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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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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작가도 화가도 창녀도 아닌데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고인이 된 분에게 할 말은 아니나 참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인으로도 밥먹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만으로 아이들을 키우긴 힘들었을 것이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문학이라기 보다는 수필형식을 취한 일종의 자서전이라는 느낌이 든다. 작품으로서 평을 하고 서사에 관여하기가 참 난감한 것이다. 그리곤 자꾸 인생에 관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가 무어라고 남의 인생을 평하고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도 위선이다. 웃긴 거다. 만약 내가 반기문이나 오바마의 자서전을 읽고 글을 쓴다면 본받을 점을 하나라도 찾아내어 내 인생에 책값 만큼이라도 도움을 얻고자 그들의 인생을 관찰했을 것이다. 작가는 창녀였고 소설은 창녀로 살아간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멈칫하는 내 자신은 같은 여자로서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시간들이 자꾸 다가오는 겨울마냥 떨리고 쓸쓸했다. 어느새 많이 추워지고 있었다. 추위를 준비하고 싶지 않은 미련이 어울리는 책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꾸 두 손으로 애꿎은 어깨를 주무르곤 했다. 머리와 마음뿐 아니라 피부의 감각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지막 한숨은 길고도 무거웠음이다. 딱딱하게 말라버린 살갗을 뚫고 나온 최후의 수증기 같은...모두 내 것인데 그 낯설음도 버거웠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사진으로만 판단하자면 줄리엣 비노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딱 반반씩 섞은 묘한 얼굴이다. 강렬했다. 뭐랄까 프랑스식 자유와 미국의 실용이 적절히 배합된. 호기심에 이끌려 뒤져본 그녀의 사진은 투병중인 병원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아무런 주석도 소개도 없다면 사진만으로는 전혀 직업이 창녀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넘치는 고결함이 느껴졌다.(그렇다고 창녀사진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선입견이 그 눈빛에 부끄러워지는 순간, 속에서 물컹한 무엇이 출렁였다. 책으로..글로만 엿본 그녀는 만신창이가 다 되어 형편없이 피폐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한창 창녀일을 할 젊은 시기엔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 오드리 헵번의 깨끗함도 저리 가라 할 매력은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물론 사진이야 설정이나 웃음이 의도되었을 수 있지만 찰나의 짧은 순간도 그 시절 길고 긴 시간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 동영상을 찾아 더 살아있음을 느끼기로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귓가에 스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잊지 못하고 번역을 하게 되었다는 옮긴이의 말이 생각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뒤지곤 그녀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에 그녀의 시신이 제네바 묘지에 이관될 때 그녀를 추모(?)한 어느 동영상에선 춤추는 그녀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름한 방에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예술을 하다 간 것이었다. 그림도 그릴 줄 알고 글도 쓸 줄 알았지만 혼자서 만끽해야 할 고독이 아니라 두려움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에 꽃을 피우는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그래야 내가 덜 슬퍼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당당한 하나의 예술행위로 생각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은 다행히 그녀의 적성(?)에 맞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예전에 '직업체험관'이라는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직업적성 검사 존(zone)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끼리 우스개 소리로 창녀도 어엿한 직업인데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필요한 능력이 있을테니 이색직업에 왜 넣지 않는 것이냐 농담따먹기 한 적이 있다. 아마 그리젤리디스가 우리 회의에 자문을 해주었다면 그녀는 일장연설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았을까. 우린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대지 않았을까. 비록 굶주림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단지 그만둘 기회가 없어서 혹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창녀를 지속해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직업적 보람, 정당성, 의미부여면에서 결코 짧게 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되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우리 발목을 잡는다.


검정도 마음이다 

저자는 여섯 살에 흰 가운을 입은 독일인 의사가 자신의 편도선을 떼어내는 동안 그 옆에서 손잡아준 흑인 간호사를 시작으로 흑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전 생애에 걸쳐 이어간다. 『검정도 색깔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실은 '검정도 사람이다'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검정색을 독립적인 색감으로 인식했다기 보다 흰색이나 검정이 아닌 나머지 색깔들에 대한 상대적인 색감으로서의 색성(色性)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한창 전쟁중이던 유럽에서 독일인을 향한 증오와 경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성된 자연스런 가치관이었을 것이다. 성장한 후에는 기독교적 시각과 사회 계층적 시선에 대한 반기였을 것이다. 전쟁세대들이 빨간색을 빨갱이로 동일화하듯 색깔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다분히 이데올로기가 반영되 있다는 느낌이 든다. 허리우드 영화에서 주로 흑인은 범죄자, 빈곤층으로 등장하는 장면에 생각없이 노출된 우리로선 참 신선한 시작이었다. 그때 그녀가 흑인간호사의 무릎에 앉지 않고 동양인의 보살핌을 받았다면 그녀는 무어라 말했을까. 흑과 백의 대립이 주는 극적 재미가 반감되는 황인종은 그때부터 주연은 아니었던 것인가 보다.

그녀는 교사였던 부모 밑에서 엄격한 청교도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취리히 장식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스위스 로잔 태생이(기까지 하)다. 올림픽의 도시, IOC본부가 있는 로잔엔 올림픽 박물관(Le Musee Olympiqe)이 있다. 우린 공공디자인을 벤치마킹하러 로잔까지 날아갈 뻔 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본다면 당연히 프랑스로 유학하여 산업디자이너가 될 듯한 삶의 이력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의 인생은 로잔만큼 향기롭진 않았다. 반드시 한번은 꿈이 꺾이고 말았을 터, 그런 그녀...스스로 집시의 피를 물려받았으며 밤을 사랑한다는 예술가 성향을 지닌 그녀에게 검정은 일종의 꿈과 맞바꾼 절망의 색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희고 깨끗하면서 속으로 시커먼 위선을 감춘 자들이 아닌 겉으론 암흑과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면서 속으론 욕망에 깨끗이 승복한 자들의 진짜 마음색깔을 보게 된다. 물론 모든 검정이 다 솔직하고 문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걸핏하면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주인공이 되어 그녀를 배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선천적으로 인간의 검은 본능에 이끌려하는 본능에 솔직함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크리에이티브가 있었다. 다시 검정을, 희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인식해야 하기도 했지만) 예술가에게 검정은 하양이나 빨강, 파랑이나 초록과도 공평해야 한다. 그녀는 예술을 할 수 없었어도 예술적 가치만은 잃지 않고 검정을 사랑한다. 실은 자신을 향해 '검정도 색깔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겠지만, 그녀는 부러 그렇게 한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더 보란듯이. 그녀는 백인에게서 아이를 낳았지만 파경 후엔 줄곧 흑인과 사랑을 하는 집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창녀일을 할 때엔 백인은 받지 않는 나름의 자존심으로 오히려 백인을 자극하고 조롱하며 복수하는 면모도 보여준다. 그녀에게 검정은 색깔이 아닌 마음깔 아니었을까.


검정도 사랑이다

 

그녀는 20세에 결혼하지만, 6년 만에 파경을 겪은 후 독일로 떠난다. 토끼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였다. 책에서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던 흑인 애인을 구해내어 같이 도망치는 모험을 감행하는 용감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사랑을 할 때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불 안가리는 예술가 특유의 광기어린 열정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가 사랑하는 흑인들의 가슴에 안겨 사랑에 복받침을 노래할 땐 한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시적부력이 습관화된 작가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터라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서사시들이 반갑진 않았으나 그 문학적 표현력만큼은 목메이도록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온몸으로 뼛속까지 울어본 자 만이 토해낼 수 있는 외침이고 울음이었다. 폐부 깊숙한 상처로 피 흘려본 자만이 내뱉는 노래였다. 그녀는 현장을 묘사할 때도 사람을 그릴 때도 아주 색감좋은 물감으로 굵은 터치의 그림을 그리듯, 마치 원고지를 캔버스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하고 볼륨감있는 회화적 문체는 책을 덮고도 잔상으로 남았다. 작가들마다 관용스러운 표현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녀의 인물묘사엔 유난히도 동물들이(불독, 황소, 코끼리, 고양이, 호랑이, 늑대, 까마귀등)자주 등장해 그 인물군상들이 동물의 사육제를 연상케 했다. 덩어리로 묘사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때론 야만스럽게 때론 원색적인 야성미를 제공해 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육체에 굉장한 자기애가 형성된 여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방광염이나 매독에 걸려서 육체와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서도 심리적으로는 자기파괴가 일어나지 않아 절대 자신에 대한 패배감은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자부심이 직업적인 결과인지 그러했기에 직업적인 자괴감을 느끼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많은 남성들과 오가는 폭력적인 장면에서조차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가 두들겨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폭력을 한껏 조롱하고 비웃어 주는 것 같았다. 그때의 상처들을 이렇게 더 아픈 글로써 치유한 것은 아니었을지.

책에는 많은 흑인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그 모두를 최고로 사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흑인들을 만나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상처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성장한 듯하다. 정신병자 빌의 경우 어쩌면 지난한 도주와 인생 추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그를 증오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굶주림속에서도 자신의 학업과 취미, 교우관계에 있어 철저히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준 빌이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말한다. 하늘색 캐딜락을 모는 흑인친구와는 헤어진 뒤에도 집시 야영장에서의 파란색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배신마저 하늘에 띄워 버린다. 그러한 순정을 아는 '새까만 쁘띠슈슈'라 불린 흑인은 그녀로부터 매독에 전염되었으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배려하며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선사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왜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기약할 수 없었을까.

그녀가 그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던 열아홉, 로드웰. 그녀는 로드웰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집시 야영장과 호텔을 전전긍긍하는 길거리 생활에서도, 로드웰이 군인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도, 자신이 7개월간 형을 살고 나왔을 때에도 좀처럼 헤어지지 않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사무치는 아픔이었던가 보다. 우연히 발을 들여 놓게된 마리화나 밀매를 왜 적절한 선에서 그만두지 못했는 지 창녀로서의 삶과 직업적 선택보다 더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마약의 원산지 모로코로 가야했는 지 돌아와서도 적당한 시점에 발을 뺄 수는 없었는 지 본인도 그부분 만큼은 통한의 후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있었는데도 끝까지 발을 빼려하지 않은 점은 화가 나도록 많이 실망스러웠던 그녀의 치명적인 과오...였다.


