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쯤 뒤에 아빠는 근처 마트에서 일하던 계산원 아가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엄마와 나더러 알아서 살아가라는 듯이. 나쁜 일은 세 가지씩 일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몇 달 뒤 전화가 한 통 왔다. 새피 이모가 일하던 체리 통조림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이모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엄마는 이모가 다 나을 때까지 이모랑 같이 지내야겠다며 트래버스 시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때는 이모에게 생긴 일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나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속담이 하나 차이로 틀렸거나, 그 특별한 불행은 나에게 일어난 세 가지 나쁜 일 가운데 하나로 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나쁜 일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 P9

"사람 죽은 냄새는 참 오래가거든요."
이모는 이렇게 대꾸했다.
"사람 사는 냄새도 마찬가지죠." - P19

잘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시간 주 북부는 체리로 유명한 고장이다. 미국을 통틀어 파이에 들어가는 체리의 75퍼센트가 여기서 난다. 이 고장에서 조금이라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좋든 싫든 간에 체리에 관해 한 부대가 넘는 상식을 지니고 살게 된다. 체리에 대한 상식 하나. 보통 크기 체리나무 한 그루에서는 한 해에 체리가 칠천 개 정도 열리는데, 이 정도라면 두툼한 체리파이 스물여덟 개를 구울 수 있다. - P23

이모는 사고를 당한 뒤 여러 의사들과 상담을 했는데, 그중 한 선생님은기억상실증에 걸렸더라도 어떤 특별한 물건을 보면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기억을 되살려 줄 마법의 실마리는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사진 한 장, 노래 한 곡, 오븐에서 구워지는 체리파이 냄새 같이 이모의 기억은 둥그런 고리에 매달려 절그럭절그럭대는 열쇠 뭉치 같아서, 굳게 잠긴 문을 열어 줄 열쇠를 찾아낼 때까지 엄마랑 내가 이것저것 시도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 P52

나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를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선생님은 앞뒤로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스톤 선생님."
아서 씨가 선생님에게 말했다.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란 앞으로 멋진 일이 일어날 징조거든요."
선생님은 짧지만 날카롭게 웃었다.
"나라면 기대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 P90

선생님의 눈은 번쩍번쩍 빛났고 양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말을 적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몰라도, 작가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은 게 분명해."
아서 씨가 말했다.
"그럴지는 몰라도, 어른이 자기한테 말하는 것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뿐만 아니라 그 말 뒤에 숨은 진실한 감정까지도 들었다는 것이 드러나 있으니까요. 바로 이런 것이 좋은 대화문입니다."
선생님은 두 손을 꽉 부여잡더니 아서 씨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입을 꼭 다문 채 웃음을 지어 보였다. - P98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이 사람이 미스터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초능력이 있으세요?"
엉뚱한 말이 갑자기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서 씨는 웃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게 비웃는 게 아니라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지금 굉장한 걸 물어보았는데! 아이들은 날 보면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지, 책 한 권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고치고 지우는지 주로 물어보는데, 초능력이라고? 난 초능력은 없단다. 그런 건 믿지도 않아."
"그럼 저한테 고양이가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말해 주었잖아."
"전 말 안 했는데요." - P111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러면 안 된다고? 왜? 오늘 수업의 핵심을 알고 있던 사람은 너뿐이었어."
"누가 나에게 한 말을 썼을 뿐인 걸요. 제가 지어내서 쓴 게 절대 아니에요."
"알아. 그 글은 진짜였어. 그래서 참 훌륭한 글이었단다. 혹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 해본 적 있니?"
"제가요? 저는 글을 못써요."
"나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단다."
"예………. 그래도 전 정말 글재주가 없어요. 게다가,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아니고요."
말을 꺼내 놓고 보니 좀 심했다 싶었다.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어쩐 일로 버터 스카치 사탕 맛이 나지는 않았다.
아서 씨가 말했다.
"글 쓰기에 대해서 한 가지만 말해 줄게. 제임스, 글을 쓰면 세상이 달라보인단다." - P114

"나한테는 얘기해도 돼."
모자를 찾기 위해 온갖 소동을 피우다가, 한참 만에 자기가 머리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이모가 옳았다. 이모한테는 말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모만이 내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이면 기억도 하지 못하니까.
"나한테 다 말해 봐."
이모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모에게 모든 걸 다 말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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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끔찍한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7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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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복수를 나설 수 밖에 없는 범인. 읽는 내내 머릿속에 경찰영화가 생각나지만, 미국식 영웅주의? 훗 그런 줄 알았니? 라고 한껏 비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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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법상 강간죄와 추행죄가 인정되려면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폭행·협박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 강간죄 등의 범위를 최대한 좁게 해석한다는 뜻에서 ‘최협의설‘이라고 한다. - P200

대다수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당사자가 아니며 재판 참여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거나, 검사가 범죄 입증을 위해 알아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 속 검사는 검사석에서 졸거나, 공소사실에 대한 정리와 이해가 엉망이고, 사건 파악조차 안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재판부의 질책을 받기도 한다. 증거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소홀히 하거나, 증인신문 과정에서 검사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가해성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선임되어 있는 피해자 변호사와의 소통도 부족하고, 항소도 잘 하지 않는다. 항소를 했어도, 판결문을 읽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항소이유서의 내용이 불성실한 경우도 많았다. - P205

