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1935년 조선 전역에 발명 붐이 일어나 ‘과학데이‘를 기점으로 특허 출원이 무려 5배나 증가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36년 드디어 조선에 양자역학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소개한 주인공은 최규남과 도상록이었다. 1923년의 ‘상대성이론‘ 전국 순회강연도 그렇지만, 이 무렵 대중 과학 운동이 보급한 지식의 수준은 꽤 높았다. 그들은 교양 과학 뿐 아니라 당시 최신 과학 이론도 소개한 것이다. - P157
1920년대 상대성이론이 조선을 휩쓸었듯이 조선의 지식인 들은 새로이 떠오르는 양자역학 도입에도 과감했다. 대중 잡 지였던 《별건곤》이 1934년 1월 세계 과학계의 최대 존재는 아 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이라고 소개 한 이래 당시 신문들은 이를 둘러싼 논쟁도 보도했다. 1935년 7월 9일 《동아일보》는 ‘상대성원리의 비약‘에서 아인슈타인이 두 이론의 통합에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이어 10월 4일 ‘양자론에 관한 논쟁‘ 기사에서는 그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을 비교적 상세히 알렸다. - P160
1938년 1월 4일, 최규남은 ‘첨단 과학: 미래전의 신병기‘라는 장문의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무인비행기, 즉 드론을 소개하며 미래는 무인 기술이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선 조종을 위한 전자기파 기술의 최신 동향과 여기서 파생된 초기 형태의 레이저도 소개한다. 특히 로켓 발전에 주목하며 3단 로켓이면 달 탐사가 가능하다는 것과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예측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불과 1년 전이었다. - P171
두 사람 모두 김용관이 주장한 ‘이화학 연구소‘를 꿈꾸었고,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의 ’나의 백일몽‘이라는 코너에 안타까움 을 남겼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 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 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52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 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 P1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