검정도 아름다움이다



그녀의 순탄치 않은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가족이상의 존재들. 그녀는 헝가리계 독일인 소냐와 집시들의 아버지 타타를 중심으로 한 집시들과의 소란스러우면서도 소박한 식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마음과 몸을 부비고 한데 모여 정을 주고 받은 그녀의 집시야영장 시절이 한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녀가 '매춘도 혁명이다' 주장한 부분에는 온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전후 당시 창녀의 사회적 역할에는 많은 기여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다. 그녀는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어를 하며 독일에서 살았다. 제네바는 국제적 매춘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뮌헨은 전후 다양한 국적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이미 유명세를 탄 인사로서 1975년 '창녀들의 혁명'을 외쳤다. 그리곤 다시 제네바에 자료센터를 만들고는 병들어 왕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 시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남성들을 위로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국가에서 인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치면 그 공로는 우리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더 억만금일 터이다. 나는 그녀가 예술가로서 창녀를 부르짖고 예술로서 창녀의 역할과 권리를 말하였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불문율과도 같은 주홍글씨가 낙인이 아닌 감사패로 여겨질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사회에선 아무리 재능많은 예술가라도 사생활이나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 똘레랑스가 잘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인으로서의 책임이나 본보기를 더 강조하여 조그만 실수나 잘못이 감지되면 사회적인 맹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 책 외에 그녀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양한 방법으로 매춘을 표현하고 설득, 공감, 이해시키려 죽기 직전까지 활동한 듯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매춘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과 이야기들은 오히려 그녀의 매춘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감흥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머리로만 이해하고 끄덕이는 것은 공감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울리게 하는 그녀만의 가장 자신있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재능이 그녀의 쓸쓸했던 인생만큼이나 안타까왔다. 우리는 이 같은 발견의 행운만큼 그녀를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

많이 힘겹고 당황스런 독서였다. 책을 덮고 나면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고, 이전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이 작가에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냥 프랑스 팡테옹과 비교된다는 제네바 왕립묘지로 달려가 그녀의 이름앞에 꽃 한송이 바치고 싶다. 세상 누구보다 뜨겁게 살다 간 사람에게 다시 태어나도 그보다는 뜨겁지 못할 것 같은 존경의 인사는 하고 싶어진다.  

 

 

오늘 나는 작가, 화가,창녀라 쓰여있는 그녀의 묘지앞에 고개숙인다. 당신의 글은 당신의 그림은 당신의 사랑은 모두 검게 불타오르던 완전한 인생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캄캄한 하늘에 당신의 이름을 세 번은 불러보겠다고. 그 이름은 하늘보다 검더라도 분명한 색깔로 기억하겠다고. 그 색깔은 내가 아는 이 세상 어떤 색깔보다 아름다웠다고.
 




<덧붙임> 

사진출처:

http://rezo.photoshelter.com/image/I0000xjiH9eXVG1k
http://www.myspace.com/maggykills
http://www.rfi.fr/actues/articles/122/article_14405.asp
http://www.rtve.es/mediateca/videos/20090311/entierro-una-prostituta-ilustre/444729.shtml
http://www.rtve.es/rss/videos/noticias/TE_PSUIZA.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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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5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가족이 남기고 간 빈자리를 치유하는 과정은
고향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 한술과도 같다. 
그녀의 소설은 꼭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그 때 세상에 나온다.
죽어도 괜찮을 지 끊임없이 타진할 때 돌아온다.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혼자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그녀의 위로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마치 알고나 있었던 사람처럼.


소설가의 자전소설은 소설가의 그냥 소설보다 재미가 없다.
그래도 궁금하다. 소설가는 그 점도 이용하는 꽤 머리좋은 사람들이다.
첫사랑을 팔고 선생을 팔고 가족을 팔고 취미도 습관도
모두 팔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
아팠겠지만 그래서..글을 쓸 수 있었을 테다.
상처도 자산인 그들의 이야기가 그립다.
우리 상처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그래서 몰래 위로가 되는.

 
단편을 잘쓰는 작가들은 성능좋은 칼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와 같다.
도루코보다 헨켈이 더 좋은 이유를 잘 아는 주부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칼질이 능숙한 소설가는 세상을 예리하게 베어낸다.
그리곤 삶의 조각들이 내 일상과 겹쳐지면 그 때 깨닫는다.
사는 건 거기서 거기.
가을이 떠나도, 세월은 계속됨을. 우린 서로가 구경꾼이었음을.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고양이나 개가 등장하는 서사를 선호하지 않아왔다.
이쯤에서 불공평한 기준을 타파해 보고픈 욕구가 생기는건,
문학에 고양이가 대세라거나 문학상이 궁금하다거나
혹은 작가의 연배가 비슷하다거나...암것도 아니다.
멕시칸 사라다를 떠올리는 그 '사라다'라 말할 수 있는
순박이 좋아서다. 정말.

작가가 되지 못한 나는 늘, 작가의 꿈을 키우는 이야기에
마음이 기운다. 그리곤 울어 줄 것이다.
여성작가의 건조하고 냉정한 문체라 했다.
본능적으로 여성작가의 최루성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팔짱끼고 그래? 해본다. 그건...쉬운 일이 아닐게다.
뼛속까지 울어 본자 만이
웃어줄 수 있는 내공이다. 골수에 사무친 글이 아니기만 해봐. 

 

시월이 갔다. 
11월이 마지막은 아니다.
그래도 급하다.

서둘러 겨울을 준비하는 이들이여
아직은 다 끝난 것은 아닌 게다. 
조금은 더 그립고
보냄이 사무친다.

산다는 건,
보내는 것에 울더라도
다가올 것에 웃을 수 있는
손바닥 같은 것.

뒤집자...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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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 선사 삼국 발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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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느끼는 것

나는 오랫동안 박물관(Museum)기획으로 밥을 먹었다. Muesum 의 영역에는 크게 역사관과 기념관, 사료관을 비롯해 과학관, 홍보관, 비지터 센터등의 하위 분야가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공모를 하면 이상하게도 역사관련 분야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과학관, 홍보관 쪽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성적대로 전문분야가 정해지는 꼴이었다. 역사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았음에도 과학을 남달리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보면 거기엔 늘 사람이 있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역사박물관을 하나 건립하려면 그 분야의 역사학자와 고미술 전문가에게 시공하는 순간까지 자문을 받아야 한다. 나는 계획초기 단계에서부터 그들과의 만남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미술사 전공자들의 자존심과 역사학자들의 자긍심과 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달라지는 Museum의 주제에 따라 해당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왔지만 그들만큼 고집이 세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일반 관람객이 느끼는 전시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들 앞에서만 서면 나는 역사도 미술도 뭣도 모르면서 가벼운(?) 디자인으로 유물을 망치는 기획자가 되어 있곤 했다. 그래서 내게 있어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고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통 불가한 대화상대'라는(그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낙인이 찍힌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이번에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Ⅰ』를 접하면서 어렴풋이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책이 그때는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들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고 미팅에 임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시험치듯 내용을 암기한 것이지 전시물이 될 뻔했던 그 유물들을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차이를 시원하게 한방 가르쳐준 책이었다고 할까.

이 책은 저자의 소개대로 '한국미술사 입문사'를 표방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발을 처음 들여 놓음에 있어 부담스럽지 않은 개론적 지식과 통사通史를 풀어 놓았다. 한번 마음먹기 어려워서 그렇지 실은 시작이 반인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같은 비전공자로서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이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많을 듯하다. 이로써 넘치게 충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단답형 수준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한자리에 총체적으로 모인다는 기념비적 의미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 보아도 화보의 질이나 부록으로 첨부된 요약노트까지 어디 한군데 빠지는 곳이 없어 그 소장가치도 뛰어나다. '내가 꼭 제대로 정리를 하고 말겠다'는 학자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페이지마다 결결이 느껴졌다. 시작은 학생들의 요구로 부터였다 하지만 기왕 칼을 빼어들었으니 그의 바램대로 앞으로 '통일신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3년 안에 정리된다면 한국미술사에도 커다란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큰일을 하셨다.

가을이 시작되자 마자 이 책을 선물받았다. 지난 두주 가량 소설을 읽다가 마음이 멀어지면 지나간 강의노트를 들쳐보듯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쉬이 넘겨가며 서두를 필요도 없지만 편한대로 한번 마쳤다고 덮어둘 책은 아니다. 머리가 복잡하면 텍스트를 외면하고 사진만 보아도 마음이 정돈되는 일종의 심리안정격의 뉘앙스를 가진 서적이다. 아주 아주 오래전 같은 나라에 살았던 같은 민족이 만들었다는 예술품이다. 그들이 붓을 든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칼을 만지는 걸 본 적이 없으나 이상하게도 살아가는 삶의 기운이 느껴진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인 앙리 포시옹은 '삶은 형태이며,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고 했던가. 포시옹은 미술가로서의 삶을 형태라는 독립적 가치로 보고 결국 미술사 연구는 형태의 삶을 찾아내는 것이라 하였다. 형태를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변화가능하고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는 생명성을 띤 가능성의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태의 변화를 알고자 하는 것은 굉장히 미래적인 욕구이며 과정 또한 역동성을 수반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국사시간에 삼국시대 고분의 형태와 신라시대 불상의 외양적 이미지를 주어진 대로 정지된 존재로서 감상하고 암기해왔다. 마치 과거 어느 시대에 잠시 발을 멈추고 한 장의 스틸 컷을 박아 넣듯 그렇게 차곡차곡 데이터베이스를 쌓아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 사진을 찾으려면 붙박이 사진을 떼어내듯 정확하게 그 부분만 뽑아야 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 우린 앞뒤 맥락없이 다시 그 사진을 스스로의 힘에 의해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 책은 어찌 보면 그동안의 우리 역사와 미술 교육이 참 획일적이고도 무책임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 책에선 예술품이 가지는 형태를 정사진이 아닌 움직이는 활동사진화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형태를 다시 명상화, 감성화 하는 텍스트의 진심이 있다. 분명이 살아있다고 느껴지는데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란 그런 것일까. 살아있는 것을 지켜보고 생명의 힘을 느끼는 것은 숨막히는 일일지 모른다. 이 책은 분명 형태가 가지는 '생명의 신비'와 그로인한 '정적인 감동'을 보여주고 가르쳐준다.


