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이라는 부모는 늘 돌아서면 마를 눈물이나 낳을 뿐이니까. 하지만 오 년 뒤에 터진 삼촌의 그 눈물은 도대체 어느 호적에 올라 있었던 것일까?
"그래 그 여자 내 가슴에서 떠나보낸 기라. 그제서야 알았지. 우리가 진짜 우리로 사는 인생이 을매나 되겠어여. 다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생 아이라여? 그란데 그 여자하고 살았던 시절은 그래도 내가 나로 살았던 시절이구나, 그걸 깨달은 거라. 그 여자 여관에 버려두고 밤이 늦어 감포에서 경주까지 걸어갔지. 달도 참 밝은 밤이라. 한 손에 수면제 약병 들고 미친놈처럼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후의 명시 더 로드낫 테이큰」을 읊으면서 말이라. 투 로드 디버지드 인 어 옐로 우드, 앤 쏘리 아이 쿠드 낫 트래블 보쓰……… 이 불후의 명시가 그래 통속적인 시라카는 거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다친 자리가 아픈지 온갖 인상을 쓰면서도 삼촌은 또 ‘앤 비 원 트래블러 롱 아이 스투드‘ 라고 중얼거렸다. - P172

보름달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노란빛이 환하게 마음을 밝혔다. 명부전 돌아가는 진회색 축대 밑에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빛꽃을 피웠다. 아기 손바닥 같은 초록 잎이 더운 공기 머금은 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가느다란 꽃대를 따라 애기똥풀 노란 꽃이 끄덕끄덕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버렸다. 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는 모양이었다. 대웅전 마당으로 향하던 예정은 그만 오후 햇살이 옴큼옴큼 내려앉은 명부전 섬돌 한쪽에 앉아버렸다. 애기똥풀 꽃대처럼 여윈 예정의 그림자가 섬돌의 윤곽을 따라 비뚜름하게 명부전 맞배지붕 날카로운 그림자 사이로 섞여들고 있었다. 봄바람은 애기똥풀 노란꽃잎이나 흔들 줄 알았지, 예정의 마른 그림자나 떨리게 했지, 사래에 매달린 풍경 속 눈 뜬 붕어 한 마리 제대로 흔들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 P181

꽃 향기 훈훈한 봄볕을 너무 머금었는지 바람은 저 혼자서 무거워져 건듯 불어오다가 둥근 기와 박은 토담 모양으로 펼쳐진 비질 자국이 여전한 명부전 앞마당만 공연히 한 번 더 쓸어버리고는, 차령산맥 바로 밑이라 더이상 자라지 않고 가늘기만 한 대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인 뒤란을 휘돌았다. 북한계선까지 치밀고 올라온 대나무들은 예정이 지금 머무는 곳이 온대지역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예정의 마음은 사스래나무와 누운잣나무가 자라는 추운 지방의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바람 끊어진 자리 어디쯤에서 시선은 자꾸만 아물거리기만 했다. - P182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 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나이많은 보살들의 얘기를 듣는 사이사이에 예정은 수의를 지을 때면 늘 읊조리던 그 열여섯 자를 중얼거렸다. 어떤 죄도 짓지 말며 무릇 선이란 받들고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깨끗하게 한다면 그게 바로 부처님이 가르친 모든 바라. 열심히 열심히 그 말을 되뇌며 연등을 만들었건만 허전한 마음만은 영영 메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의를 지을 때만 해도 원하는 바로 그곳에 들어앉아 있던 마음자리가 며칠 연등을 만드느라 풀어지더니 그만 초파일에 뜻하지 않은 쪽으로 터져나왔다. 제비 맞으러 나온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 꽃잎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줄기를 잘랐다면 아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배어나왔겠지. 따가운 그 노란이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달래주었겠지. - P183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인생이란 꼭 이십 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저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전등을 밝히며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 더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나는 지옥 그 밑바닥까지도 갈 수 있다구. - P192

평범한 한국인을 쥐에 비유하는 것은 그를 간첩에 비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발언이었다. 말하자면 그 미국인의 발언은 비유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사로 확연해지는 이 경계선이 체제의 틀이 됐다는 점은 놀랍기도하다. 이런 경계선 바깥, 그러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타자들이 흩뿌려지는 그 영역에는 거지, 부랑자, 장애인, 미친 사람, 간첩, 빨갱이, 전과자 등이 있었는데, 이들끼리는 서로 비유가 가능했다. 낯선부랑자는 간첩으로 의심받았으며 포스터에서 간첩은 곧잘 쥐꼬리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졌다. 빨갱이 짓은 미친 짓이며 정신병자는 전과자처럼 사회와 격리시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 P210

막상 그가 비행기 조종사 복장에다가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복개천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쥐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을때, 그의 돌출 행동을 비웃기만 하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만류하기시작했다. 암모니아가스로 가득한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질식사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가 들어가서 질식사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의 사체를 찾으러남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 게 고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낯빛도 바꾸지 않고 그 우스꽝스러운 왕진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자, 분위기는 점점 더 희극적으로 바뀌어갔고 사람들의 반응도 격렬해졌다.
"으사양반, 미친 지랄을 할라 캐도 곱게 하란 말이 있어여. 저 무 - P223

슨 지랄병이 도졌길래 그 지랄을 한단 말이고?"
"그캉께 들어가서 뒈지든지 말든지 그냥 냅버려두자캉께 뭔 구경 났다고 사람들이 이키 나왔나 안 카나."
"저래 들어가서 뒈지면 그것도 국립묘지에 갖다 묻는가?"
"지랄한다. 국립묘지가 쓰레기 매립장이가. 여 보라카이, 쥐포선생. 거 들어가봐야 아무것도 없다캉께로"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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