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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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에 군사전문가 리델 하트가 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그의 호적수는, 로마 역사상 로마를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카르타고 출신의 천재 전략가 한니발 바르카였다. 무려 하버드 출신 필립 프리드먼이 저술한 <한니발> 평전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읽듯이 그렇게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가독성이 뛰어난 책을 애정한다.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도시 상업국가 카르타고는 북쪽에서 지중해 패권을 두고 경쟁한 로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는 다른 결을 지닌 국가였다. 고대 페니키아/티레에서 유래한 바알 함몬 신을 숭배한 카르타고 인들은 몰크라는 이름의 유아 희생제의로 악명을 떨쳤다. 로마 사람들은 그런 카르타고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경시하기도 했다.

 

카르타고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성장할수록 로마와의 패권 대결은 불가피했고, 결정적 이권이 달린 시칠리아에서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충돌하게 된다. 로마의 성장기에 시칠리아는 도시국가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배후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제정기에 들어서는 이집트가 밀 공급기지 역할을 맡게 된다.

 

시민군을 주력으로 하는 로마 중장보병대의 결속을 파괴할 수 없었던 카라타고의 용병대를 결국 패배하고, 해상전투가 장기였던 카르타고 해군 역시 로마군의 코르부스 전술로 해전에서 패하고 제해권마저 로마에게 내주게 된다. 이런 조국의 처절한 패배를 보고 자란 새끼 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르타고 바르카 가문의 장남 한니발이었다.

 

첫 번째 포에니 전쟁의 참패로 카르타고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다. 그들의 앞바다였던 지중해는 로마 해군의 독무대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니발의 아버지였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눈길을 이베리아 반도로 돌렸다. 위기는 기회인 법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겠다는 하밀카르의 의견에 카르타고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하밀카르는 자신의 아들과 거의 사병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로 떠났다.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아들 삼형제는 하밀카르의 든든한 우군들이었다.

 

결국 하밀카르의 이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로마가 설정했단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단숨에 갚아 버리고 다시 한 번 국가 부흥의 기회를 잡게 됐다. 물론 로마라고 해서 이베리아에서 부흥하는 카르타고에 대한 견제를 잊지 않았지만. 당장 일리리야와 지중해 동부를 제압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베리아의 호랑이 새끼가 대호(大虎)로 성장하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편,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 밑에서 전무후무한 그런 전쟁의 천재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병사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은 기본이었다. 사령관으로 천상의 지휘자로 군림하지 않고, 일개 병사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진짜 전우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공격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앞장을 섰고, 후퇴할 적에는 가장 어려운 후위를 자처했다. 이런 전장에서의 리더십이야말로 훗날 로마 전역을 휩쓸면서 고국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십 수 년간 로마와 동맹시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와의 결전을 대비해서 힘을 키우고 병력을 모집하고, 보급물자에 40마리의 코끼리 부대까지 마련한 한니발은 이베리아로 자신을 요격하러 온 로마 군단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초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발한 전술로 로마 본토 공격에 나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병사들과 물자를 잃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5만 명의 병사들로 알프스 돌파에 나섰지만, 포 강 유역에 도달했을 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누미디아 그리고 켈트 연합군의 군세는 25천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니발의 숙적 로마는 본토에서 계속해서 병력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한니발은 속전속결로 자신의 뛰어난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야전에서 로마군을 섬멸해야만 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참하게 격파했던 승리의 추억과 카르타고 군을 야만족 부대라고 생각한 로마군 지휘관은 한니발의 능력을 무시했고 곧 시작된 티키누스강, 트레비아강, 트레시메노 호수 등지에서 연전연패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뛰어난 이순신 장군처럼, 한니발 역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적장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적을 유인해서 효과적으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한니발을 무찔러서 로마로 개선하겠다는 호승감에 사로 잡힌 로마군 지휘관들은 무턱대고 자신들의 군세만 믿고 카르타고군에게 달려들었다가 한니발이 치밀하게 구상한 포위망에 걸려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개별 전투 못지않게 한니발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로마와 동맹시들의 분열 작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항복한 세력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응했지만, 저항하는 곳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유린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시간이 갈수록 한니발에게 투항하는 지역들이 늘어났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한니발이 그동안 로마를 위협했던 적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지연 전술의 대가로 알려진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쿤크라토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야전에서의 정면대결을 기피하는 소모전으로 한니발의 원정군을 지치게 만들어갔다.

 

기원전 21682, 로마가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끌어 모아 만든 8만 명의 대군이 칸나이 평원에서 자신들보다 열세인 카르타고군을 마주했다.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노부스 호모출신으로 공명심에 불타는 집정관 바로는 파울루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니발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우겠다고 한니발이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은 덫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칸나이 회전에서 로마군은 자그마치 6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이 포로로 카르타고군에게 잡혔다.

 

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니발은 곧장 적의 심장부였던 로마를 공략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한니발은 일격필살의 승부 대신 지구전을 선택했고 이것이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부를 가름했다. 결국 포기를 모르는 로마가 젊은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집정관으로 삼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우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 원정대를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고립시켜 두고, 카르타고의 멀티격인 이베리아 반도 공략에 나섰다. 스키피오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자신의 스승격인 한니발의 전략에 따라 이베리아의 수도격인 카르타고 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베리아 주둔 사령관 격인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패퇴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이었다. 역으로 뛰어난 명장 스키피오의 역습을 받은 카르타고는 로마가 제시하는 가혹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은, 한 때 로마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의 명장은 빈손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후 한니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시 전쟁을 도발한 로마 때문에, 은퇴한 명장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기원전 202년 가을 자마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로마 원로원의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 타도를 외쳤다. 비록 적장이었지만, 한니발을 존경하던 스키피오가 비호해 주었지만 한니발은 조국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결국 비티니아에서 자신을 추적해온 로마파견대에 사로 잡히기 전 그는 가지고 다니던 독약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한니발 원정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비로소 로마는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전쟁의 규칙에 따른 패배를 거부한 도시국가 로마는 한때 자신들의 성문 코앞까지 쳐들어왔던 한니발의 위협을 결국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한니발에게 패전해서 병사들이 부족할 때마다, 로마인들은 나이 어린 소년병들까지 징집하고 노예병사들까지 편성하는 단결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조국 카르타고에서 해외 원정군의 눈부신 활약을 시기 질투한 한노 일파의 견제로 그 어떤 병력과 물자 지원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로마인들에게 한니발 전쟁은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투쟁이었지만, 카르타고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게 아닐까. 저자 필립 프리먼은 에필로그에서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승리했다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예상으로 마무리한다. 이런 대체역사의 가능성이야말로 역사를 더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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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