발견의 기쁨

책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발해까지 시대별 미술의 특징을 역사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모든 시대에 공통으로 서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관계'와 '미학'에 있다. 즉, 공히 각장에서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를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예술품에 대한 미학적 표현을 곁들였다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소상히 알려주면서 독창적인 예술적 가치를 저자만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미술 각 분야를 아우르는 이 설명방식은 어떤 부분에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특히 작품 하나를 공들여 표현해내는 풍부한 언어의 유려함과 그 전문성이 가장 인상깊었다. 우리는 그동안 유물을 머리로만 기억한 것이지(그 기억도 이제 희미하지만) 마음으로 느낀 적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내 눈으로 본 것들이지만 다시 가슴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감성적 가이드였다.

선사시대에서 발견한 우선된 느낌은 '추상성'이었다. 잘 알려진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타래무늬, 번개무늬의 토기를 나란히 배치해 바라보면 그것은 의미없는 직선과 곡선의 반복이 아니라 그 반복에서 전해지는 生의 리듬과 또렷한 패턴이 있다. 특히 타래무늬, 번개무늬 토기를 바라보면 그것을 제작한 사람들이 어떤 신명이나 활기를 지닌 채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책에는 신석기인들이 사물을 '의식'으로 파악했기에 부호화, 개념화, 상징화하려는 경향이 추상무늬로 나타난 것이라 설명한다. 왜 나는 빗살무늬의 직선이 생선뼈를 상징했으며 생선뼈는 정복의 의미로서 사냥과 주식의 풍요로움을 소원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디선가 한번은 들었을지 모르나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신선함이었다. 삶의 형식이 예술적 태도를 지배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우쳐준 무늬들이기도 했다.



<잔무늬거울. 청동기. 지름 21.3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이 추상성이 결정타를 날린 것은 청동기 시대의 잔무늬거울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던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유물이기도 했고 무늬의 정교함이 아주 편집적인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동거울은 얼굴을 들여다 보는 용도가 아니라 제관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용도였다. 무당의 놋거울처럼 제관의 상징적 지물이라는 것이다. 2400년 전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어느 장인은 지름 21.1cm의 원에 1만3000여 개의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을 0.3㎜ 간격으로 그려낸 것이다. 확대경이나 초정밀 제도기구없이 어떻게 이토록 복잡하고 고난이도인 무늬를 그려낼 수 있었는지도 신비스럽고 이등변삼각형과 동심원의 반복이 이루는 패턴의 조형미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전체적인 구도상으로 보았을 때도 중앙의 원을 중심으로 3단계로 확산되는 레이아웃에 대칭성을 이루는 안정감이 손이 아닌 컴퓨터를 사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확하고 매끄럽다. 잔무늬거울의 무한대 삼각형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무늬를 퍼트릴때 사람들은 어떤 환상의 세계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잔무늬거울의 제작 비밀을 풀기위해 주석과 구리의 비율, 거푸집의 재질, 문양 제도 방법 등을 연구한다고는 하나 아직 시원스레 비밀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인간의 예술적 의지라는 것이 어쩌면 시대와 환경과 지식, 조건을 훌쩍 뛰어넘는 신성한 영역이라는 생각이드는 작품이었다.




< 손잡이잔. 가야. 국립김해박물관 >



< 손잡이잔. 가야. 개인소장 >


삼국시대로 넘어와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도기를 제치고 현대미가 물씬 풍겨 나오던 가야의 손잡이잔 이었다. 세계문명사에도 1500년 전에 질그릇으로 다양한 손잡이잔을 만들어 사용한 나라는 없다고 했다. 오늘날 커피잔은 물론이고 와인잔, 호프잔, 머그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실은 우리나라가 최초였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다양한 모양의 잔으로 미각을 느낀다는 것은 다양한 미감美感을 음미하는 것이다. 당시 음료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였을까 마는 담아내는 음료에 따라 컵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술과 물을 이토록 다양한 컵을 이용해 마셨다는 사실 자체가 가야인들의 심미안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극적인 예 일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영국 황실의 커피잔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조형수준은 곧 높은 생활수준을 의미하지 않을까. 가야의 손잡이 잔을 보면서 당시 왜와 밀접한 교류를 하는 가야국의 왕족들이 그려졌다. 한 잔의 차와 한모금의 물을 마셔도 저토록 세련된 손잡이잔에서 그 기품과 세련미를 잃지 않았던 우리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막연함의 구체화


 
< 금동해무늬맞뚫림장식. 고구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 >


우리는 흔히 금속공예의 정점을 신라시대로 익히 알고 대표적 작품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특히 신라의 금관은 세계역사상 어느 나라의 왕관보다 화려하고 완벽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절정의 완성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로만 듣고 외우던 '강인함'과 '우아함'의 실제였다. 고구려의 금관에 사용되던 장식을 보면 강인하다는 것, 강렬하다는 것의 막연한 미사여구의 구체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내 눈길이 머물렀던 고구려의 금동관 장식 은 단연 불꽃무늬였다. 중심에는 원에 둘러쌓인 삼족오를 기점으로 용의 용트림과 봉황의 날개짓이 불꽃으로 형상화한 곡선의 디테일을 보라. 속도감은 물론이고 태양을 향한 역동적 에너지가 확실하고도 진취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카리스마 있으면서 이목구비 또렷한 수려한 외모를 떠올리게 한다. 무늬의 조형미에서 어떤 음악적인 기운도 묻어난다. 이태리 명품 브랜드의 페이즐리한 문양이 떠올라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물론 꽃이나 불꽃으로 된 단순한 시도였지만 오늘날 식물과 동물의 무늬를 패턴화하는 방식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상아바둑알과 바둑판 바둑통.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 소장 >


고구려가 고분벽화, 신라가 금속공예라면 백제의 고분미술은 도굴로 인해 그 결과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이 책을 읽기전까진 일제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도굴을 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진 못하였다. 백제는 개방적인 나라였기에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공예품도 많이 하사하였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내준 선물을 도리어 자신들에게 바친 선물이라 칭하며 식민사관화 하였다는 것은 치졸하기 그지 없으며 참으로 파렴치한 행위였다. 한눈에 보아도 일본풍임이 감지되는 상아바둑알과 바둑판 이 알고 보니 백제 의자왕이 보내준 선물이라는 것 또한 가슴 아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도 그것을 보고 우리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선입견도 울컥하던 순간이었다. 검은색과 빨간색의 바둑알에 새겨진 흰새만 하더라도 나리타 공항에서 판매되는 기모노 의상과 기념품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새삼 당시는 따라가는 입장에서 이러한 문화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통렬하게 인식하여 우리것을 자기것화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네들이 대단해보였다. 우리가 중국에서 보고들은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듯이 일본도 우리 것을 빼앗아 후세에 자기 나름의 우수성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미국의 어느 쇼핑몰 푸드코트엔 김밥과 우동과 함께 비빔밥이라는 메뉴도 Japanese에 분류되어 함께 팔리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 책은 문화재를 통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깨우치는데도 어지간한 자극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감의 승리


 
< 금동신발. 신라 5세기.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


신라의 고분미술에서는 금관이 주를 이루나 나는 특이하게도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발견하곤 이들의 장려壯麗취미가 어디까지 였는지 비로소 궁금해지기도 했다. 금구슬의 현란함에서 일종의 자신감을 엿보았다면 금동신발 의 정교함은 매니아적인 호기심을 느낄 정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앙 육각의 무늬안에 동물과 인물의 형상이 패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안 양탄자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금관, 금허리띠에 이어 신발의 밑창에 까지 당시 유행한 타국의 사조가 반영된 것을 보면 추구한 예술성의 경지가 상당히 혁신적이며 도전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직장 다닐 때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들고 디자인 좋은 차는 윗선에서 간섭하지 않은 차라는 자조적인 이야길 밥먹듯이 들었다. 즉 아무리 참신하고 훌륭한 디자인이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택해주지 않으면 디자인은 발전이 없다는 것. 페르시안 문양을 신발에 적용한 디자인 의도보다 그것을 지시했거나 수용한 관계자들이 자랑스럽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지금 신라시대의 윗선보다 한참 떨어지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누구보다 독창적이고 감각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오랜 관료주의와 무사 안일주의는 오늘날 자동차번호판처럼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중간이하 정도의 보편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결과를 양산해내지 않았던가. 우린 결코 색감이 없고 조형감각이 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확인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은 것은 바로 백제의 석탑과 백제의 향로였다. 흔히들 백제미의 대표성으로 알고 있는 '우아미'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공식과도 같은 진부함의 표현일 지 모른다. 다시 보는 백제의 석탑은 그 절제가 선사하는 단정함에 있어 어떤 절대성의 가치에 천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는 정림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체감률에 있으며 이 같은 비례감각이 우아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정리하고 있다. 소름끼치는 비례감은 뒤편에 등장하는 불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디테일이나 조형미보다는 절대비율에서 오는 안정감이 가시적인 웅장함보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리곤 그 와중에 적당한 기울기를 지닌 추녀끝 곡선은 절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명품의 그것처럼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나는 절대감을 자극하는 비례나 절제된 디자인을 볼 때 그것이 우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편이다. 오히려 완벽이 주는 절대성은 심리적인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오늘날 여심을 선동하는 많은 명품의 디자인을 보면 그 단순미가 어떻게 사람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는지 쉽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발칙한 도전에 가깝다. 아무것도 안하면서 그 자체로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고 상대의 숨을 멎게도 할 수 있는 내공인 것이다.





