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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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하고 암울한 시대임에도 동시대의 유명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그의 상대성이론, 이후 양자역학 등 최신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전파하고자 한 조선의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과학사라기에는 과학이나 과학자 이야기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다. 언급된 인물들 각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는 마음이 들게하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민태기 박사의 <판타레이>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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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9월 7일,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으로 상륙을 준비하던 미군은 삼팔선 이남에 군정이 실시될 것을 선언했다. 급박해진 정세에 여운형은 미군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이미 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건준 위주의 정부를 구성하겠다며 8일 새벽, 미군에 그 명단을 전했다. 이 리스트에 함흥의전 교수 황진남이 포함된다. 하지만 9월 20일 조선총독부 건물에 미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이에 다시 여운형은 황진남을 대동하고 10월 4일 미 군정청을 방문한다. - P21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이처럼 해방공간의 분열과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여기에 이념이 만든 시대의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던 이야기도 있다. 어린 제자들과 동굴을 발견한 제주 김녕초등학교 교사 부종휴는 1947년 2월 24일, 학교 운동장에서 이 동굴의 이름을 ‘만장굴‘로 발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민이 여러 명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소요 사태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 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제주 4•3사건이라고 한다.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2018년)은 왜 재일 교포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일본에 남았는지를 말해준다. 그 배경에는 제주 4•3사건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 일본은 한국전쟁과 냉전을 이용해 고도성장을 하지만, 영화는 그속에서 빈민처럼 살아야 했던 재일 교포들을 보여준다. 일본 연극계의 거장이 된 재일 교포 정의신 감독의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008년)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찬가지로 재일 교포 출신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년) 역시 제주 4•3사건이 일본 교포 사회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 P234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인천항으로 귀국하는 남승룡 코치, 서윤복 선수, 손기정 감독. 우승 직후 여러 사정으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무려 43일간 미국 여러 곳을 돌며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집마다 30원씩 걷어 시민 환영회를 열었다. 3년 뒤, 1950년 4월 19일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1등에 함기용, 2등에 송길윤, 3등에 최윤칠이 입상하며 세계 마라톤 대회 사상 최초로 한 국가가 금•은•동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는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석권할 때까지 무려 57년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비극적인 전쟁에 휩싸인다. - P237

1946년 8월 지하련은 소설 《도정>을 발표했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해방공간을 그려낸 수작으로 높이 평가했다. 일제 말 문인들이 붓을 꺾을 때, 지하련은 오히려 〈결별〉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쏟아냈다. 끊임없이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고 세심한 사유와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하지만 지인들은 변절했다. - P238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 을 맞았다. 그토록 꿈꾸던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 것이다. 전날 여운형은 황진남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 브라운 소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 전역에 벌어지는 테러 행위에 치안 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며 항의했다. 이제 중간 지대는 용인되지 않았고, 어느 한쪽이든 선택만 강요되었다. 함흥에 가족을 두고 온 황진남은 여운형과 함께 필사적으로 좌우합작에 나섰다. 하지만 우파에게는 빨갱이라며 린치당했고, 좌파는 미제 협조자로 몰았다. 결국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합작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 P243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겨울, 우장춘이 가족을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소 직원들은 우장춘이 전쟁 중인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돌아와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종자밭 마련을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되었다. - P260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작전 문서에 공병우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이원익 타자기와 1929년 송기주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둘 다 세로쓰기 기반이었고, 공병우 타자기는 이극로의 영향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또한 서양 타자기와 달리 받침 구조를 위해 독특한 기계장치를 추가하여 자판 입력 속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글꼴이 나오도 록 고안했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 P271

8월 7일, 정부로부터 우장춘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오후 병실을 방문한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 P275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황진남 선생은 20년 가까운 세월 내가 쓴 원고를 번역해주시던 분이었다. 아들 같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나를 옆에 앉혀놓고 ‘헤네시‘나 ‘나폴레옹‘ 같은 독한 술을 브랜디 글라스에 듬뿍 마시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취해도 그때까지 프랑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부인에 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 아침 혼자 사는 숙사 침대 위에 누운 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_위진록. <고향이 어디십니까)>, 모노폴리, 2013년(298~299쪽 발췌)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한 황진남의 마지막 모습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 다니다 3•1 운동에 감격해 대학을 자퇴하고, 안창호를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리고 베를린 대학과 파리 소르본대학 유학 후 귀국하여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항일운동가 황진남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으로 갔고 결국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다.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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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도쿄.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 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 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 P181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한편, 1938년 12월 이태규는 일본과 대결 중인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일본 정부가 국비 지원을 거부한 가운데 이태규는 고집스럽게 아인슈타인이 있던 프린스턴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양자역학을 화학에 접목한 고분자화학의 대가 아이링 교수의 제자가 된다. - P185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 P187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황진남이 프랑스에서 귀국할 무렵, 과학 교육 등의 애국 계몽 운동이 일시에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엮은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 다. 그나마 소극적인 저항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규남은 교단에서 쫓겨나 농사를 지었고, 최규남의 처남 채동선 역시 칩거하고 농사에 몰두했다. - P193

