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 - P53
아픈 사람이 겪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회복하기 위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 P55
나아가 조화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형편없는 시구일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형태로 표현되든 일단 표현된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라도 그렇다.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 P59
캐시와 내가 삶에 걸었던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일을 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성취하고, 아이들을 낳아 자라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우리 부부가 함께 늙어가리라는 기대가 평범해 보이던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무엇이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인지, 캐시와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삶에 거는 순진한 기대를 잃었다는 것이 질병을 겪으며 얻은 수확으로 보일 날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실로 느껴진다. - P66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또 돌봄을 주던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 P69
아픈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돌봄 제공자가 "무엇이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으며, 일관된 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진단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삶은 이미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여러 면에서 바뀌었고, 위중한 질병을 앓는 동안 변화는 계속된다. 그리고 변화가 계속된다는 점이 ‘위중함‘의 일부이기도 해서, 심하게 아픈 사람은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필요조차 따라잡기 힘들어한다. 아픈 사람은 분명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환자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전부 다 실수였다는 말, 이것 하나일지도 모른다. 환자분 검사 결과에 이름이 잘못 붙어 있었네요. 오, 전 괜찮습니다, 정말 로요. - P79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아픈 사람은 사실 거래할 거리도 없으며 거래할 상대도 없음을 깨닫는다. 또 외로움도 찾아오고, 그다음엔 자신이 누구고 자기 인생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찾아오고, 우울과 뒤섞인 희망이, 다른 사람들과 닿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뒤섞인 분노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의존 상태가 찾아온다. - P82
나, 내 몸은 ‘필요한 조사‘를 받는 수동적인 대상이 되었다. 유럽 탐험가들이 해안에 도착해서는 깃발을 꽂고, 야만인들에게 문명을 가져다줄 자신들의 군주를 대신해 이제 그곳이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했을 때 원주민들이 느꼈을 기분이 상상이 갔다. 의학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내 몸이라는 영토를 아직은 익명이었던 어떤 의사들이 조사하도록 양도해야 했다. 나는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 P85
갈수록 더 식민지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화학요법 치료 중에 한 간호사가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53호(내 병실번호) 정상피종* 환자‘라고 칭했다. 그때쯤엔 정확한 진단이 나왔던 것이지만, 이 진단명은 내 이름을 완전히 밀어냈다. 병원에서 만든 진단명이 내 정체성을 규정한 것이다. 나는 정상피종이라는 질환이 되었다. 처음에는 조사받는 수동적인 대상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치료받는 수동적인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이름도 잃어버린 내가 경험하는 주체가 되기란쉽지 않았다. - P86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 P8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 P9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고, 질병을 전부 살아냈을 즈음에 우리는 다르게 살게 된다. 질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이유는 질병이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위해 쓴다. 질병 경험 안으로 들어가 질병이 열어 보이는 가능성을 증언하고 싶지만 아프다는 것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완전히 경험한 다음 떠나보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가야 한다. - P10
결국 다른 모든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것‘과 ‘내가남들을 통해 살아낸 것‘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은 없다. - P11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써서 말하려고 애쓰면서 아픈 사람은 개인의 경험이라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스스로 부정한다 - P12
심각한 질병은 삶의 모든 면을 건드린다. 아픈 사람을 수 - P15
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병원과 의료 시설들은 환상을 만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려 가둬놓음으로써 질병 자체도 아픈 사람의 삶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위험하다. 아프게 되면 관계에도 직업에도 변화가 온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르게 느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무섭다.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의 경험에서 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압도되었다. - P16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 P17
거래를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당시엔 알지 못했다.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관리자가 나라도 그렇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 P25
나는 의사도, 질병도 잘 몰랐기에 제한을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질병이 가진 힘을 알게 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질병은 삶을 바꿀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음을,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 P27
질환 이야기는 어떤 측정값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기록한다. 질병 이야기는 완벽하게 편안했던 몸이 다른 몸이 되어가는 변화에 관해 말한다. 이 다른 몸은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것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 P29
내가 아픈 사람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는 더 바로 눈앞의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의료 환경 안에서 의사들과 일반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들이 인식하길 바란다. 질병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 가야 한다. - P31
충만한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회복을, 사고에서의 회복이 아니라 질병에서의 회복을 배워야 했다. - P40
추석 특집으로 정보라 작가님의 단편소설 ‘상어’ 수록, 정서경 작가님 인터뷰까지.오~ tvN에서 정서경 작가 극본의 [작은 아씨들]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