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도쿄.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 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 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 P181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한편, 1938년 12월 이태규는 일본과 대결 중인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일본 정부가 국비 지원을 거부한 가운데 이태규는 고집스럽게 아인슈타인이 있던 프린스턴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양자역학을 화학에 접목한 고분자화학의 대가 아이링 교수의 제자가 된다. - P185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 P187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황진남이 프랑스에서 귀국할 무렵, 과학 교육 등의 애국 계몽 운동이 일시에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엮은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 다. 그나마 소극적인 저항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규남은 교단에서 쫓겨나 농사를 지었고, 최규남의 처남 채동선 역시 칩거하고 농사에 몰두했다. - P193

변절은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진주에서 시 작된 형평사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순식간에 전 국으로 퍼졌지만, 이 무렵에는 쇠퇴하고 있었다. 여전히 백정을 천대하던 농민의 반형평사 운동도 있었지만, 형평사 운동 지도부의 노선 분열도 있었다. 일본 유학파 장지필은 사회주의 노선을, 강상호는 민족주의 관점을 유지해 서로 갈라섰고, 이후 강상호는 형평사 운동에서 손을 뗀다. 게다가 1927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이 구속되고, 1933년 형평청년전위 동맹 사건으로 형평사 지도부가 무너지자 형평사 운동은 급 격히 위축되었다. 이에 장지필은 1935년 형평사를 대동사로 변경하는데, 대동사는 서서히 친일로 돌아서 1938년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기에 이른다. - P195

하지만 친일파로 전향한 동지들과 어울리던 이현욱의 불편 했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임화를 간호하다 결핵에 걸린 그녀는 친정인 마산으로 홀로 내려가 요양하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 한다. 1940년 12월, 그녀는 ‘임화의 부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결별〉을 써서 등단한다. 그리고 변명으로 가득 찼던 동시대 지식인들과 결별 했다. - P199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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