변절은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진주에서 시 작된 형평사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순식간에 전 국으로 퍼졌지만, 이 무렵에는 쇠퇴하고 있었다. 여전히 백정을 천대하던 농민의 반형평사 운동도 있었지만, 형평사 운동 지도부의 노선 분열도 있었다. 일본 유학파 장지필은 사회주의 노선을, 강상호는 민족주의 관점을 유지해 서로 갈라섰고, 이후 강상호는 형평사 운동에서 손을 뗀다. 게다가 1927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이 구속되고, 1933년 형평청년전위 동맹 사건으로 형평사 지도부가 무너지자 형평사 운동은 급 격히 위축되었다. 이에 장지필은 1935년 형평사를 대동사로 변경하는데, 대동사는 서서히 친일로 돌아서 1938년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기에 이른다. - P195

하지만 친일파로 전향한 동지들과 어울리던 이현욱의 불편 했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임화를 간호하다 결핵에 걸린 그녀는 친정인 마산으로 홀로 내려가 요양하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 한다. 1940년 12월, 그녀는 ‘임화의 부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결별〉을 써서 등단한다. 그리고 변명으로 가득 찼던 동시대 지식인들과 결별 했다. - P199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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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남과 도상록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1935년 조선 전역에 발명 붐이 일어나 ‘과학데이‘를 기점으로 특허 출원이 무려 5배나 증가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36년 드디어 조선에 양자역학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소개한 주인공은 최규남과 도상록이었다. 1923년의 ‘상대성이론‘ 전국 순회강연도 그렇지만, 이 무렵 대중 과학 운동이 보급한 지식의 수준은 꽤 높았다. 그들은 교양 과학 뿐 아니라 당시 최신 과학 이론도 소개한 것이다. - P157

1920년대 상대성이론이 조선을 휩쓸었듯이 조선의 지식인 들은 새로이 떠오르는 양자역학 도입에도 과감했다. 대중 잡 지였던 《별건곤》이 1934년 1월 세계 과학계의 최대 존재는 아 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이라고 소개 한 이래 당시 신문들은 이를 둘러싼 논쟁도 보도했다. 1935년 7월 9일 《동아일보》는 ‘상대성원리의 비약‘에서 아인슈타인이 두 이론의 통합에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이어 10월 4일 ‘양자론에 관한 논쟁‘ 기사에서는 그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을 비교적 상세히 알렸다. - P160

1938년 1월 4일, 최규남은 ‘첨단 과학: 미래전의 신병기‘라는 장문의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무인비행기, 즉 드론을 소개하며 미래는 무인 기술이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선 조종을 위한 전자기파 기술의 최신 동향과 여기서 파생된 초기 형태의 레이저도 소개한다. 특히 로켓 발전에 주목하며 3단 로켓이면 달 탐사가 가능하다는 것과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예측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불과 1년 전이었다. - P171

두 사람 모두 김용관이 주장한 ‘이화학 연구소‘를 꿈꾸었고,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의 ’나의 백일몽‘이라는 코너에 안타까움 을 남겼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 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 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52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 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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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도쿄.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려는 움직임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고, 그중 단연 주목받은 것은 스포츠였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 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 P148

당시 조선체육회의 가장 큰 이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조선인의 선발이었다. 이때 일장기를 달고 나가야 할지 망설이던 손기정은 여운형에게 조언을 구했고, 여운형은 반드시 참가하라고 격려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처분을 받고 여러 직원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은 뒤 겨우 속간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은 올림픽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조선체육회는 결국 강제 해산되었다. - P150

손정도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김형직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손 목사는 부부가 사망하자 그들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일성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손 목사의 자녀인 손원일, 손원태, 손인실을 만나게 된다. 특히 또래인 손원태, 손인실과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해방 후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에게 맞섰다. 친일파로 공격받아 해방 정국에 힘든 삶을 살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을 거두어준 사람도 손원일 제독이다.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해 정전 협정문을 한글 타자기로 작성하게 만든 사람 역시 손 제독이다.
나중에 김일성은 1970년대 적십자회담에서 남한 대표단에 손인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인실, 원태 두 사람의 소식을 찾던 김일성은 마침내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 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상중임에도 한 달 뒤 8월, 아버지를 대신해 손원태의 80회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열었다. 같은 해,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 사장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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