, 그리고 ‘방황과 절망이 빚어낸 문학성‘이라는 홍사중씨의 칼럼 제목에 각각 붉은 형광펜 칠을 해놓았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 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 P74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 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 P75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지고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가 한참일 때, 나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웃긴 생각이었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어. 영양을 덮치는 들개들처럼 사람들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달려들어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려. 짓밟고 때리고 뭉개고 나면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해 영원한 것은 더럽고 야비한 것들뿐이야.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정의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바다의 한때나마 꿈에 불과한 거야.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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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은하수, 솔~ 추억의 담배이름.
장미, 도라지, 백자, 한라산, 88도 기억난다 ㅎㅎ

1. 게이코
눈보라가, 검은보랏빛 어둠 속으로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 눈보라 깊은 속까지 들어간 연통 끝, 위로 솟구치는 하얀 연기 아래로 누런 물방울 몇 맺혀 있겠다. 비스듬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꼴을 눈여겨보지 않더라도 창으로 밀려와 부딪치고는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눈송이들만으로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천지사방이 그 바람 타고 올라선 자우룩한 눈안개였다. 눈기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오토바이 뒤에 낚싯대를 싣고 떠나 갓밝이 날파람들이 서로 수런거리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말 못 하고 내일 오후까지는 이렇게 눈이 온다 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침 와뜰하던 차였다. 고립의 감정도, 무기력의 마음도 아니었고 다만 그 꺼물거리는, 혹은 반득이는 눈보라 앞에서 무너지는 가슴. 장막을 둘러친 그 시간을 잔드근하게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 P9

김씨가 뭐라고 더 퉁명부리기 전에 태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된바람이 훅 얼굴로 밀어닥쳐 절로 두꺼비상이 됐다. 눈은 그쳐 있었다. 동 트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바닥에 깔린 눈 덕분에 주위가 희슥했다. 어디선가 닭 갖추는 소리가 들려와 소름이 돋았다. 태식은 주머니에서 거북선을 꺼내 물었다. 나라에서는 은하수도 만들고 솔도 만들었지만, 어쨌거나 태식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으로 담배를 처음 배웠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태식이 매캐한 담배연기를 처음 들이켰던 것도 열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작 제빵 기술자가 된 것뿐이지만.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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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7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뜰하다-꺼물거리다-반득이는- 잔드근 하게

우리 말 너무 좋네요!

한국어 사릉하는 연수옹 만쉐!^^

햇살과함께 2022-10-27 23:58   좋아요 2 | URL
와. 첫 단락부터 깜짝 놀랐어요~
모르는 순우리말 단어들 잔뜩^^
 

마거릿 풀러 찾아보자. 다미여에도 나오고.

하지만 영국 독자가 숙고하게 되는 것은 지성에 대해서이니, 지성은 우리 소설에서 어쩌면 가장 드문 자질이기 때문이다. 지성이란 정의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단순히 총명함이나 지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 즉 인생의 묘미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 혹은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하지만 설득 가능한 상대인 제3자,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과 소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는 감각이다. 그것이 『기후』의 인물들을 그토록 합리적으로 만드는 이유이다. 이자벨의 말은 이런 관계를 잘 보여 준다. - P92

왜냐하면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미국인이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의 교육에서 첫걸음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은 영국 장군들의 지휘 아래 행군해 온 영국 단어들의 전 부대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는 <작은 미국 단어들>을 길들여 자기 명령에 따르게 해야 한다. 그는 필딩과 새커리의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시카고술집의 사람들에게, 인디애나의 공장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하지만 다음 걸음은 훨씬 더 어렵다.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결정한 다음에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P101

그가 남들처럼 생계를 꾸리기 위해 처음으로 해본 일은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는데, 생도들을 매질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는 매질 대신 말로 훈계하기를 원했다. 위원회에서 <그런 관대함>이 학교에 폐를 끼친다는 점을 지적하자, 소로는 엄숙하게 여섯 명의 생도에게 매질을 하고는 학교 운영이<자신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임해 버렸다. 무일푼의 젊은이가 실천하고자 했던 생활 방식이란 아마도 몇 그루 소나무와 웅덩이, 야생 동물, 그리고 인근에서 발견되는 인디언 화살촉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는 벌써부터 그런 것들에 끌리던 터였다. - P120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 새로운 희망에 도달할 기회를 주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로, 하나는 브룩 팜같은 공동체 생활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 속에 홀로 사는 것이었다. 선택의 시간이 오자 소로는 단연 두번째를 택했다. <공동체로 말하자면, 나는 천국에서 기숙사에 가느니 지옥의 독신자 구역을 택하겠다>라고 그는 일기에 썼다. - P122

그의 강인하고도 고귀한 책, 모든 말이 성실하고 모든 문장이 작가의 기량을 보여 주는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묘한 거리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소통하려 애쓰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의 눈은 땅바닥 아니면 지평선을 향해 있다. 그는 결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으며, 반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반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무엇인가를 향해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한다는 것이 내 일기의 모토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썼으며, 그의 모든 책이 사실상 일기이다. 다른 사람들, 남자들과 여자들은 감탄할 만하고 아름답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달랐으며, 그는 그들의 행동거지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초원의 개만큼이나 신기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인간들과의 모든 교제가 그에게는 극도로 힘들었고, 한 친구와 다른 친구 사이의 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는 아주 불안정하고 실망으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낮추는 것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태세가 되어 있었지만, 소로는 그 어려움이 애쓴다고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북소리가 박자에 맞든 종잡을 수 없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걷게 하라.> - P128

그는 야생적인 사람이었고, 결코 길들여지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다. 자연이 그에게는 우리와 다른 본능을 불어넣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비밀들을 속삭여 주었을지도 모른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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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아 포포바의 책 <진리의 발견>에 마거릿 풀러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른 책은 저도 본게 없네요

햇살과함께 2022-10-26 23:1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엔 안나오고 네이버 검색하니 말씀하신 <진리의 발견>만 나오네요~ 번역된 책이 없나봐요. 진리.. 엄청 유명한 책이라 이름만 들어봤는데^^ 일단 도서관 검색해서 발췌해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