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데올로기 동아시아 라이브러리 2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윤여일 옮김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런 시대에 다케우치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번역해내고 있는 역자에게 우선 경의를 표한다.. 과연 어느 정도의 독자들이 다케우치의 글에 내재하는 아포리아를 읽어내는데 그 바쁜 시간을 할애하려 할까.. 분명히 다케우치의 글은 그다지 '친절한' 글이 아니다.. 더구나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글은 왜곡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그의 맹우였던 마루야마 마사오가 도달한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해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상'이라는 영위에서 다케우치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가 있다..

만약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첫 문장을 이렇게 쓰고 싶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다루기 힘든 사상가이자, '위험한' 사상가이다..

-여기서 '위험한'이라는 형용사는 물론 다케우치 자신이 오카쿠라 텐신이라는 근대 일본의 사상가를 논하는 글의 첫문장에서 텐신을 평하면서 썼던 형용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 형용사가 다케우치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험함'은 바로 그가 '일본 낭만파', '아시아주의', '근대초극론' 등 전후 일본이 팽개쳐놓은 금단의 영역 내부에서 사고했던 사상가라는 데서 나온다..

"'사이비 문명'을 허위화해 가는 작용은 사이비 문명의 내부에 있는 자만이 담당할 수 있으며, 밖에서 힘을 빌려와서는 할 수 없다"는 감각은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찾기 힘든 다케우치 특유의 독특한 자리이다..

 

예를 들어 전후 일본에서 파시즘의 한 갈래(公娼)로 비판받는 일본 낭만파에 대해, 다케우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전후에 출현한 문학평론들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일본 낭만파를 불문에 붙이고 있는 양상은, 특히 일본 낭만파에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까지 알리바이 제출에 바쁜 양상은 조금 기묘한 일이다."라는 감상을 피력하면서 "비판대상의 발생근거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근대 초극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942년에 열린 몇 차례의 좌담회에서 유래한 이 논의는 전후 일본에서 <대동아전쟁>의 악명높은 이데올로기이자 주술로 간주되곤 했다. 물론 근대의 촉극 좌담회는 분명 1942년이라는 시점에서 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이고, 또 그다지 깊이 있는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 다소 '허술한' 논의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다케우치는 전후에도 이 논의가 다시 소환되고 회고되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사상으로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묻혀 있는 기억이 아직 살아남아 곳곳에서 원한과 회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은 이 책 <일본 이데올로기> 역시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민중은 바보라서 도조(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총리이자, A급 전범)에게 속았고, 내버려두면 또 속을테니 "정말이지 위험"하다고 마쓰모토는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과연 민중은 도조에게 속을 만큼 바보였다. 그러나 속은 덕분에, 도조를 대신한 '민주주의' 지도자를 함부로 믿지 않을 만큼은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또 속는 게 아닐지를 의심할만큼 영리해졌다. 그렇게 영리해진 게 지도자의 눈에는 반대로 "도조의 재탕"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속는 데 넌더리가 나서 의심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의심하는게 나쁘다며 바보 취급하니 민중은 속상하다. 결국 지도자라는 건 모두 못됐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그리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민중의 진정한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민중이 지도자들만큼 도조를 무조건 신봉한 것은 아니다. 민중의 비협력은 도조조차 알고 있었다. 그 저항이 성장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불신하게 되었는데, 그 저항의 계기를 붙들지 않고 도조에게 굴복한 권위주의의 면만을 바라보고서 '민주주의'를 위에서 내리 눌러 저항을 뭉개려 한다면 도조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확실히 이런 문체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아니 문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위치 감각은 전후 일본에서든, 아니면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아마 어느 '진영'에서든 제대로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상이라는 '영위' 자체가 원래 그렇게 고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감각은 결코 정치가가 가끔씩 침바르듯 말하는 '선의'와 같은 그런 수준의 깊이가 아니다..

다케우치의 아포리아가 아포리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가 저 머나먼 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자를 넘길 것 같아, 리뷰로 대체한다..

100자평으로 후기를 남기는 것의 오만함을 경계하면서..

8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대해 100자평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꼬박 사흘에 걸쳐 끝까지 읽다.

이 정도의 집요하면서도 치열한 사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일본 사상계의 풍요로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이는 무엇보다 번역된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인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풍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경지이다.. 