<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높이 64.0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


엊그제 2010 세계백제대전이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수도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전, 충청권에서는 큰 행사였다. 개막식과 폐회식 행사 장면을 보면서 익숙한 조형물이 제일먼저 눈에 띄었다. 바로 백제 금동대향로 였다. 그뿐 아니라 행사에서는 백제금동향로 속 5악사를 불러내어 그들의 악기와 음원, 복장을 그대로 복원해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금동대향로의 설명을 읽어내려 가면서 또 한번 나의 무심함을 깨우치기도 했다. 그저 꽃봉우리를 형상화 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산봉우리엔 피리, 비파, 거문고, 북등을 연주하는 다섯명의 악사와 봉황, 용은 물론 여러 날짐승이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공예품에서도 드라마같은 종합연출을 담아내는 예술혼의 경지가 어쩐지 애틋해 보였다고나 할까. 3차원 조형물에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고 복합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현해 내었다는 것은 예술품을 하나의 무대로 생각했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2차원 도화지에서도 화가의 실력에 따라 그 수준차가 천차만별인 과제이다. 담아낸 이야기를 보면 신선이 살고 있는 영생의 세계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봉황이 날아드는 몽환적 환타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창의력과 기술력이 조화된 예술품으로서 두고두고 자랑할만하다. 악사의 표정과 악기의 디테일에서도 완성도가 상당하여 아마도 이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는 일생일대의 명작을 남기었음에 틀림없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 절정에서 딱 멈추어 버린 백제문화에 대한 아쉬움과 말로만 듣던 백제미에 대한 경의가 절로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도전하는 마음



< 금동관음보살 입상(뒤). 백제. 높이 21.1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나한 두상. 백제. 높이 11.5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불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의 불상은 중국에 동참한 후 일본에 전파하여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주로 불상을 감상할 때 표정이나 미소위주로만 의미를 분석하고는 했는데 이번기회에 불상을 보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할까. 저자는 백제보살상의 전형이면서 백제미술의 진수라며 금동보살 입상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중 압권은 '미스백제'라 불리는 금동관음보살입상 의 뒷태였다. 비례도 세련되었지만 뒷모습에 표현된 의상의 실루엣과 가운데 꽃무늬를 중심으로 X자의 패턴을 강조한 드레시한 라인은 요즘말로 '간지짱'이라 할 수 있겠다. 각종 시상식에 등장하는 여배우의 등파인 드레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백제 불상은 그 표정에서도 신라 이상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부여에서 출토된 나한 두상 은 리얼리즘의 정수라 생각되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불상은 처음이기도 했고 수도자의 내적인 고통이라는 의미로 표정을 음미하니 정지한 돌이라 하기엔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부분 신라의 불상에서 느껴진 편안한 미소와 상반되면서 백제 장인의 기술력에도 엄청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 방형대좌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삼국 >         < 자코메티. 걷는 사람. 1960>


신라의 불상중에는 반가부좌를 튼 자세에서 주로 명상에 잠긴 듯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들이 아무래도 정이 갔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부처' 특유의 고뇌를 신비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방식이나 기법이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중에 전체적 이미지가 기존의 사유상과는 달리 유달리 추상적인 불상이 있었는데 방형대좌 미륵반가사유상 이 그 주인공이다. 흡사 스위스 출신 현대미술의 거장 자코메티의 청동조각상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 1960)'에서 느껴지는 고독함에 단순화한 추상미가 더해져 묘한 아름다움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느 불상에서 시도되던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불상을 보면 파격을 시도한 차별화에 비록 후세에서라도 달려가 박수를 쳐 드리고 싶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발해의 유물들 중에는 생활도기로 알려진 구름모양도기 쟁반 이 기억에 남는다. 구름무늬를 현대적 감각으로 유려하게 도안한 쟁반의 크기는 86cm로 쟁반치고는 대형사이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풍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잘 융화되었다고 극찬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생활도기에 심미안을 발휘하여 대칭의 미를 극대화한 부분이다. 나는 대칭의 비례를 가진 상품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시각적 즐거움이 주방용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술안주를 담아내는 그릇을 연상할 정도로 곡선이 재미나고 자극적이다. 구름이라는 네이밍이 없었다면 네잎클로버나 호두 등 다양한 자연소재를 단순화했다는 생각도 들고, 현대의 기업마크나 엠블렘에 적용할수 있을 정도이다. 이탈리아 산업디자이너인 필립스탁이나 알레시의 주방기구와 나란히 디스플레이 한들 빠지지 않을 디자인감이다.


 
< 구름모양도기 쟁반. 발해. 너비 86.0cm > 


 
< ALESSI. Babyboop, Ron Arad > 


삶이 무늬로

나는 막연히 알고 있던 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이라는 고전적 가치를 언어나 지식이 아닌 마음과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마음이 부자된 기분으로 독서를 마치게 되었다. 세계문화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민족의 고유한 정서는 고대국가를 경험하면서 세련되어 진다고 한다. 즉, 고대국가를 거친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간의 정체성의 차이는 그 깊이와 양적인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책은 한 민족의 정체성이나 자긍심도 양적, 질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우리의 미적가치가 무자르듯 단지 저 세단어로 축약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고대국가에서 존재했던 분명한 가치를 다시 되새김하며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혹시 내재해 있을지 모를 문화적 열등감이나 사대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엔 마땅히 정당하다 생각한다.

미술을 보고 역사를 추정하고 역사에 따라 미술이 변화했음을 배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학부모로서도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유용한 팁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박물관에 손잡고 가자하면 숙제처럼 입이 나오는 아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시대 무슨자기, 무슨 금관...이렇게만 달달 외우고 쇼케이스속의 유물로만 기억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느낀 사람만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역사속에서의 '관계'와 예술로서의 '미학'을 모두 기억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그리운 감성만은 아이들에게 잘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세상에 유인원이 등장한 것은 500만 년 전이고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빗살무늬 토기를 만든 시기는 기원전 4000년 무렵 부터이다. 빗살무늬 하나만 해도 약 삼 천 년 정도 변하지 않았던 양식으로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랜세월의 결과물이었다.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이 빗살무늬의 빗금 한줄만도 못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삶은 형태이고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는 명제가 자꾸 떠오른다. 미술사가 뿐 아니라 일반인으로서 우리 삶도 특정한 양식과 반복되는 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 지겹도록 일상적인 형태가 결국 훗날 어느 시기에 빗살이 아닌 어떤 무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지나고 또 얼마나 반복해야 하나의 무늬가 탄생되는 걸까. 그러고보면 인류의 미술사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온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세 사람들은 열심히 그 무늬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더 나은 무늬를 창안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삶의 무늬를 떠올리며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다음 무늬를 기대해 보겠다. 부디 인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무늬라면 좋겠다. 한점, 한줄도 되지 못할 우리네 삶의 형태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빗살이 무늬가 되기까지 얼마나 울고 웃었는지 누군가는 기억해 준다면, 정말 좋겠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것이었다.
산다는 건, 좋지는 않지만 어쩌면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임>

책에서의 눈부실만큼의 고화질 화보에 비하면 인터넷 이미지들은 그 반절도 좇아갈 수 없는 표현의 한계가 있었다.
각 지역의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 이미지를 중심으로 참고화 하였기에 질적으로 감상에는 부적절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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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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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돌멩이, 하나

미국 워싱턴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아마 링컨기념관과 근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빼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념공원엔 우비를 입은 참전군 동상 옆에 검은색의 화강암 기념비가 50m 가량 거대한 벽화처럼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장병의 이름은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세세한 얼굴까지 그려져 있던 기념비 앞에서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돌에서도 표정과 숨결이 살아 있다니...나 역시 기념비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를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로 내심 저릿했던 순간, 단단하고도 오래된 뜨거움이었다. 바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의 동상을 조각하고 검은색 기념비를 상징적 조형물로 완성시킨 프랭크 게일로드(85)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강암의 도시 베러 출신의 예술가였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용사이면서 소설 속 제르파티씨처럼 베러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워싱턴의 참전 기념비 이후로 한국의 많은 기념관에서는 도입부 전시물로 검은색 화강암에 연혁뿐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 넣은 조형물을 하나의 공식처럼 계획하고는 했다. 이 작품을 덮고 나는 내 묘비에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미꽃과 같은 그림도 새길 수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검은 돌에 새겨지는 하얀 꽃이라...그 과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갑고 시리지만 그 결과만큼은 무엇보다도 뜨겁지 않은가.

그랬다. 이 작품은 마지막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단단하고 찰진 돌멩이 하나가 오랜 시간 화덕에 구워져 꽁꽁 얼은 겨울손을 뭉근히 데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옹골찬 뜨거움은 찬찬히 덥혀온 속도 그 몇 배로 가슴에 남아 자신의 자리를 표시하고 말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빵과 장미』는 그렇게 뜨거운 돌멩이 자국 하나를 남기었다. 미국 아동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뉴베리상'에 대해 몰랐지만 『빵과 장미』는 분명 많은 이의 가슴에 돌멩이 한 개 만한 화덕 한자리를 기꺼이 내주는데 기여했다.


빵과 장미보다, 사람

요즘 언론에선 연일 프랑스의 파업사태를 발 빠르게 보도하고 있다. 그네들의 파업을 보면서 언젠가 프랑스는 '매일 파업하는 나라'라는 프랑스 유학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또 프랑스 시민들은 노동자의 파업에 굉장히 관대해 그로인한 공공 서비스에의 불편을 당연하게 감수한다는 그러므로 다같이 사회가 발전한다는 변론도 기억이 났다. 장미도 넘치면 향기의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받으면서 빵은 물론이고 장미향기도 그윽할 것 같은 프랑스 아니던가. 지하철이나 버스가 중단되는 서울을 그리자니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래도 역시 멀었다. 초유의 유혈사태는 물론이고 반복되는 구호, 관철되는 과정, 시민들의 불편...그 어떤 파업에도 불감해 진 현실이 우리 아니었나. 파업은 진부했다.

