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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삶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지난달에 중고서점에 들러 브라질 출신의 작가 그리실리아누 하무스의 <메마른 삶>과 윌라 캐더의 <루시 게이하트>를 샀다. <루시 게이하트>를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두어장 읽다 말았나 보다. 어제 저녁에 <메마른 삶>을 찾아 단숨에 읽었다. 분량도 적고, 20세기 브라질이라는 이국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파비아누의 사연이 우리네 그것고 많이 닮아서 독서에 가독이 붙더라.
브라질의 ‘세르탕’에서 혹독한 가뭄을 피해 소몰이꾼 파비아누는 가족을 이끌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선다. 무시로 찾아드는 가뭄과 가난 그리고 무지는 파비아누 가족을 괴롭히는 디폴트 같은 요소다. 사실 부자들이라면, 그런 요소들은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명의 가족 가운데 하나였던 앵무새를 희생시키고 발레이아(포르투갈 어로 “고래”를 의미한다고 한다)가 잡아온 기니피그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는 파비아누 일가. 아이들조차도 마초맨 파비아누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소설 초반에 그랬던가, 파비아누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고 싶었다고. 우는 아이에게 격렬한 증오를 느끼는 파비아누.
어쨌든 어느 버려진 농장에 새로운 삶의 거처를 차린 파비아누는 가뭄이 끝나고 돌아온 주인에게 날품을 파는 소몰이꾼이 된다. 지주는 결코 파비아누처럼 글도 읽지 못하고 무식한 카브라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실컷 파비아누를 부려 먹고는 가축들을 분배하지만, 낙인이 없기 때문에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파비아누는 다시 주인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채무노예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 모든 게, 주인공 파비아누에게는 배움이 없는 탓이라고 그라실리아누 하무스는 은연중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주로 대변되는 세상의 기득권층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배움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주장일까. 비토리아 어멈의 요청대로 옷을 만들 옷을 사고, 생필품을 사러 시장에 나갔다가 노란 제복의 군인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뛰어 들었다가 파비아누는 밑천을 다 날려 먹고 낭패에 빠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군사독재가 횡행하던 브라질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헌정질서를 뒤엎은 군사 독재정권이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한 적이 있었던가.
가진 돈만 날렸으면, 파비아누는 그저 운이 없었다고 하겠지만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결국 일단의 군인들에게 포위된 파비아누는 마체테로 실컷 두들겨 맞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가 감옥에 갇힐 이유가 있었던가? 폭압적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성과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이 사건으로 파비아누는 그 좋아하는 술집 출입도 꺼리게 되었다. 이런 대중의 자발적인 자제야말로 군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소설에는 파비아누 가족들의 시선이 차례로 등장한다. 아이들의 시선도 나오지만 좀 약하다. 대신 비토리아 어멈과 가족에 헌신했지만 비참하게 죽고 마는 발레이아의 시선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그저 그녀에게는 제대로 만들어진, 제분소 토마스 씨가 가지고 있던 침대만이 삶이었다. 유랑민 같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파비아누 가족에게 침대란 어떤 의미였을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지 싶다. 그리고 유랑을 멈추고 한곳에 정착하게 만드는 하나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초 파비아누와 달리 비토리아 어멈은 셈도 할 수가 있었고, 자신의 남편이 지주에게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음 타자는 발레이아다. 아이들보다 더 신나는 삶을 살고 있다. 가족들이 기아에 시달릴 적에는 통통한 기니피그를 잡아 아사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도 했다. 또한 태어나면서도 파비아누들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파비아누는 발레이아에게 가차 없이 총질을 해댔다. 역설적으로 발레이아의 신세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파비아누의 미래이기도 했다. 지주에게 반항한다면, 땅이 없는 소작농 신세의 카브라로서는 해고와 더불어 쫓겨남을 의미한다. 그에게 선택지가 있었을까? 심지어 그는 연대할 동지조차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결정은 야반도주였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냐는 도박에 나선다. 문제는 모든 기회가 사라진 다음에 내린 결정이라는 점이다. 사실 인간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요인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자각,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액션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파비아누는 도주에 나선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메마른 삶>이 마냥 희망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말미에 그라실리아누 하무스는 결국 발레이아처럼 소용이 없어진 이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의 자식들은 대도시가 원하는 순수한 노동자로 수용되게 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파비아누는 자신을 노름판이라는 함정에 빠뜨려서 돈을 갈취하고, 감옥까지 쳐넣은 노란 제복의 군인을 만나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지만 마체테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다. 자신들의 종복으로 활동해야 하는 군인들이 대표하는 정부라는 조직에서 퍼트린 선전선동에 세뇌된 대중(파비아누)은 반란을 꿈꾸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행동하지 못한다. 1930년대, 브라질 대중이 직면한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돼지를 잡아 시장에 팔러 나왔다가 세금징수원에게 당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죽음과 세금으로부터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던가. 하무스 작가는 소설의 어딘가에서 파비아누가 배웠다고 해서 그의 삶이 나아지거나,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자각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파비아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묻게 된다.
그라실리아누 하무스는 기자, 정치인(시장) 그리고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메마른 삶>은 1938년에 발표된 하무스의 네 번째 소설이다. 브라질 법에 따라, 사후 70년이 지난 2024년 1월 1일 저작권이 만료되었다고 한다. 책을 살펴보면, 저작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유 이용 저작권(public domain) 책인가 보다. 처음 만난 하무스 작가의 <메마른 삶>은 짧지만 강렬했다. 하무스의 다른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