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도쿄.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려는 움직임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고, 그중 단연 주목받은 것은 스포츠였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 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 P148

당시 조선체육회의 가장 큰 이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조선인의 선발이었다. 이때 일장기를 달고 나가야 할지 망설이던 손기정은 여운형에게 조언을 구했고, 여운형은 반드시 참가하라고 격려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처분을 받고 여러 직원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은 뒤 겨우 속간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은 올림픽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조선체육회는 결국 강제 해산되었다. - P150

손정도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김형직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손 목사는 부부가 사망하자 그들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일성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손 목사의 자녀인 손원일, 손원태, 손인실을 만나게 된다. 특히 또래인 손원태, 손인실과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해방 후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에게 맞섰다. 친일파로 공격받아 해방 정국에 힘든 삶을 살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을 거두어준 사람도 손원일 제독이다.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해 정전 협정문을 한글 타자기로 작성하게 만든 사람 역시 손 제독이다.
나중에 김일성은 1970년대 적십자회담에서 남한 대표단에 손인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인실, 원태 두 사람의 소식을 찾던 김일성은 마침내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 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상중임에도 한 달 뒤 8월, 아버지를 대신해 손원태의 80회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열었다. 같은 해,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 사장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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