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 속의 사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평점 :

이번 달은 나에게 발자크의 달로 기억될 것이다. 이달에만 모두 6권의 발자크 책들을 읽었다. 참,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고 있으며 어제 <어둠 속의 사건>을 다 읽고 나서 바로 <골짜기의 백합>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쟁여둔 발자크의 책이 있어 다행이다. 그렇지 역시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들을 찾아서 읽는 거지. 우리 책쟁이들의 즐거움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발자크가 시대의 관찰자였다고 생각한다. 대혁명기와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제정, 왕정복고와 다시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절과 프랑스 사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 이가 바로 발자크다. 물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리얼리즘을 빙자한 장황함에 다수 독자들을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고비(?)를 넘기면 바로 발자크가 전수하는 무궁무진한 소설적 즐거움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장황함의 스택이 쌓여, 재미까지 더해지니 극락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소설은 누군가를 노리는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인 미쉬가 소총으로 무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대는 제국의 여명기였다고 발자크는 기술한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제 막 공화정 정부를 무너뜨리고 독재정치를 시작할 판이었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미쉬가 누구인가? 공포정치 시절 사나운 자코뱅당원이자 이른바 “유다”로 불린 사람이 아니었던가. 미쉬는 공화정 시절, 처형된 자신들의 주인들의 영지를 사들이려고 한다. 그의 대척점에는 대리인 마리옹과 공증인 그레뱅을 조종하는 상원 의원 말랭이 있다.
사실 미쉬는 ‘레알’ 자코뱅당원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었던 드 시뫼즈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위장한 왕정주의자였다. 모든 이들이 귀족들이 망명한 뒤, 무주공산이 된 국유 재산을 집어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에 남은 강호의 의인 같은 존재였다. 물론 혁명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수반동의 전형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발자크가 뼛속까지 왕정주의자였다는 점과 자신의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de”를 달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드 시뫼즈 집안의 쌍둥이 형제 마리폴과 폴마리 그리고 드 도트세르 집안의 로베르와 아드리앵 4총사는 자신들의 철천지원수라고 규정한 당시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 암살에 나섰다. 물론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음모는 실패했고, 이 사실을 안 악명 높은 경찰총수 조제프 푸셰가 파견한 전직 올빼미당원 코랑탱과 페라드였다.
이렇게 노련하고 무시무시한 스파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23세의 여걸 로랑스 드 생시뉴와 미쉬 그리고 그들에 비해 모자라는 판단력을 지닌 귀족 청년 4총사였다. 노련한 미쉬와 로랑스의 활약으로 음모가들이 공드르빌 영지의 은신처에 숨는데 성공한다. <어둠 속의 사건>은 추리소설과 정치소설 두 마리 토끼라는 주제를 매섭게 사냥한다.
트루아 부근의 공드르빌 영지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1부에서 다루어졌다면, 2부에서는 1부에서 로랑스에게 치욕을 당한 코랑탱의 역습이 이루어진다. 트루아의 귀족 청년들은 애써 파리에서 그들을 찾아온 친척인 노신사 드 샤르주뵈프 후작의 충고를 무시한다. 나폴레옹의 사면과 망명자 귀국 허용은 그저 일시적이라는 점을 샤르주뵈프 후작은 청년 귀족들에게 주지시킨다. 노신사는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호시탐탐 그들에 대한 복수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문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하지만, 젊음과 자신감 혹은 오만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세상사에 정통한 노신사의 신중한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면이 후에 이루어질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그들과 심리적으로 정치적 동지였던 발자크는 로랑스-마리폴-폴마리-로베르 그리고 아드리앵들이 지닌 정신 승리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대혁명을 통해 재산과 지위를 한 번 모두 잃었던 청년 귀족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문제였다고 발자크는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국내에서 그런 무력 지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야만 했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그랑 아르메(프랑스 대육군)를 이끌고, 비록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긴 했지만, 아우스터리츠와 예나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그야말로 제국의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족 청년들 가운데 특히 로랑스는 나폴레옹을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그런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다. 소설의 전개와 더불어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변주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다음은 마술사 발자크가 구사하는 추리소설 분위기를 품은 서사가 등장할 차례다. 귀족 청년들이 혁명기에 숨겨둔 백만 프랑의 자금을 공드르빌 영지 부근에서 찾는 동안, 상원 의원 말랭이 복면을 뒤집어 쓴 5인조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당국에서는 공드르빌 귀족청년 사총사가 범인일 거라고 단정 짓고, 그들을 체포해서 기소한다.