 
 
파업에 동참하는 시민행렬중 엄마손을 잡은 여자아이의 발걸음만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이는 하얀 손수건을 움켜진 채 손을 물고 있다.
훗날 파업을 추억하며 무엇을 떠올릴까.
핑크빛 소녀야, 너는 무엇이 두려웠던 거니. (2010,
프랑스)


작년에 내가 술장사를 할 때 그 지역에서 대대적인 화물연대 파업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술집에서 욕을 해대었다. 그런데 뉴스에 보도된 후 거리를 막아선 화물연대 주동자들이 파업을 마치고 우리가게에 들른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사람들이라는 자칭소개와 함께 거나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지인들과 부인들도 합석해 내일있을 파업을 같이 궁리하는 듯해 보였다. 부인들은 다소 진한 화장에 깔끔한 차림이었고 그녀들은 내일 새벽에 모여 전사적으로 남편들의 도시락을 쌀 것이라며 상기되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파업기간중에 우리 가게에 자주 들러 그날 하루의 피곤을 달래곤 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생존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투쟁에 하루 종일 앞장선 사람들 덕에 우리 생계가 고만고만해진 날들이었다. 문득 같은 지역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날 팔고 남은 전부의 빵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는 전설의 빵집주인이 떠올랐다. 그래, 당신은 빵을..나는 술을...그렇게 자위해봐도 마음이 쓰라렸다. 그날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종류의 파업과 그들을 비교하면서 축제와도 다름 아닌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내 생존과 바꾸었다.

언젠가 김훈의 칼럼에서 기자시절 시위현장에서의 점심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는 기사도 기억난다. 아무리 황사가 불어 닥쳐도 시위군중과 전경, 기자까지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도 파업 시위대는 길바닥에 앉아 부인들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군중과 대치한 전경들은 된장국과 깍두기가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 먹고 기자는 전경들이 밥을 먹는 거리 중국식당에 들어가 짬뽕국물을 마시며 기사를 작성한다고. 그 순간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주는 각각의 도시락과 된장국과 짬뽕국물은 얼마간 역겹고 비루할지 모르나 세상 어느 누구의 밥상보다 위대해 보였음이다. 그렇다. 내 온전한 배고픔은 오로지 내 뱃속에 들어간 밥만이 해결할 수 있다. 내 목구멍을 통과한 것들에게만 유효하다. 어떤 시위나 어떤 진압을 뛰어넘는 가장 최고치의 서로에 대한 인권 존중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파업의 구호보다 신선한 장면이었다.

이렇듯 나는 왜 파업의 정면보다는 측면, 뒷면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파업은 가보지 못한 군대만큼이나 해보지 못한 성역으로 남아 얼마간의 기회박탈에 대한 안도감과 잘 알지 못하는 심정으로서의 낭만이 뒤섞여 구경꾼 입장의 '진부함'이라는 건조성을 띄게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왜 이리 파업 한번 해보지 못한 경력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것일까. 이제 먹고 살기가 좀 나아진 세상에서 파업의 이야기도 식상한 컨텐츠로 전락한 오늘날, 프랑스 학생도 화물연대도 철도파업 시위군중들도 원하는 것은 오늘의 '빵'이 아니라 내일의 '장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 역시 정작 코를 자극하는 빵의 향기는 물론 뇌를 자극하는 장미의 향기도 필요한 같은 입장이면서 그것들이 필요하다며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자의 입장에는 절실한 공감을 해오진 않아왔다. 그렇게 도시는 같은 인간을 향한 무심, 무감, 무정을 상호 용인하면서 사람의 향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라 책임전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겨울만큼이나 건조한 가슴에 백년 전 파업이야기가 이 가을, 사람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파업의 정면이 아닌 그 이면에만 간간히 소심한 시선을 보내온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이야기였다. 피할 수 없던 그곳에서 고소한 빵냄새와 붉은 장미향을 뛰어넘는 진한 사람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우린 이제 빵과 장미보다 사람이...그립다.


두 눈의 동심



로렌스 지역의 빈민 주택가에서 한 소녀가 천조각을 만지고 있다. 소년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내다보는 여인, 망가진 자전거와 검은 고양이, 고양이보다 비쩍 마른 검은 양말...
로사와 베이크도 저렇게 만났을 것이다. 미국이었다. (1912. 로렌스, 매사추세츠)

 
작품의 주인공인 Jake와 Rosa는 Bake와 Rose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다. 비록 즐거운 순간은 아니었겠지만 아직은 토끼와 사슴같은 눈이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추위와 배고픔,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자유로운 잠자리가 필요했고 로사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해 고의로 구두를 숨겨 놓은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아이들끼리 호기심어린 장난처럼 보이는 이 첫 만남은 사실상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작가의 의도된 미장센으로 여겨졌다. 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각자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기실 '빵'과 '장미'를 상징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 '세상'이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잃어버리게 될 지 모를 자신들의 최소한의 '욕구'가 아니었을까. 아직 세상을 향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경험, 발산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러한 '욕구'는 그 나이의 제이크와 로사에겐 전부와 같은 '본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닌 열 네살 이들의 본능이 정작 어른들이 파생시킨 쓰레기 더미에서 마주쳤을 때 이들은 토끼와 사슴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이들은 어른이 아니었기에 어른처럼 서로를 경멸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한명은 구두를 찾아주고 한명은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첫 눈의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아무런 조건없이 서로의 본능을 도와준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들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서로를 향한 동심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결말까지의 힘겹지 모를 여행길에 이득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아이들은 시종일관 어린 사람으로서 최소의 욕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쓰레기 더미와도 같은 세상을 헤매고 뒤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불더미 속에서 어쩌면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두 가지 두려움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파업'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적 현실이었다. 어른들의 파업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본능을 더욱 절실하고 위태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이주민 노동자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일삼는 무정하고 무식한 아버지를 둔 덕에 미국 토박이로서의 자존심은 어디에서도 내세울 게재가 되지 못했다. 외국인이 아닌데도 어쩌면 외국인 노동자만 못한 자신의 처지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워야 할 미국에서 이탈리어를 쓰고 읽지 못해 부끄러운 상황에도 놓여 지게 되고 만다. 제이크의 관심사는 오로지 첫 번째도 '배고픔', 두 번째도 '배고픔', 그 다음은 '추위'였기에. 자신은 영문도 모를 파업현장에 동참하던 이탈리아계 노동자 안젤로 아저씨를 겁 없이 따라나선 계기도 음식에 대한 기대때문 이었고, 안젤로 아저씨와 헤어지게 되면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도 그가 푸짐하게 건네주던 음식때문 이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아이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신과 한자리에 누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감정은 '배고픔'과 '추위'였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을 지배할 것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제이크에게 있어 신자信者가 되거나 시위자 혹은 양자養子가 되기를 결심하게 하는 우선된 기준은 배부른 음식이 되버리고 만다. 이는 곧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타자에게 베푸는 최선의 선 역시 배고픔을 구원하는 음식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신부님에게 새 옷과 맛있는 음식을 선사받고도 횡재처럼 받은 50센트로 제이크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위스키를 사는 것이었다. 제발 술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노동자의 아내가 모처럼 생긴 목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 가장 즐겨 찾던 술을 사가지고 가는 마음을 이해하고 남는다. 만약 아버지가 위스키가 아닌 다른 음식을 좋아했다면 제이크는 기꺼이 그것을 택하였으리라.



로렌스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소년들. 그중 가운데 웃고있는
소년의 눈이 내 눈을 멈추게 한다. 그의 얼굴에서 어른된 우울함이,
노동의 피곤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로함이 엿보인다.
제이크도 저렇게 웃지 않았을까. (1912. 로렌스 섬유공장, 노동자들)  


사리판단이 분명한 어른이 된 나이에도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본능에의 상처일 텐데 한창 발육이 왕성한 열 네살 제이크에게 배고픔은 거의 온 生의 전 가치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그리고 그 全 가치를 위해 남의 음식을 훔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로렌스 공장지대의 파업이 아니 어쩌면 모든 지역의 파업이 궁극엔 지금보다 빵을 더 달라는 요구이겠지만 그럼으로써 지금 가지고 있던 빵마저 빼앗겨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믿기 어려운 현실이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이 아닌 백 년 전의 미국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라는 것은 좀처럼 믿기 힘든 사실이기도 했다. 바로 백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한술 더 떠 지금은 당당히 외국인 노동자를 같은 방법으로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주로서의 면모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며 전혀 시간상의 낙차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핀치 선생님의 교과서적 가르침에 혼란을 감지하던 로라는 흡사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로사가 두려워했던 것은 학교에서 배운 가치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비난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방해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사는 파업에 가담한 가족과 파업을 비난하는 학교사이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 안에 머무르게 된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급기야 행진도 참여하지 못하고 학교도 가지 못한다. 둘 다 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둘 다 맞는 것 같지 않은 로사에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역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우리 학교는 강 건너 대학교에서 데모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후 수업은 문을 꼭꼭 닫고선 수업을 해야 했다. 바로 강을 타고 넘어오던 최루탄 가스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데모가 심했던 그해 유월엔 최루탄 잔향으로 도무지 수업을 할 수 없어 오후엔 대거 집단 조퇴 사태까지 일어났었고 당시 선생님들은 더욱더 입을 꾹 다물고 우리들의 질문에 '모르쇠'라는 자물쇠를 굳건히 채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좌파성향의 국어 선생님이 해직된 후 사립이었던 우리 학교는 질문에는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을 지나쳐 아예 대학생이 되면 절대로 '데모하지 말 것'에 대한 예방과 세뇌를 노골적으로 강제시행한 후 학생들을 졸업시키는 여학교였던 것이다. 데모나 파업이 일어나는 사회적 배경과 원인보다는 데모를 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백가지 사례나 파업이 가져오는 경제적 손실과 피해 백가지만을 알려주며 공산당 다음으로 파업이나 시위 주동자를 사회죄악시 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광주에서 올라온 같은 과 학생으로부터 처음 '광주사태'라는 단어를 들었을 정도로 정보와 진실이 꽁꽁 차단된 학창생활을 보내었던 것이다. 바로 로사가 자신의 엄마와 언니는 공장의 파업현장에서 노래부르고 있을 때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편향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무언가 가슴속에 응어리가 느껴지던 잘못 없는 '죄책감'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모범생으로서 학습된 통제가 요구하는 자신과 상반되는 그 '반동감'은 학교생활 내내 나를 짓누르며 보이지 않던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인지 로사의 갈등을 보며 그때 그 시절 내 사고과정을 그대로 엿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면서 또 한편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결국 대학을 입학해서는 교육의 효과는 더욱 분명한 결과치로 나타나 시위현장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고 로사처럼 가족의 안전이나 내 주변 인물의 안녕을 우선가치로 두는 무사안일, 보수세력이 되어버린 오늘의 내가 바로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물론, 이렇게 멍울지고 변명할 기회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시인이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영화판에서 월급도 없이 하루종일 라면한개로 버틴다고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어떤 젊음은 그것이 '노동'이라 규정짓지 못할 훗날 핑크빛'꿈'앞에 가로막혀 자신의 시퍼런 인권을 유보하기도 한다. 글쓰는 노동이 감독 시다바리 노동이 공적이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고, 규모적이지도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저 좋아 하는 일일뿐 고로 견디기 힘들면 조용히 때려치우면 그만인 일인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파업을 불러오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회사였는지, 아니면 내가 유난히 인내심이 탁월해 불합리한 상황을 잘 견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서 조용히 다음달 월급명세서만 손꼽아 기다리느라 그들을 외면했는지는 고백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나와 같이 피끓는 청춘의 시기에도 시위현장에 제대로 참여한 적이 없는 세대들은 늘 그렇듯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상당한 불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똑같은 시절에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무위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은 실제로 어떠한 사회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결과를 낳으며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한 유권자를 지향케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용서와 함께 기득권세력을 향한 소심한 복수를 지향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만 놔두면 좋았을 나름의 과거를 용케도 정확하게 공략을 해대니 독자로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여 아무말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은 터, 비록 늘 뒤편에서 돌아가는 상황만 주시하는 소심한 시민이 되어 있었지만 로사의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공감했기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힘겨웠을 로사의 외로움만은 가장 잘 알고 있다 말하고 싶었다. 로사는 알 턱이 없지만 그 시절 정치나 사회운동에 대한 내 자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바로 코앞에서 내 살처럼 지켜본 덕에 몇 배의 에너지를 소모한 내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개의 가슴