예전에도 어딘가에 쓴 바 있지만, Dits et ecrits가 번역된 사회와 번역되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분명하다.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적으로 논할 수 있는 학문적 풍토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라는 저자의 '비범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구나 르장드르의 저작 한 권 번역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찌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에서 사사키가 가장 몸을 낮추고 글을 쓰고 있는 장 역시 르장드르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아직 2차연구들이 많이 소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사키 역시 그의 논의를 충실히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후기 푸코의 아포리아에 대한 집요한 추궁은 이제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수준의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가치가 있다.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권력을 시계열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푸코의 강의록이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공유된 것 같다.. 통치성의 문제의식도..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에 대한 절 역시 르장드르의 몽타주론(?)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면 참 쉽지만, 이 논의를 끌어내기 위해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순으로 꼼꼼이 읽어나가면서 추리소설을 쓰듯이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라캉, 르장드르, 푸코라는 사실 어느 하나 범접하기 어려운 세 저자를 묶어내면서 저자가 이끌어내는 결론은 힘이 조금 많이 떨어진다..

그래.. 블랑쇼를 인용하며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야전과 영원>이라고 붙인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왠지 그 가벼움은 역사의 진공상태, 무풍지대와 같은 전후 일본사회라는 토양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상이 정말 <강철같은 페시미즘>을 거친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상(?)이 진정 투쟁의 무기였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볍고 안이한 결론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사상은 종종 무미건조한 교조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치열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는 지적 유희로 치부되어 등한시되어버린다.. 우리는 아주 가끔 사상이 원석처럼 빛을 발하는 시기를 이후에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18세기 중반, 혁명 전야의 프랑스나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 혹은 20세기 초의 빈과 같은.. 하지만 사상은 그 위험함 때문에 혁명 이후, 혹은 반혁명을 거치면서 가장 극렬하게 탄압을 받았다..

과연 사상 자체를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까.. 물론 그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아주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아시아 침략을 용인해버린, 나아가 전시체제에 협력해버린 자신들의 나약함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전개되던 시기가 있었다..

왠지 후지타 쇼오조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읽고 싶어졌다..

 

cf. 저자의 논의를 둘러싼 격투는 서평과 같은 <장치>가 아닌 다른 개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바일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2-03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30년대 혁명운동사에서 소비에트를,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세계 인민들에게 유토피아와 악몽을 동시에 주었던 그 공과 과를 과연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스페인 내전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프랑코의 칼이 공화국을 둘로 가르고 마침내 그 심장에 칼을 꽂기 전에 이미 공화국은 내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 vs. 공산주의..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에 대한 답을 앤터니 비버는 교묘히 피해간다. 패자에 대한 감정적 연대 속에서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심지어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더 과거의 동지들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심지어 반역죄와 같은 무고죄로 처형당해야 했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좀 더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듯 하지만, 아나키스트의 낭만주의적 전술이 1930년대 당시의 현대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도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에게 역사란, 그가 인용하는 W. H. Auden의 말처럼, "패자에게 "아, 가엾어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패자를 돕거나 용서할 수는 없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의 불간섭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이 부분을 몇 차레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뭇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병사들의 노골적인 개입,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실질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독일 콘도르 군단(비행대)와 같은 화려한 팀플레이에 비해,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의 운명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당시 그들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공산주의>였기 때문일까.. 아니, 프랑코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그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더 들어맞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내전은, 그것도 이념의 충돌에 의해 빚어지는 내전은, -누가 승리하든-, 그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생채기를 낸다.. 스페인, 한국, 칠레.. 이 나라들은 모두 근대사에서 내전과 그에 버금가는 쿠데타를 겪었고, 그 상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아물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고통을 주고 있다.

몇 개월째 지속되는 촛불집회,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자 나선 정체불명의 <반촛불집회>(태극기집회?)를 보며 그런 생각이 부쩍 들었다.. 얼마 전 심지어 군대에 <궐기?>를 호소하는-한 마디로 쿠데라를 권유하는 <반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무시무시한 선동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을 단지 <광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레드 컴플렉스>, 그리고 그 공포를 밑바닥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의 구조에 대해 우리 사회가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감정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양자 사이의 이성적인/합리적인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탄핵이 되든, 되지 않든 이 사회의 분열의 고랑은 당분간 메워질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 밑바닥의 감정의 구조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이해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학문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의>를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물론 그 어려운 분석 작업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방법론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 공동작업이 아니면 불가능할텐데.. 과연 선입견을 버리고 선뜻 시작할 사람들이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월 2일 제주도로 떠나는 길에 꺼내든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2월 26일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읽고 있다..

 

왠지 굉장히 오랫동안 집을 떠난 듯한 느낌이다..

그 사이에 줄곧 뭔가 다른 책을 꺼내 읽기도, 또 간단한 필드조사를 하기도 했지만, 제발트의 이 책은 끝내 읽지 못하다가, 오늘 왠지모를 의무감때문에 다시 꺼내들어 읽었다..