그전에 잠시 평화가 온 사이에는 발자크식 로맨스물이 상연되기도 한다. 막대한 재산과 백작 지위까지 지닌 로랑스 드 생시뉴의 갈팡질팡 배우자 선택의 여로가 전개된다. 시뫼즈 집안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서로 로랑스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갈등한다. 로베르는 중세남자의 전형으로 일단 경쟁에서 배제됐다. 그리고 곁다리에서 그저 자신도 그 경쟁에 끼고 싶어 하는 남자 아드리앵의 서글픈 시선까지. 그렇다면 발자크는 정치, 추리 그리고 로맨스 물까지 <어둠 속의 사건>에 모두 때려 넣고 싶었단 말인가.
말랭 납치사건으로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는 법정드라마가 소설의 분위기가 바뀐다. 아 정녕 발자크는 천재란 말인가. 젊은 친척들이 무고하게 납치와 감금죄로 사형을 당하거나 수십 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샤르주뵈프 후작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유능한 보르댕과 드 그랑빌(데르빌?)이라는 변호사로 법정에서 냉정한 사건 담당 검사를 상대로 치열한 논리 싸움을 전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법정드라마)이 소설의 압권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독재자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근대법의 효시가 되는 법을 제정해서 법치의 근간을 마련했다. 나폴레옹 제정 하의 프랑스 신민들은 모두 이 법에 따라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었다. 특히 미쉬 변호에 전력한 드 그랑빌 변호사가 모든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무고한 사냥터지기를 위해 방어논리를 구사하는 장면은, 마치 당시 법정에서 보고 들은 발자크가 바로 현장 중계를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귀족청년들과 미쉬에 대해 적대적인 배심원단의 마음을 돌려놓고, 드디어 유리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 소설의 거장은 다시 한 번 상황을 역전시킨다. 공드르빌 은신처에 갇혀 있던 말랭 상원 의원이 풀려난 것이다. 그리고 음모가들에 의해 조작된 가짜 편지에 속은 미쉬의 아내 마르트가 말랭에게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공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귀족 청년들과 미쉬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재판을 급반전하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판결이 나자, 마지막 남은 방법인 황제에게 사면 요청을 하러 샤르주뵈프 후작과 로랑스는 전쟁이 한창이던 프로이센의 예나까지 원정에 나선다. 과연 이런 스케일 큰 소설의 전개를 구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은 시골 마을 트루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파리에서의 법정드라마를 거쳐 프로이센에서 제국의 운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던 전역에까지 도달하게 이끌어간 발자크 서사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나폴레옹은 이미 한 번 사면 받은 자들이 다시 한 번, 정부를 상대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 자신의 선의가 우롱당했다고 생각하고 신속한 재판을 주문했다.
왕정이 복원된 결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방대한 이야기들이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지금까지 만난 9권의 발자크 작품 중에서 <어둠 속의 사건>이 가장 스케일이 크고 방대한 서사였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격동의 시절, 살아남기 위해 팔색조 같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스케치는 과연 발자크를 필적한 만한 작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왕정주의자들의 망명과 복귀 그리고 재산 싸움, 젊은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연애, 치밀한 논리 싸움이 펼쳐지는 법정드라마 그리고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까지 과연 하나의 소설이 이 모든 걸 다 품을 수 있을까 싶은 걸 발자크는 해냈다. 이러니 발자크를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다시 한 번, 페르 라셰즈에서 만난 미국 아줌마의 발자크 예찬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음 타자로, 발자크 최고의 연애소설이라는 <골짜기의 백합>을 바로 읽는다. 발자크와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던 11월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