이렇듯 작품의 전반부는 어른들의 파업으로 인해 제이크와 로사앞에 닥친 비정한 현실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 그들이 환기하던 내 학교, 그들을 통해 상기되는 우리의 오늘을 자극하면서 우리시절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같은 노동영화를 삼삼오오 모여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금방이라도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곧 배운 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자신을 은밀히 통제하고 상황을 외면하던 냉정의 시간들을 반추하도록 하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 조 에터와 여성 조직 운동가 걸리 플린, 시인 조바니티까지 실제 로렌스 파업 지도부이기도 했던 이들의 신념넘치는 행보는 그 시절 지명수배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잘생긴 어느 총학생회장을 떠올리기 충분했고, 여성과 어린 아이들까지 단결에 합세하며 목청껏 불러대던 노동자의 노래는 그 시절 수많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인연의 끈을 묶어버린 많은 우리네 노동자와 운동가를 그립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파업의 실상을 파헤쳐가며 공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그 피해양상과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만 낱낱이 말하려는 작품은 아니었다. 로렌스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파업의 시작과 함께 제이크와 로사를 번갈아가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서사를 이끌고 있긴 했지만 보다 중요했던 사실은 파업이라는 위기속에서 두 아이들이 느낀 生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잃어버릴 뻔 했던 '빵'과 '장미'라는 기본적인 生의 욕구들을 되찾기 까지의 시련은 물론 그들 스스로 이루어낸 빵과 장미보다 더 향기롭고 놀랄만한 자신들의 용기에 있었다. 파업은 제이크와 로사로부터 베이크와 로즈를 앗아갈뻔 했던 위협적인 소설적 배경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이제 남은 숙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장하고 내일을 기다려야하는 이유를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점에서 아이들을 일가친척이 전무한 오지로 향하게 한다. 결과만 놓고 생각하면 마땅한 절차였고 당연한 해법이었겠지만(소설적으로도 새로운 환경이 절실한 시점이었기에) 같은 피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파업 노동자의 아이를 돌보아 주는 프로그램은 소설과 상관없이도 참으로 신선했다. 백 년 전이다. 미국이었고 당면한 국가현실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지금의 우리로 시계를 맞추어 보아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으며 실천과정 역시 훌륭했다고 본다. 노동회관과 많은 지역민들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어머니인 여성들이 강렬하게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이들 파업공동체의 목적과 행동강령 및 요구사항, 피해 학생들, 심지어 한마음된 노래에도 비교적 덤덤하다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서로가 합심한 그 마음에는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백 년 전의 베러지역의 노동회관에서 스프를 끓이고 있는 한명의 아줌마가 되어 보기도 했다. 제이크와 로사는 이 훌륭한 프로그램 덕에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같은 집에 머물게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 이들이 각자 찾은 것은 달랐지만 다시 필연적으로 같은 장소에 놓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을 맞이한 제르바티 부부 역시 실은 '빵'과 '장미'의 다른 이름인 것은 아니었을까. 제이크와 비슷한 나이의 외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선행과 호의는 파업으로 상처받은 두 아이를 재활케 하는 소설적 장치였을 테지만 이 역시 실제 사실을 근거로 구성된 서사라는 점에서 역시 현실은 더 소설적이라는 영화같은 교훈을 떠올리게 했다.

환경이 바뀌면서 제이크와 로사는 당연히 적응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르바티씨의 부인은 매 끼니마다 배부르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제이크에게 배고픔에 대한 공포를 잊도록 해주었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닌 미국 토박이로서,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문맹자로서, 로사와는 혈연관계가 아닌 친구로서 계속해서 위배되는 거짓말과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고 돌아온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집에서 도망쳐야 했던 제이크로선 또다시 진짜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막다른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로사는 자신의 집보다 월등한 환경에서도 파업에 동참한 엄마와 언니의 소식에만 시시각각 귀를 귀울이며 좀처럼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렌스 파업현장이 아닌 베러 지방의 노부부 집에서도 제이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끝까지 도망치고자 했으며, 로사는 가족을 잃게 될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의 어린 가슴에 무엇을 더 요구 할 수 있었을까. 어린 이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당연히 작가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제르바티 부부였다.

제이크와 로사는 각각 '빵'이라는 배고픔에는 절대 굶주리지 않도록 도와준 노부인과 '장미'라는 인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던 제르바티씨와 함께 손을 잡고 부부가 이끄는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빵'에 대한 본능은 어느 정도 채워진 제이크는 제르바티씨의 석공소에서 폐석을 치우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 '장미'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였던 로사는 노부인과 함께 기도를 한다. 서로 각자가 필요했던 것을 얻게 되고도 좀처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이들 노부부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총이 아니라 가슴이라며 자신들의 안에 있는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겨야 함을 타이른다.


두 송이 장미

이 작품에서 장미는 정열과 사랑의 향기를 대변하는 꽃의 여왕으로서의 그 외적인 상징성 보다는 인간의 영혼과 구원된 손길을 상징하는 내재된 의미로서 꽃을 피웠다. 실제로 제이크와 로사는 장미라는 꽃의 실체를 자의든 타의든 각자 자신의 현실에 오롯이 새기게 된다. 제이크는 대규모 환영인파 속에서 마치 신적인 존재를 만난 것처럼 걸린 플린 여사를 보고는 '그녀의 뺨은 흰 눈에 핀 장미꽃 같았다'고 비록 먼발치 서지만 자신을 선량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소원했다. 그녀가 스쳐지나갈 땐 작고 예쁜 꽃에서 나는 향기로 취한 듯했다고 찬양해 마지 않았다. 모성이 부재했던 제이크에게 흰 눈밭의 장미꽃은 고결한 최초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신자가 아니었던 제이크에게 지긋지긋한 현실로 부터의 구원을 염원하는 신성의 증표로도 이해되었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제이크에게 긍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줄 교사나 그러한 여성을 흠모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도 해석되었다. 즉, 제이크의 가슴에 새겨진 장미는 모성이라는 여성성에 대한 사랑과 다름 아니었다. 그의 가슴엔 장미라는 母花가 피어 올랐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는 새 가슴에 장미를 그려 넣은 제이크와 만나게 된 제르바티씨는 기념비라는 차디찬 돌덩어리에 뜨거운 장미라는 추억을 새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강암 조각가이자 석공소 사장이었으며 아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묘비에 꽃을 그려 넣어 영원을 소원한 것이었다. 제르바티씨가 제이크의 고백을 듣고 아버지의 묘비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은 바로 제이크의 가슴 한 켠에 숨어 있던 장미라는 존경과 사랑의 母花를 아버지의 영전에 선사하도록 한 어른 된 가르침이자 배려였을 것이다. 비로소 제이크의 가슴에 고이 숨어있던 장미가 세상에 발아하는 순간이었다.

로사의 장미는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로사는 미국인은 아니었지만 그들보다 더 똑똑한 모범생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공장사고로 잃었지만 언니, 동생들과 엄마, 이웃, 세입자 할머니 가족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온 로사에게 장미는 가족간의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로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마리노 아줌마의 권유와 부탁으로 시위대의 피켓에 직접 장미라는 문구를 새기게 된 당사자였다. 로사가 종이에 직접 새긴 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했다는 것이고 피켓은 그것의 증거물로 남았다. 오늘날 어느 정도 자신들의 절실함과 사업주의 야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파업의 문구들은 '규탄', '철폐', '죽음' 등의 공격적이고 과격한 문구들이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그것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백 년 전에 쓰여진 '장미'라는 낭만적 명사가 동화속 그림처럼 낯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파업의 상황이나 전개양상에서는 별다른 시간차를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에 이르러서는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미국 독립혁명이 연상되면서 비로소 심리적 시간차를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빵과 장미'구호의 사실상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누가 짓고 누가 썼건 그 문구는 시로도 음악으로도 확산되는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며 로사라는 장미보다 낭만적인 주인공을 탄생케 했다. 물론 소설속에서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라는 생각을 로사가 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발안자는 엄마이었고 그것을 줄여서 고쳐 쓴 것이 로사였다. 하지만 여기서 장미라는 단어를 피켓에 새겨 넣었다는 행위는 마치 자신의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아니지만 이름표를 만듦으로써 자신을 자각하고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일종의 신고식을 의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세상으로부터 불리워 졌을 때 비로소 자신과 객관적으로 동일시 된다. 로사의 피켓작업은 파업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죄책감보다는 오히려 파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해소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나 장미라는 가치에 대한 공감과 옳음은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시간 이후 로사에게 장미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공동의 목표인 행복을 추구하는 人花로 인식된다. 이탈리아계 노동자 집안의 자녀로서 교육을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하던 로사는 누구보다도 교양있고 존경받는 미국인이 되길 원했기에 그러한 로사에게 가족의 안녕과 그들과의 행복은 바로 로사의 바램을 있게 한 근본이었으며 그 바램을 공고히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로사는 끊임없이 가족의 안부를 자신의 안녕과 동일시하며 집에서 나는 부드럽고 고소한 빵냄새 이상으로 가족간의 향기로운 대화나 격려를 잃게 될까봐 늘상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제이크의 母花나 로사의 人花 모두 조금은 강해진 그들 어린 가슴을 찢고 피어나던 눈물겨운 장미가 아니었겠는가.


