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글] 고래 / 천명관

2009. 5. 31. 1:47


* 이 리뷰는 무려 14년 전에 쓴 리뷰다. 책도 재개정판으로 나오는 마당에 리뷰라고 해서 울궈먹기가 안될쏘냐, 이 말이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천명관 작가의 <고래>는 몇 년 전에 근처 서점주인형의 추천으로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다. 뭐 지금이야 4, 500쪽 정도의 책들이야 쉽게 읽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아, 이 책 두껍다라는 타령이 절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추천으로 읽기 시작하면서도 내내 불안해했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밌어서 바람에 게눈 감추듯이 다 읽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재밌으니까 그리고 다시 옛 추억의 여행지를 더듬어 가는 여행길이어서 그랬을까.

 

천상 구라꾼(혹은 이야기꾼)인 천명관 작가의 이 판타지와 현실세계에 철저하게 기반한 리얼리티로 범벅이 된 <고래>는 매혹적인 이야기다. 2대에 걸친 어느 모녀의 기구한 인생유전에 덧붙여서, 고구마 줄기처럼 달려 나오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등장 그리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이야기틀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 읽을 당시,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작가의 창작력에 경이를 표했던 기억이 맴돈다.

 

부두, 평대 그리고 공장 이렇게 3개의 큰 장으로 구성된 <고래>는 주인공 금복과 그의 딸 춘희의 파란만장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느 촌부의 딸로 태어나 부둣가에 흘러들어 깡다구 하나로 자수성가해서 삶의 정점을 맞이했다가 바로 거지 신세로 추락하기도 하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기업을 일으키는 금복의 삶이 바로 천명관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관계하는 만남은 언제나 불행으로 귀결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고, 한때 같이 살았던 생선장수가 그랬으며, 유년의 추억을 같이했던 걱정이 그랬고 부둣가의 날건달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딸 춘희마저 평탄치 못한 삶의 여정을 걸었다. 해피엔딩을 갈구하면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작가는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금복과 춘희의 삶을 지극히 제한된 부두, 평대 그리고 공장이라는 공간으로 옭아매면서 독자들에게 그 이상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친절한 경고까지 덧붙이기도 한다. 남북의 장군들에 대한 작가의 희화는 슬쩍슬쩍 핵심적인 부분들을 비껴 나가면서도, 피할 수 없는 시대상을 그리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의 그런 언급이 없었더라면 <고래>의 시공간적 배경들은 아예 판타지로 치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공간적 낯설음만큼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역시 지극히 이원적이다. 소설 전반부의 주인공인 금복은 현실의 치열한 삶을 살아나가는 억척여인의 전형으로 나중에 가서는 성전환이 된 게 아닐까할 정도로 남성화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온통 휘젓고 있는 물신(物神) 맘몬(Mammon)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편 그의 딸인 춘희(春姬)는 리얼리티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판타지 세계에 사는 섬세함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아예 홍진세상의 더러움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인지 말을 할 수가 없는 벙어리란다. 그녀와 생뚱맞기 짝이 없는 코끼리 점보와의 대화는 현실세계와 판타지의 경계에서 요란한 회오리들을 만들어낸다. 하긴 춘희는 국밥집 노파의 딸인 애꾸에 비하면 보다 현실계에 좀 더 가까운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정한 고래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금복이 부둣가 시절 우연히 보게 된 대왕고래의 거대함은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물욕과 결합해서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을 한다. 그녀는 건어물장사, 다방 그리고 벽돌사업 끝에 자신에게 판타지이자 현실세계로부터 도피처였던 극장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그 극장의 꼴이 바로 고래였다는 것이다. 뛰어난 사업가로서 금복은 요즘 말로 하자면 얼리 어댑터로 벌써부터 커피 맛을 알고 시골마을에 다방을 차리고, 또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야 할 시기에 벽돌사업을 시작해서 건설 붐에 한몫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성공이 그녀의 개인적 행복을 담보해 주진 않는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주변인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맺는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미 천명관 작가는 책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예의 법칙들로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세뇌해두었기 때문이다. 절로 멋지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이야기의 법칙이었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고래에서 현실계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작법에 대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타이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의 첨가도 뒤늦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남과 북의 두 장군들의 이야기와 슬쩍 빗겨나가기가 예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과 일맥상통함을 알게 됐다. 역시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주무대인 마콘도는 천명관 작가의 <고래>에서 평대로 치환될 수가 있겠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적어도 그렇게 읽었다라고 답할 수가 있겠다.

 

춘희 파트에서 난 자꾸만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불멸의 영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의 짬뽕이 연상이 됐다. 혹시 영화감독이 소설 <고래>에서 영화의 어느 캐릭터를 베낀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아니면 말구! 무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 같았던 금복의 이야기에 비해, 춘희 이야기에서는 니힐리즘의 향기와 판타지스러운 결말이 조금 아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놀라운 건 <고래>가 천명관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초짜 작가가 이런 글을 썼단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쨌든 <고래>를 읽고 나서 작가의 다른 책이 없나 해서 찾아보니 재작년에 <유쾌한 하녀 마리사>라는 단편집을 발표했었다고 한다. 작가 소개글에 보니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사신(死神)과의 하룻밤>을 연재 중이라고 하는데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된다.

 

[뱀다리] 가히 국내 작가 최고의 데뷔작이라고 할 만한 어떤 작품 이래, 그것을 능가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지 못하는 어느 작가에 대한 아쉬움이 짙어지는 그런 봄밤이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05-13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명관 책 있는데 함 읽어봐야겠슴다.
아시겠지만 시나리오 쓰다 소설 쓴 거 잖아요.
부커상은 어떻게 되나 모르겠어요.

레삭매냐 2023-05-13 21:34   좋아요 0 | URL
오 그랬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이 소설 영화로 맹글면 재밌겠다
싶은데... 그럴 일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페크pek0501 2023-05-14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래, 이 책 큰 상의 후보에 올랐던 것 같아요. 신문에서 보고 놀랐던 기억이...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구나, 새삼 느끼며... 저주 토끼를 비롯해 대단한 작가들이에요.
앞으로 우리나라 작가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3-05-14 22:50   좋아요 0 | URL
케이팝 다음에는 부디 케이노블
이 뒤를 잇기를 바랍니다.

cyrus 2023-05-15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궁 모임 이전에 펭귄클래식 모임 한창 했을 때인가? 그 당시에도 <고래>가 엄청 재미있다고 호평하신 분이 있었어요. 올해 국제 도서전에 천명관 작가 <고래> 북토크가 열린다고 하던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거 예약을 안 했네요... ^^;;

레삭매냐 2023-05-15 08:35   좋아요 0 | URL
그랬던가요? 그랬다면 그게
저일 수도 있겠네요 ㅋㅋㅋ

제가 그곳에 간다면 왜 데
뷔작 만한 작품을 다시 쓰지
못하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