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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 : 그래픽 노블
아메 데용 그림, 이수은 옮김, 윌리엄 골딩 원작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파리대왕> 그래픽노블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원전을 빌려서 먼저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은 번역 이슈 때문인지, 소문만큼 그다지 감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픽노블 <파리대왕>은 달랐다.
같은 원전을 바탕으로 했으니 내용이 다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형상화한 그래픽노블에 좀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게 또 영화하고는 다른 맛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독자는 원전과 어떤 점에서 변별력을 찾아야 하는 걸까. 원전을 얼마 전에 읽어서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그래픽노블을 만나니 그 장점에 반해 버렸다고 해야 할까.
원전에서는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던 부분들이 그래픽노블에서는 좀 더 시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물론, 원전의 재창조를 맡은 아메 데용 작가의 상상력이 어쩌면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랠프와 뚱보 그리고 잭들이 표류하게 된 섬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그들의 고립성에 대해 좀 더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이것은 작가가 시도한 하나의 실험이라고나 할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격체들이 그들을 지도하거나 통제할 어른들 없이 고립된 섬에 모였을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문명국가 영국에서 자란 소년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놀이와 먹거리 충족이라는 본능에 충실해지고 구조가 우선이라는 랠프와 뚱보는 소수파가 된다. 이런 권력의 이동이야말로 윌리엄 골딩이 원작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잭 메리듀와 로저 일당은 구조보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주의를 내세운다. 사실 랠프와 뚱보가 주장하는 구조는 언제올지 모르는 희망이고, 실현될 가능성도 요원하다. 전자의 주장이 자력으로 가능한 현실이라면, 반대로 후자의 주장들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두 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화재로 섬을 홀라당 태워 먹을 만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섬 외부에 배가 보이면 봉화를 올리기로 한 팀들이 사냥에 정신이 팔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게 사과로 끝날 일인가?
잭 메리듀 일당은 사냥을 핑계로 얼굴에 위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종의 마스크로 자신들의 수치심을 가리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방식이었다. 동시에 위장을 거부한 랠프와 뚱보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동시에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일종의 야만화 선언을 위한 신호가 아니었을까. 생존을 위해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랠프와 뚱보의 합리적 조언에도 잭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대로, 당장의 먹거리들만 해결이 된다면 섬에 남아도 좋다는 식의 사고의 발로다.
원작의 아우라가 너무 강렬해서 그래픽노블을 맡은 아메 데용 작가의 부담이 크지 않았을까. 핵무기 경쟁으로 세상에 공멸해 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1950년대, 인류의 문명이 과연 올바른 길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넘실거린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질문도 빠지지 않는다. 문명세계에서 소외된 인간들은 결국 다시 야만 혹은 자연친화적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런 형질은 과연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어지는가. <파리대왕>의 그래픽버전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년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하늘에서 내려온 짐승'에 대한 이미지의 형상화도 주목할 만하다. 공포는 대상에 대한 진실 파악을 어렵게 만든다. 이미 죽은 조종사를 괴물 혹은 괴상한 짐승이라고 규정한 소년들은 아예 근처에조차 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철 있는 어른이었다면 조종사의 낙하산 천을 이용해서 오두막 지붕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종사가 탈출하면서 지니고 있던 물품 역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근원적 공포는 모든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켜 버렸다.
잭 메리듀가 실권을 잡기 전에, 선거로 선출된 두목 랠프는 우리 보통 사람을 상징한다. 그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뚱보는 합리적 사고의 선봉장이다. 잭 무리의 상징인 무력을 애초부터 사용할 수 없기에, 뚱보는 잭 대신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랠프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그런 뚱보가 잭 일당에게 죽은 뒤, 랠프의 운명 역시 풍전등화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사냥감이 되어 쫓기던 랠프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문명의 구조를 받게 된다.
마침내 섬에 도착한 순양함에서 파견된 일군의 해군들이 소년들에게 묻는다. 몇 명이나 되는 소년들이 섬에 있느냐고.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알 수가 없었던 그들은 할 말이 없다. 인간사냥을 하던 잭의 무리에게 무슨 재밌는 놀이를 하고 있냐는 말에도 역시 대답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하더라도, 관점에 따라서는 놀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소년들에게 질문을 던진 장교는 그들이 순진무구할 거라는 예단을 하고 있었던 것일 지도. 결국 외부인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그래픽노블은 보여준다.
엔딩의 극적인 장면에 이르기까지 아메 데용 작가는 마치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활극을 지어낸다. 원전에서 출발해서 무언가 원전과 다른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구상은 그런 점에서 성공했다는 판단이 든다. 원전에 등장하는 '오랑캐=savage' 번역 때문에 정말이지, 새로운 번역을 기대해 보고 싶다. 그게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원전보다 그래픽노블에 좀 더 높은 평가를 하고 싶은 건 나만은 아닐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