그래서 앞으로는 변호사들과 더 많이 만나 이야기하며 협업을 이어갈 생각이다. 제도나 시스템의 한계만을 지적하며 비웃기는 쉽지만, 그런 태도와 인식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과, 그 제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들을 이해하는 일은 동시에 가능하다. 형사사법 절차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며, 피해구제와 회복을 개인의 몫으로 돌림으로써 취약한 피해자 · 약자·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려는 이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만나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인식하고, 원인을 분석하며,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억울함만을 강조하지 말고, 내부와 외부 모두 노력해 오해를 걷어내고 신뢰를 쌓아가야 할 때다. - P221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기는 신문 방식이 용인되니 어떤 피고인 변호인들은 아예 피해자 인신공격을 변론의 주요 전략으로 삼기도 한다. 어차피 변호인 입장에서는 의뢰인인 피고인의 입맛에 맞게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변론함으로써 만족감을 주면, 패소하더라도 피고인들이 불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 법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특정 법인들의 변호사들을 자주 마주치는데, 그 변호사가 바로 이렇게 피해자 비난하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실제로 의뢰인들의 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변호인에게 법조인의 윤리의식은 언제든 팽개치면 그만일 뿐인 것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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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기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어쩌면 같이 일하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콜베리가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려선 안 되지." 군발드 라르손이 말했다. - P164

마르틴 베크는 그동안 경찰로 살면서 자신이 겁쟁이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져보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대답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는 겁쟁이야. 하지만 젊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 답이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한편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남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캐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옅어졌다. 마르틴 베크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169

뉘만이 그동안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괴롭혔던 사람은 넉넉히 수백 명은 될 것이다. 그중 극소수만이 진정서를 썼을 테고, 뢴이 간략한 조사로 알아낸 이름은 그중에서도 또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 베크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고, 장기적으로는 소득이 있는 작업이라도 처음에는 거의 모두 무의미해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 P173

"뭐라고 말했습니까?"
"경찰관은 친구가 많을 수 없는 법이라고요."
그건 만고의 진리지, 마르틴 베크는 생각했다. 마르틴 베크도 친구가 없었다. 콜베리와 딸뿐이었다. 오사 토렐이라는 여성도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사도 이제 경찰관이었다. 굳이 더하자면 말뫼의 페르몬손 형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을지도. - P177

뢴은 마르틴 베크의 힘찬 목소리에 전혀 감명받지 않은 듯 쩍 하품을 했다.
"그러면 무전을 쳐" 뢴이 말했다. "어디 멀리 가진 않았을테니까."
마르틴 베크는 놀라서 뢴을 보았다.
"그래, 그것 참 건설적인 제안인데."
"’건설적인‘ 제안이란 게 무슨 뜻이야?" 뢴은 불쾌한 추궁을 당한 사람처럼 대꾸했다. - P195

"에릭손이 출근했을 때나 그런 때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나?" 뢴이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막 일곱 살이 된 아들을 둔 뢴은 지난 칠 년 동안, 휴가나 주말에는 더욱더, 아이 하나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성인 두 명의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스물네 시간 내내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놀랐다. - P235

남자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낮게 말을 이었다.
"오케는 착한 앱니다. 오케가 힘들게 사는 건 그 애 탓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뼈빠지게 일하면서 오케를 번듯하게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오케도 우리도 인생이 어그러져버렸죠.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늙어서 찬밥 신세가 되었고 세상도 다 틀렸지만. 만약에 사회가 이렇게 될 줄을 미리 알았다면 아예 자식을 안 낳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내내 우리를 속였죠."
"누가요?" 뢴이 물었다.
"정치인들, 정당 대표들, 우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하지만 죄다 도둑놈이었습니다." - P279

"사이즈가 세 가지뿐인가 봐." 콜베리가 말했다.
군발드 라르손은 고개를 끄덕끄덕한 뒤 총을 허리띠에 차고 꾸물꾸물 가운을 입었다. 가운은 어깨가 너무 꽉 끼었다.
콜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한 뒤 그나마 제일 커 보이는 가운을 내려서 입었다. 가운은 너무 꽉 끼었다. 배가.
콜베리는 자신들이 무성영화에서 튀어나온 코미디 듀오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P287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지."
말름이 흡족하게 말했다. 하도 구닥다리 같은 표현이라서 주변 사람들은 속으로 비웃을 힘조차 없었다. - P300

"이건 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가?"
"제가."
"그런 건 허락할 수 없네." 말름이 당장 대꾸했다.
"양해만 하신다면, 제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잠깐." 콜베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근거에서 그런 결론을 내린 거야? 기술적 고려? 도덕적 판단?"
마르틴 베크는 콜베리를 보았다. 하지만 말은 없었다.
콜베리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둘 다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르틴 베크가 결정했다면, 콜베리는 반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너무 오래 알았다. - P317

마르틴 베크는 문득 자신의 생각이 무섭게 느껴졌다. 자신이 발코니에 꼼짝 않고 누워 있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지붕 위의 남자는 살해되거나 체포되었을까?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사람들이 나를 잊은 걸까? 나는 이렇게 혼자 작은 발코니에서 죽는 걸까?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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