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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100자를 넘길 것 같아, 리뷰로 대체한다..
100자평으로 후기를 남기는 것의 오만함을 경계하면서..
8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대해 100자평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꼬박 사흘에 걸쳐 끝까지 읽다.
이 정도의 집요하면서도 치열한 사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일본 사상계의 풍요로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이는 무엇보다 번역된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인용할 수 있는 수준의 풍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경지이다..
예전에도 어딘가에 쓴 바 있지만, Dits et ecrits가 번역된 사회와 번역되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분명하다.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적으로 논할 수 있는 학문적 풍토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라는 저자의 '비범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구나 르장드르의 저작 한 권 번역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찌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에서 사사키가 가장 몸을 낮추고 글을 쓰고 있는 장 역시 르장드르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아직 2차연구들이 많이 소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사키 역시 그의 논의를 충실히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후기 푸코의 아포리아에 대한 집요한 추궁은 이제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수준의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가치가 있다.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권력을 시계열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푸코의 강의록이 출간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공유된 것 같다.. 통치성의 문제의식도..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에 대한 절 역시 르장드르의 몽타주론(?)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면 참 쉽지만, 이 논의를 끌어내기 위해 푸코의 텍스트들을 시계열순으로 꼼꼼이 읽어나가면서 추리소설을 쓰듯이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라캉, 르장드르, 푸코라는 사실 어느 하나 범접하기 어려운 세 저자를 묶어내면서 저자가 이끌어내는 결론은 힘이 조금 많이 떨어진다..
그래.. 블랑쇼를 인용하며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야전과 영원>이라고 붙인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왠지 그 가벼움은 역사의 진공상태, 무풍지대와 같은 전후 일본사회라는 토양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상이 정말 <강철같은 페시미즘>을 거친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상(?)이 진정 투쟁의 무기였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가볍고 안이한 결론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사상은 종종 무미건조한 교조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치열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는 지적 유희로 치부되어 등한시되어버린다.. 우리는 아주 가끔 사상이 원석처럼 빛을 발하는 시기를 이후에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18세기 중반, 혁명 전야의 프랑스나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 혹은 20세기 초의 빈과 같은.. 하지만 사상은 그 위험함 때문에 혁명 이후, 혹은 반혁명을 거치면서 가장 극렬하게 탄압을 받았다..
과연 사상 자체를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까.. 물론 그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아주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아시아 침략을 용인해버린, 나아가 전시체제에 협력해버린 자신들의 나약함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전개되던 시기가 있었다..
왠지 후지타 쇼오조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를 읽고 싶어졌다..
cf. 저자의 논의를 둘러싼 격투는 서평과 같은 <장치>가 아닌 다른 개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바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