세상 모든 이의, 행복

이 작품은 결국 아이들이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를 얻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주어진 패배감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였다. 삶의 조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용기내어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였다. 작품 후반부에 돈을 훔치던 제이크에게 보여준 제르바티씨의 말과 행동은 우리 어른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반향이 결코 적지 않았음이다. 만약 여느 의심많은 어른들처럼 제이크를 궁지로 몰아붙여 그동안의 범죄나 실수까지 찾아내어 사회에 다시는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또 한명의 더 강력하고 소신있는 범죄자를 양성하는 결과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제이크는 제르바티씨 집에 남고 로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과 자기 가족과 자기 보금자리를 그리고 자기 행복을 찾은 것이었다. 만약 제이크가 짜낸 도주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로사가 상상한 불행이 가족들에게 닥쳤다면...(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는 법) 우리는 두 사람의 불행의 탓을 누구에게 전가해야 했을까. 실제 그러한 불행을 당한 사례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소설화되지 않았을 뿐이고 문학으로 재생된 것은 '빵'과 '장미'를 되찾은 열 네 살 아이들이었다. 자신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로사의 기도는 현명한 소녀의 최선이었고 제이크는 그 바램대로 행복해 질 것이었다. 문학은 이렇게 '빵이 넘치고 돌에서 장미가 자라는 새로운 삶'을 제이크와 로사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선사했다.

작가는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이 도착해서 노동회관 앞에서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에 왜 발걸음을 멈춘 것일까. 사진 속 아이들은 웃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두려움보다는 희망의 의지쪽에 더 가까운 눈망울이었다. 그녀는 왜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절대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할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고픈 모성이 문학으로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파업의 현장을 자세히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포용하는 따스함이 시종일관 서사를 지배한다.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통찰력이 어른된 우리들까지 위로하는 것이다. 실제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도 알려진 로렌스 파업은 사회적 최약자층인 여성노동자와 아이들이 주된 운동이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의 비숙련됨과 이주민임을 비하하는 남성노동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폭력과 유혈이 아닌 노래로 시위했으며 그 노래를 작가는 문학이라는 합창곡으로 편곡해 들려준 것이다. 그때 여성들은 '빵과 장미'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세상에 이긴 것이며 지금의 작가는 '빵과 장미'를 되찾은 아이들을 격려함으로써 절망에 이긴 것이다. 문학이 파업을 막을 순 없다 해도 파업의 시대와 파업의 주인공과 파업의 피해자들을 오래도록 안아줄 수는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장미향보다 진한 사람의 향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새삼 문학으로 시대를 껴안는 모성의 그릇이 더없이 크고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나는 뜨거운 돌멩이 자국이 남기고 간 그 자리에 비로소 영원히 죽지 않을 꽃 한송일 새기고픈 욕심을 가져본다. 빵과 장미는 물론 사람의 향기가 나는 행복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빵이 없어 배고파서 죽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영혼의 장미도 넘쳐나지만 사람의 향기에 목말라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이지 않은가. 저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의 가슴에 피어난 장미가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으로 만개하여 사람으로서 최고의 향기를 전할 수 있다면 우리삶은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머나먼 타지에 도착해 꽁꽁 언 겨울손을 잡아준 시민들처럼 그들도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그 손에 장갑을 씌워주고 마음으로 호호 불어 준다면 그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 질텐가. 제르바티씨 부부처럼 소중한 사랑을 잃고도 사람의 향기만은 잃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낸다면 그 세상은 한번 살아 볼 만한 곳인 게다.

검은 돌에 새겨진 하얀 장미앞에서 나는 기념하고 싶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용기라는 줄기위에 잊지 말아야 할 희망의 꽃잎 위에 비로소 퍼져 나오는 사랑의 향기가 내안에 스며들어 그토록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기게 해달라고. 그것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그것이야 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웃고 있진 않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작가는 베러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이 한장의 사진을 보고는 아이들의 사연과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용기를
찾아 나섰다. 이 백 년 전의 흑백사진에서 뜨겁고 진한 사람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빵과 장미』가 이룬 문학적 성취일 것이다. (1912. 베러, 버몬트, Barre's Old Labor Hall)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 이었다네

- 행복해 진다는 것 中에서-
  헤르만 헤세



<덧붙임> 사진출처:  

http://oldlaborhall.com/history
http://www.corbisimages.com
http://www.yonha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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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5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노회찬 추천이라서 보고 싶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꼭 봐야 겠습니다,불끈~^^

한사람 2010-10-26 21:52   좋아요 0 | URL

아...노회찬 추천이라는 말이...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진보..? 노동자...?
제 생각엔 이 책은 ..파업보다 그 속의 아이들에게 더 포커스를 맞춘 내용인 듯해요^^
파업의 테두리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지만
주제는..파업의 바깥에 있더라구요~~

암튼, 전 좋았어요!!!

양철나무꾼 2010-10-27 01:07   좋아요 0 | URL
음~
거창하게 사회적 의미까지는 모르겠고요~
전 지난번 노회찬이 추천한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이 참 좋았어요.
제가 데니스 루헤인에 홀라당 반해버려서요.

이 책 청소년 북스여서 망설였는데,노회찬 추천이라서 볼까 했었다는 얘기였어요.
암튼 님의 리뷰가 이렇게 끌어당기는 데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겠어요?^^

다이조부 2010-11-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혹시 예전에 빵과장미 라는 영화가 있지 않았나요?

고종석이 칼럼에서 추천 했던게 생각나네요

한사람 2010-11-09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어요
청소년 문고지만 어른들이 읽어볼 만하답니다^^
 
카시오페아 공주 - 現 SBS <두시탈출 컬투쇼> 이재익 PD가 선사하는 새콤달콤한 이야기들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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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지금 살고 있고 나중에 죽을 거면서 허구헌날 산다는 것, 죽는 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걸까. 그냥 살고 그대로 죽으면 안되는 걸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일까. 허나 생각한다고 해서 그리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산다고 하면 언젠가는 죽는 것에, 죽을려고 치면 다시 살아야 하는 것에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정답이나 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사하거나 차선인 답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려고 하는 것일까. 별자리 하나 없는 하늘에 나는 가을만큼 서러운 질문을 던져본다. 언젠가부터 답을 기다리거나 그것을 찾지 않고 질문만 바꾸어가며 더 신선한 질문을 찾아보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질문함으로써 벌써 답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가끔 누구에게라도 질문하기 참 민망한 것들도 있다. 더 서글픈 건 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간다. 자문자답...나는 무릎을 탁 치고선 쓴웃음을 지어본다. 이 소설, 이 작가는 자신에 묻고 자신이 답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런지 독자인 우리에게 무언가 물어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하면 서운하실런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번 해보았으니 당신네들도 한번 해봐요...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고로 이 작가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고 보여진다. 그리곤 자신에겐 상당히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대단한 우월감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먼저, 이 작품의 표지를 한번 볼까. 꽤 알려진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 마츠모토 시오리의 그림중 하나를 대문으로 걸고 있다. 흡사 잔혹동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그림속에서 소녀의 눈동자는 주로 파랑이거나 초록의 섬칫한 무표정으로 몽환적 환타지를 물씬 제공해 준다. 강남출신의 일류대 졸업자로서 오랫동안 방송과 영화물을 괜히 먹은 게 아닌 작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작품의 흥행에 얼마간 일조한 그림이라 생각하기에 그녀의 홈피를 찾아 다시보기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음이다. 그런데 난 그림을 넘겨가며 처음의 호감과는 달리 단번에 그림들이 성적인 폭력을 암시하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실제 어린 시절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하였기에 그것을 그림으로 치유하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이 소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특히 남성의 시각에서 롤리타 콤플렉스를 상당히 만족시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작품과 연관지어 본다면)역으로 남성들의 성적인 환타지를 자극하는 용도로도 유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여성학 분야에서 이 책과 그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면 작가는 어느 정도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쨋거나 작가의 최초 의도는 그림에 숨은 상처와 드러난 이미지를 다섯 편의 이야기가 가지는 초현실적 상상력과 짝짓기 하려고 하였다고 믿기에 감각의 촉수에 박수를 보낸다. 이른바 먹히는 그림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이야기 였음이다.

