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9월 7일,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으로 상륙을 준비하던 미군은 삼팔선 이남에 군정이 실시될 것을 선언했다. 급박해진 정세에 여운형은 미군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이미 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건준 위주의 정부를 구성하겠다며 8일 새벽, 미군에 그 명단을 전했다. 이 리스트에 함흥의전 교수 황진남이 포함된다. 하지만 9월 20일 조선총독부 건물에 미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이에 다시 여운형은 황진남을 대동하고 10월 4일 미 군정청을 방문한다. - P21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이처럼 해방공간의 분열과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여기에 이념이 만든 시대의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던 이야기도 있다. 어린 제자들과 동굴을 발견한 제주 김녕초등학교 교사 부종휴는 1947년 2월 24일, 학교 운동장에서 이 동굴의 이름을 ‘만장굴‘로 발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민이 여러 명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소요 사태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 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제주 4•3사건이라고 한다.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2018년)은 왜 재일 교포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일본에 남았는지를 말해준다. 그 배경에는 제주 4•3사건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 일본은 한국전쟁과 냉전을 이용해 고도성장을 하지만, 영화는 그속에서 빈민처럼 살아야 했던 재일 교포들을 보여준다. 일본 연극계의 거장이 된 재일 교포 정의신 감독의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008년)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찬가지로 재일 교포 출신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년) 역시 제주 4•3사건이 일본 교포 사회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 P234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인천항으로 귀국하는 남승룡 코치, 서윤복 선수, 손기정 감독. 우승 직후 여러 사정으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무려 43일간 미국 여러 곳을 돌며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집마다 30원씩 걷어 시민 환영회를 열었다. 3년 뒤, 1950년 4월 19일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1등에 함기용, 2등에 송길윤, 3등에 최윤칠이 입상하며 세계 마라톤 대회 사상 최초로 한 국가가 금•은•동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는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석권할 때까지 무려 57년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비극적인 전쟁에 휩싸인다. - P237

1946년 8월 지하련은 소설 《도정>을 발표했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해방공간을 그려낸 수작으로 높이 평가했다. 일제 말 문인들이 붓을 꺾을 때, 지하련은 오히려 〈결별〉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쏟아냈다. 끊임없이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고 세심한 사유와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하지만 지인들은 변절했다. - P238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 을 맞았다. 그토록 꿈꾸던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 것이다. 전날 여운형은 황진남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 브라운 소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 전역에 벌어지는 테러 행위에 치안 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며 항의했다. 이제 중간 지대는 용인되지 않았고, 어느 한쪽이든 선택만 강요되었다. 함흥에 가족을 두고 온 황진남은 여운형과 함께 필사적으로 좌우합작에 나섰다. 하지만 우파에게는 빨갱이라며 린치당했고, 좌파는 미제 협조자로 몰았다. 결국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합작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 P243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겨울, 우장춘이 가족을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소 직원들은 우장춘이 전쟁 중인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돌아와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종자밭 마련을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되었다. - P260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작전 문서에 공병우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이원익 타자기와 1929년 송기주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둘 다 세로쓰기 기반이었고, 공병우 타자기는 이극로의 영향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또한 서양 타자기와 달리 받침 구조를 위해 독특한 기계장치를 추가하여 자판 입력 속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글꼴이 나오도 록 고안했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 P271

8월 7일, 정부로부터 우장춘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오후 병실을 방문한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 P275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황진남 선생은 20년 가까운 세월 내가 쓴 원고를 번역해주시던 분이었다. 아들 같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나를 옆에 앉혀놓고 ‘헤네시‘나 ‘나폴레옹‘ 같은 독한 술을 브랜디 글라스에 듬뿍 마시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취해도 그때까지 프랑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부인에 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 아침 혼자 사는 숙사 침대 위에 누운 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_위진록. <고향이 어디십니까)>, 모노폴리, 2013년(298~299쪽 발췌)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한 황진남의 마지막 모습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 다니다 3•1 운동에 감격해 대학을 자퇴하고, 안창호를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리고 베를린 대학과 파리 소르본대학 유학 후 귀국하여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항일운동가 황진남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으로 갔고 결국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다.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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