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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ㅣ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평점 :
아니 7월의 마지막 날에 산 책을 11월이 돼서야 다 읽다니. 사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설은 7월의 마지막 날과 어제 그리고 오늘 3일 동안 다 읽은 셈이다. 분량도 적고 또 노름/도박을 소재로 한 책이라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마 읽다 말고 다른 책 읽느라 그랬겠지.
오스트리아 빈 출신 의사이자 작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한밤의 도박>이 오늘 풀어볼 책이다. 이 짧은 소설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도박 빚 때문에 불명예 전역한 친구 오토 본 보그너가 공금 횡령으로 위기에 처했다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빌리(빌헬름) 캐스다를 찾아온다. 빌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100굴덴 정도인데, 보그너는 1,000굴덴이 필요하다며 빌리의 부유한 외삼촌 로베르트 빌람 씨에게 돈을 융통해 볼 것을 부탁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로베르트 빌람은 빌리의 외삼촌으로 한 때 빌리를 돌봐 주고 적으나마 용돈도 주고 그랬던 사이이지만 최근 들어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니까 보그너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말이다. 대신, 빌리는 무언가 한 가지 꼼수를 발견했다. 카페 쇼프라는 곳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작은 노름판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빌리는 자기가 가진 돈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요행수를 바라고 돈을 따서 보그너를 돕겠다는 복안을 도출해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벌써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불행한 엔딩의 전조가 느껴지지 않은가.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빌리는 카페 쇼프의 작은 노름판에 참가하고, 노름판에서 돈을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다가 결국 사단을 내고 만다. 물론 빌리가 적당하게 돈을 따서 노름판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운명의 여신은 빌리의 편에 서지 않았다. 바덴 역에서 빈으로 가는 기차를 놓친 게 큰 패착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때마다 카페 쇼프로 돌아온 빌리는 노름판이 끝나는 2시 30분경까지 광기에 휩싸여 슈나벨 영사에게 무려 11,000굴덴이라는 거금의 빚을 지게 된다.
물론 아르투어 슈니츨러 작가는 냉정하게 제3의 입장에 서서 조금씩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빌리 캐스다 소위의 심리 변화를 시시각각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도 고스톱을 좋아하지만, 절대 큰돈으로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물러설 때를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카지노/도박판에 오래 머물수록 돈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돈을 잃었다면 손절할 수도 또 반대로 어느 정도 돈을 땄다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블랙잭 테이블 같은 노름판에서 광기에 물들어 영혼과 자본을 털어 넣는 이들을 관찰하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지.
도박으로 신세를 망친 보그너를 구하기 위해 노름판에 뛰어 들었다가 정말 패가망신하게 된 빌리의 운명이 비참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슈나벨 영사는 빈털터리가 된 캐스다 소위를 빈의 병영으로 데려다 주면서, 노름빚 상환 기한인 24시간에서 좀 더 연장해 주는 아량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못을 박는다. 노름빚이 기한 내에 상환되지 않으면 캐스다 소위의 연대장에게 알리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는다.
자 이제 벼랑 끝에 몰린 빌리 캐스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순식간에 한 개인의 운명이 전도유망한 청년 장교에서 거액의 노름빚을 진 도박쟁이 신세로 추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비극적 가능성을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능수능란하게 도출해낸다. 그래도 로베르트 빌람 외삼촌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던 빌리는 그르 찾아가 보지만, 레오폴디네라는 여성을 만나 전재산을 탕진해 버렸다는 말에 의기소침하는 빌리. 그런데 그 레오폴디네는 예전부터 그가 알고 있던 여성이 아니던가.
오래전에는 매춘부였지만, 이제는 외삼촌의 자금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옛 연인 아니 외숙모 레오폴디네를 찾아가 거의 구걸하다시피 자금을 빌려달라고 사정하는 빌리. 궁색한 처지에 몰린 빌리를 희망고문하던 레오폴디네는 사실 빌리에게 구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구원의 가능성이 닫혀 버린 빌리는 결국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물론 작가는 엔딩에 젊은 청년 장교의 죽음을 더욱 비극으로 만들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이런 역설적 장치야말로 소설 <한밤의 도박>이 품은 씁쓸한 현실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의사로 경력을 출발했지만, 작가 활동을 더 많이 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한밤의 도박>에서 주인공 빌리 캐스다 소위의 수시로 변하는 심리를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달한다. 노름판에서 돈을 많이 딸 때는 부유한 육군 장교의 모습을 그리며 행복해 하다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져서는 당장 닥칠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는 비참한 청년의 모습을 연출한다. 장황한 심리 묘사 대신, 급변하는 청년의 감정을 임상에서 체득한 전문가답게 유려하게 그려낸다.
빌리 캐스다가 전문 도박꾼이었다면 오히려 그의 비참한 최후를 동정하지 않았겠지만, 동료 보그너를 위해 노름판에 나섰다가 그만 패가망신했기에 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료 빔머 중위가 나서서 판돈을 올리고 계속해서 노름빚을 지는 걸 제지했지만, 도파민 과다로 이성을 잃은 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파국이 다가왔다. 아마 빔머 중위의 제지를 빌리가 받아 들였다면, 소설 자체가 구성되지 않았겠지. 그렇게 예정된 비극은 굴러갔다.
이 책을 샀던 지난여름을 회상해 보니,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다른 책들을 만나 보겠다고 <엘제 양> 그래픽 버전을 먼저 읽지 않았나. 왠지 매력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어졌다. 집에 쌓아 놓은 책탑을 좀 허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