제발트의 이 여행기는 홀로 떠나는 여행자/방랑자가 플랫폼에서 전차를 기다리며, 혹은 기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에 지겨울 때쯤 꺼내 읽는다면, 훨씬 몰입도가 높았겠지만..

이번 내 여행은 거의 모두 동행들이 있었기 때문에-더구나 연일 저녁이면 벌어졌던 술자리의 후유증 때문에- 사실 한낮에 한가로이 책을 꺼내들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왁자지끌한 여행과 제발트라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인가..

 

나로서는 <아우스터리츠>-<공중전과 문학>-<토성의 고리들>에 이어 네번째 접하는 제발트의 작품이지만, <현기증. 감정들>은 이전의 저작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소름끼치는 메시지 혹은 감각적 떨림같은 것은 없었다..  

1813년 스탕달의 이탈리아 여행, 1913년 카프카의 이탈리아 여행..,

그리고 제발트 자신의 1987년 이탈리아 여행.. -2013년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과,

30여년간 떠나 있던 고향으로의 여행-귀향

이라는 네 개의 성좌를 카프카의 짧은 소설, <사냥꾼 그라쿠스>의 모티브를 통해 연결시키려는 제발트의 집요한, 그리고 꽤 성공적인 시도에는 나름의 평가를 보낼 수 있겠지만, 그런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지적 즐거움을 과연 어느 수준의 독자가 향유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어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모임에서 잠깐 나왔던 이야기지만..

<율리시스>는 이미 조이스 자신이 상정한 아주 극소수의 독자를 위한 작품일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데 그 극소수의 독자들과 자신을 위해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난해한 작품을 쓴다는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이야말로 <모더니즘>의 기획이라고 해야겠지만..

세계사에서, 그리고 사상사에서 모더니즘의 출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뜬구름같은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

제발트 역시 그 계보에 속하는 것일까..

<1913년>에 대한 의미부여에서 그 혐의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긴 한데.. 

 

1913년은 특별한 해였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였으며, 점화된 불꽃이 풀숲 사이를 미끄러지는 뱀 모양의 도화선을 따라 불안한 섬광을 발했다. 지상의 모든 장소에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격하게 피어올랐다.

 

....

 

그럼에도 역시 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들..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물은 항상 간절함이 사라진 다음에야 나타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서가 바뀌었지만, 내가 페소아를 알게 된 것은-안다는 것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져야 겠지만-

안토니오 타부키를 만난 이후였다.. 이탈리아인이었던 타부키는 페소아와, 그가 살았던 도시 리스본에 매료되었고, 페소아가 남긴 글들을 번역하면서, 리스본을 무대로 한 소설들을 써내려갔다..

타부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페소아는, 어딘지 몽환적이었고 마치 타부키의 작품에 드리워진 아우라같은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 서가에는 세 권의 페소아가 들어와 앉아 있지만, 이 책들 모두 한동안 먼지만 쌓인 채 꽂혀 있었다..

까치에서 번역되어 나온 축약본

배수아의 독어 번역판

그리고 문동의 포르투칼어 번역판..

 

아무래도 단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라, 책상 앞에 앉아 있기에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명절때 틈틈이 읽어볼까 하고 오랜만에 꺼내보았지만, 역시 이래저래 분주한 명절과 페소아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의 평생의 업이었던 문학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무실 책상에서 일하다가 하숙집(단칸방)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지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독백같은 문장들로 짜여진 이 텍스트는 아무래도 여느 소설책들처럼 읽어내려가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직접 만나면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겠지만, 결코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틈 같은 것을 줄 것 같지 않은 이 고독한 독신의 시인/소설가가 늦은 밤 자신에게 나긋나긋하게 말을 거는 듯한 이 작품을 읽다보면 가끔, 아니 종종 보석같은 구절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졌다고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생각을 가지고 느끼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은 생각을 키우는 양식이다.

 

모든 환상과 환상에 속한 모든 것-환상을 잃어버림, 환상을 갖는 일의 부질없음, 결국은 잃어버리기 위해 환상을 가져야 하기에 미리 느끼는 피곤함, 환상을 가졌던 것에 대한 후회, 그렇게 끝날 걸 알면서도 환상을 가졌던 자신의 지성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한 피로.

삶의 무의식에 대한 자각은 지성에 부여된 가장 오래된 세금이다. 영혼의 섬광, 이해의 흐름, 불가사의와 철학 등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지성이다. 이들은 신체의 반사작용과 비슷해서 간과 신장이 분비물을 내듯 저절로 반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