다음, 이야기를 살펴보자. 다섯편의 이야기는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을 자극하는 멜로물이라 할 수 있다. 장르가 환타지, 미스터리, 호러등으로 다양화 하였다고는 하나 결국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는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이루어 질 듯한 사랑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같이 잤거나 같이 잤을 번 한 꽤 말초적인 사연들을 상상력의 범위에 핵심적으로 위치시켜 놓은 덕에 은근히 남녀주인공 불문하고 남성위주의 성적인 우월감을 엿볼 수 있는 서사를 띠고 있다. 영화로 보자면 적당한 상업성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치밀한 전략으로 느껴졌다. 실제 연극이나 영화를 염두해 두고 스토리 작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에서 이를 대중성이라 이름 한다면 그는 재미난 이야기를 아주 신선한 문학으로 요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떤 이야기였는지 그 이야기를 잘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야기의 결론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뜻과도 다름 아니다. 즉, 어떤 이야기도 모두 결론이 정해져 있다.(작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없다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스토리라인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은 충분했다. 각 이야기 마다 완벽해 보인 스토리라인이 지극히도 현실적인 도시인의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고 초현실적인 소재로 사용한 설정들이 전혀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다는 것, 외계인이나 연쇄살인범 같은 공격적 장치들이 물흐르듯 편안해 보이는 작가의 바느질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일지라도 덮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기발한 상상력과 소파같은 편안함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독특한 매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카시오페아 공주>
 

                                                                   SECRET PROMISE, 2006


가장 슬펐다. 딸은 서초동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는 삼십대 중반이라면 그의 차는 BMW라면 방학을 맞아 코타키나발루 섬에 여행을 간다하면 그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을 읽고 계시다면 아마도, 마누라가 오년 전에 괴한에 칼을 맞아 죽은 것만 빼면 사는데 뭔 걱정이 있을까 싶었다. 남자는 딸아이의 유치원 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녀는 사람과 사람간의 파동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외계인이란다. 특별한 일 없으면 한 천년쯤 살면서 이 행성 저 행성 돌아다니며 다른 생명체를 연구한다는. 누가 더 운이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들은 서로 눈이 맞은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남자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그저 취미로 열정을 불사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종격투기 선수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이다. 한눈에 보아도 외계인 선생님이 지구에 오게 된 이유는 분명 남자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남자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초능력을 가진 여자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하고 여자는 거부한다. 아내가 죽은 후 오랫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던 남자의 가슴은 새 사랑이 싹트기엔 너무나 불모지였던 것일까.

결국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범인은 밝혀지지만 예정된 이별은 막을 수 없었다. 하필 우주적으로 이별하게 된 이들에게 남겨진 그리움은 카시오페아 별자리로 그려진다. 그녀는 떠나면서 피같은 남자의 복수심도 함께 가져간 것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가슴이 되지 않고서는 다시 사랑 할 수 있는 가슴이 될 수 없다는 우주적 진리를 깨우쳐준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살면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에게 원망이나 복수심을 품지 않고 내 삶의 행로대로 걸어가기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그래, 어쩌면 내 자신보다 더 생생한 내 모든 원망을 외계인이라도 나타나 가져가 준다면 우린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와의 사랑을 포기할지라도 피로 얼룩진 내 가슴을 씻어 내리고 싶다. 두 번이 아닌 살면서 한번은 꼭 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섬집 아기> 

                                                       LITTLE GARDEN, 2005


가장 쓸쓸했다. 이번 남자도 집은 삼성동, 직업은 펀드매니저, 장인은 재력가...그림이 좋다. 차는 아우디쯤 되려나.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집에 수상하게 생긴 고향친구가 불쑥 찾아온다. 남자는 친구가 반갑지 않고 친구는 무언가 치명적인 비밀을 확실히 가지고 나타난듯 하다. 친구 태규는 야수의 몸뚱아리를 한 근육맨이기도 했다. 참, 남자는 스트레스가 심해 신경성 발기부전이란다. 이쯤 되면 고향친구 역시 원하는 것은 있어 보인다. 이들 두 남자는 고향에서 우연히 어떤 실성한 여인을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것이었다. 끝에 가서 치정극으로 막을 내린 결말이 지극히 드라마타이즈 했다. 다만,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서사를 남자의 불안한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끌고 간 것은 끄덕 일만 했고 섬집 아기(제목인 만큼)의 정체성에 공포를 더해주는 에피소드가 빈약했던 것은 옥의 티만큼만 아쉬웠음이다.   


<레몬>

 

                                                        START SIGNAL. 2004


가장 난해했다. 이야기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려는 의지는 많았으나 나는 어쩐지 주인공의 논리가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작품이다. 이런 류의 작품은 호흡이 긴 연출가를 만나 멋진 배경음악을 뒤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감상이 새롭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한남대교를 주로 건너온 남자의 여자 친구는 아나운서, 자신은 외국계 은행에 합격해 놓은 상태로 일상의 균열속에 '사랑은 레몬같은 거야'라 말하는 풋풋한 처자가 다가오는 이야기. 남자의 여자친구인 윤미는 <성공하는 그대를 위한 100가지 충고>의 충고를 따라 화가날 때 상대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응시하는 여자. 섹스 뒤에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 이 여자의 도시적인 야망과 실천의지에 매력을 느껴 일상을 의지한 남자가 갑자기 레코드 가게를 차려놓고 하루종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며 입사를 망설인다면, 그건 헤어지자는 이야기와 무에 다른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개연성의 진부함이었다. 차라리 우연히 알게 된 핸드폰 매장의 알바를 하던 여자애 때문에 혼란스럽다 말하는 용기가 더 비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오랜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고 쉬이 마음을 열지 않던 레몬녀가 이벤트 요원이나 요릿집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하는 설정으로 나타나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느닷없음이 이들 두 사람의 애틋함을 자꾸 견제하는 듯 했다. 어짜피 들어갈 외국계은행을 다니며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가 사랑은 레몬같다고 하는 것이 나는 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일까. 차라리 그녀가 권해준 핸드폰을 자꾸 어루만지면 마술처럼 그녀(진이)가 찾아오는 느낌을 툭 터넣고 사랑은 요술같다고 하는 것이 더 소년스럽지 않았을지.  



<좋은 사람>
                                                                                                   

                                                                     TWIN BIRDS, 2008 


가장 끔찍했다. 역시 여자는 패션잡지의 기자이며 강남 유흥가 한 구석 오피스텔에서 거주. 여자는 우연히 디자이너에게 소개받은 남자의 인상착의와 행동이 수상쩍어 여간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쌍둥이였던 동생의 실종이라는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안이 자꾸 환기되면서 급기야 정신과를 찾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때마침 선배는 기획으로 연쇄살인범의 기사를 작성하게 되고 여자는 반사적으로 소개받은 남자를 떠올리며 공포에 노출된다. 이때 마치 연쇄살인범과 유사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여자의 소개팅남 때문에 정신과를 찾은 여자는 뜻밖에도 정신과 의사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전의 수사를 선보이며 비극을 예고한다. 정신과 의사는 소개팅남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해오고 실종된 동생의 비밀까지 엮어내는 공포의 아노미를 연출한다. 여기까지...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후반부에 누군가 그녀를 구출하러 등장하는 구성과 해피엔딩의 결말은 너무 허리우드식이었음이다. 장편을 압축했다는 상황이 그 부분에서 이해가 되던 끄덕임은 다시 단편으로 압축하지 말았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남겨졌다. 그럴 필요성이야 작가의 영역이겠지만 어짜피 영화로 제작까지 한다고 알려진 이 작품을 굳이 단편으로 요약(?)해야 할 당위성이 질문으로 남는다.  


<중독자의 키스>

 

                                                          BLUE MOON, 2007


가장 여운이 길었다. 역시나 직업은 영화프로듀서, 동호대교 건너 언니네 아파트에 얹혀살고 있는 서른의 미혼녀. 이야기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평행을 이루는 듯 하다가 마지막에 합체되며 접점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모양새다. 그 하나는 그녀를 스토커처럼 미행하며 그녀의 그림자로서 거리를 유지하는 남자이며, 대학 1학년 철학동아리에서 만난 남자친구로 죽음을 알고 싶어 하는 수인이 두 번째이다. 이들 세 명은 도시의 고독을 견디는 방법으로 모두 중독이라는 기제를 사용했다. 여자는 스크린에 그림자는 타인을 엿보는 것에 수인이는 죽음이라는 실체에. 우리는 현실이 힘겨워 매달리는 그 무엇이 다시 현실과 자기를 파괴한다는 것쯤은 도시인된 경력으로 익히 알고 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멈출 뾰족한 방안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결국 인생은 중독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고독한 것이다. 가볍게 즐기면서 그 위에서 모든 걸 감당하는(하곤 했던) 작가의 우월을 느꼈다면 독자된 오해일런지. 사실 도시에 살면서 고독을 즐기지 않으면 그마저도 너무 피곤할 테니까. 이들 세명이 각자 자신의 고독을 소중히 지키는 모습이 가장 설득적이었다. 세 명이 현실에선 한군데서도 마주치지 않지만 그림자가 찍은 사진 속에 그녀와 수인이 행복하게 마주한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마지막이었다. 서로의 고독함을 존중하는 것도 행복이 될 수 있구나...세개의 오롯한 외로움이 한자리에 따스하게 마주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다섯 가지 이야기를 모아놓고 보니 참신한 신상이 된 느낌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강남에 거주하며 직업은 자영업, 펀드매니저, 아나운서, 패션잡지 기자, 영화 PD등의 도시적이면서 주로 청담동, 신사동에서 한잔들 하시는 서울의 남쪽 사람들이었다. 뭐랄까 외람되지만 서사에서 인생의 패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작가의 당연한 자연미를 엿본 기분이랄까. 살아온 직업적 지식으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아쉬운 점을 짚으라 한다면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글들에서 독자와의 소통은 소원했는지 궁금하다. 전화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받을 것이 아닌가. 훌륭한 첨단의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전화를 걸 생각인 것도 알겠다. 어쩌면 계속 걸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울림이 분명치 않아 자칫 놓칠 수 있다는 걸, 받고 싶어도 듣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면 독자된 욕심이 지나친 것인가. 한국에서 방송국의 PD이면서 대접받는 작가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누가보아도 근사하고 확실한 밥벌이가 있는 상태에서 목구멍은 포도청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 한국 문단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한국 청취자들을 향한 소설이라면 충분히 성공이다. 단, 그에 만족하고 말 것 같지는 않아보임이, 안타깝다. 현재로선.


<덧붙임> 

책에서는 마츠모토 시오리의 일러스트가 흑백인 게 아쉬워 홈피에서 원본을 슬쩍했다.
(그림/ 마츠모토 시오리 홈피 : http://www.ne.jp/asahi/secret/label/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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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가 참 보면 볼수록 독특하네요. 환상적이면서도 뭔가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는거 같아요.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에서도 일러스트가 칼라였으면 괜찮을거 같은데,,,
출판 비용을 어느 정도 절감하기 위한 출판사의 선택인 거 같아서 참 씁쓸하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22 18:56   좋아요 0 | URL

일러스트가 제대로 한몫한 거 같습니다
요즘엔 일본소녀도 그리던데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어지는 그림이 독특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