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왼쪽 무릎에 박힌 별 마음이 자라는 나무 14
모모 카포르 지음, 김지향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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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종이가 아닌 누런 종이에 글도 빽빽하지 않고 헐렁하며 그림도 경쾌하게 들어가 있다. 마치 <어린 왕자>를 펼쳤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랑에 대한 산문시를 읽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한때 유행했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적어 놓은 긴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 어떤 느낌이든 잔잔한 여운을 느낀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발칸반도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떨어진 하나의 별이 싸냐라는 갓난 아기 무릎에 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침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바냐라는 남자 아이도 태어났다. 둘은 운명처럼 태어나자마자 뭔가 통했는지 서로 행동을 함께 한다. 싸냐가 울면 바냐도 울고 싸냐가 웃으면 바냐도 웃는다. 하지만 둘은 바로 헤어진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세월은 흘러 어린이가 된 둘은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나 다시 예의 그 일체감을 느낀다. 같이 홍역을 앓고 같이 볼거리를 앓으며. 결국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여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싸냐는 바냐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영원히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을. 그러면서 바냐가 자신을 사랑하는 그날까지만 살 수 있다는 말도 함께. 사랑. 글쎄 사랑이라는 게 그처럼 무서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냐는 약속을 했고 둘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식 장에서부터 바냐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 단지 속으로만 무심코 생각했던 것으로 인해 싸냐는 조금씩 작아진다. 그 후에도 바냐가 다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싸냐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은 작은 인형보다 더 작아지고 만다. 왜 싸냐가 이상한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겠다. 하지만 바냐는 그래도 싸냐를 사랑하고 여전히 함께 있다. 그러나 바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싸냐는 너무 작아져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그제서야 어느 별 무리는 완전해 졌다지. 바냐는 싸냐를 찾아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다니고...

청소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나도 분명 그 시절을 지났지만 세월의 두께에 밀려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이런 사랑은 부담스럽고 위험한 것이라는 '교훈'만 남았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라면 충분히 가꾸어갈 만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이렇게 조건을 걸지 않더라도 어떤 사랑이든 사랑이란 최후까지 버려서는 안 될 가치이긴 하다. 꼭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읽는 이에 따라 '사랑'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지라도 사랑은 소중한 것이며 꼭 있어야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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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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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책이라도 읽는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당연하다!) 심지어 읽는 계절에 따라서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많은 고전들을 지금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읽어본다. 물론 일부러 찾아서 읽기는 힘든데 우연히 기회가 찾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학창시절에 읽지는 못한 책이다. 그래도... 만약 읽었다면 그 때와 지금의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배경으로 물질적인 것이 우선시 되는 시대풍조를 은근히 비꼬는 이 작품은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비빌 언덕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어떻게든 상류사회로 편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개츠비, 처음엔 사랑을 믿는 듯하지만 결국 외적 조건을 따라가고 끝까지 그것에 안주해 버리는 속물 데이지, 특별한 인생의 목표도 없이 그저 현실을 즐기며 세월을 보내는 부유한 한량 톰 등 여기에는 제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 없어 보인다. 아, 있긴 하다. 바로 화자인 닉.

잠시 여자들이 꿈꾸는, 첫사랑을 못 잊어 혼자 살며 사랑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런 남자인 개츠비가 아름다웠다. 청소년기나 한창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20대였다면 끝까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잘못을 뒤집어 쓰는 개츠비가 한없이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결코 진정한 사랑일까 의심하는 지금 나이에서도 잠시나마 그런 남자가 멋있었으니까. 혹시나 지나가다 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여는 개츠비는 일편단심 데이지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끝까지 그녀를 위해 산다. 그러나 그가 톰 앞에서 자신의 사랑과 데이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며 뭔가 잘못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과연 사랑일까. 집착은 아닐런지.

혼돈의 시대에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가치들이 있다는 명제는 언제나 유효한 것 같다. 1920년대를 바라보는 피츠제럴드도 그 어떤 가치를 이야기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상실했네, 다시 찾아야하네 하며 떠들고 있지 않던가. 마치 어른들이 신세대들을 보고 하는 말('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이란'이러는 것 말이다.)이 세대가 변해도 똑같듯이... 피츠제럴드는 닉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을 다 합쳐도 당신(개츠비)만 못 하다는 말로 개츠비를 칭찬한다. 적어도 개츠비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물질적인 것만 따지지는 않으니까.

뒷부분에 나와 있는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시간이 언제나 흥미롭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헤밍웨이를 발굴한 인물이기도 하단다. 그러나 둘은 성격도 문체도 너무나 달라서 서로 사이가 멀어졌단다. 어찌되었든 소설의 위대함이란 당시의 세태와 도덕, 그리고 시대를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단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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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일곱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6
김리리 외 지음, 김경연 엮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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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사랑과 성이라. 우선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아주 작은 글씨로 씌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부모라면 가장 많은 걱정을 하는 부분이 바로 사랑과 성이기 때문에 그렇겠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만약 잊어버리는 기능이 없다면 아마 제대로 살아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내게는 다행인 설명과 함께. 너무 잘 잊어버려서 아이들에게도 '찍혀버린' 엄마이니 그게 다행이라고 하는 말이 왜 안 반갑겠는가. 그렇다. 인간은 망각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그 망각이 아주 해가 될 때가 있다. 많은 어른들이 본인도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자식들에게는 인정하지 않으니 말이다. 왜? 자신이 그랬던 것은 잊어버렸으니까.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작가들은 이렇게 요즘 아이들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 그것도 아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만 골라서. 이 책에 있는 이야기들도 모두 그렇다. 어느 작가는 청소년인 아이를 키우고 있기도 하니 분명 그 자녀들은 어른인 부모가 모두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러니 그네들은 얼마나 행복한 청소년인가. 그러나 사람 사는 것은 모두 똑같다고 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청소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애쓰지 않는 보통의 부모들과는 분명 다르겠지.

집에 청소년들이 읽는 단편집이 몇 편 있는데 이 책과 작가가 겹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각 작가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름을 보지 않고 글을 먼저 읽어도 대충 어느 작가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읽으면서 느낀 것 하나는 주로 여자 작가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남자 작가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 작가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쓰는 글과 여자 작가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쓰는 글은 약간 맛이 다르다. 아무래도 남자 작가는 직접 지나온 길이기에 그런 것 아닐까싶다. 

일곱 편의 이야기가 소재도 골고루 주인공도 골고루, 서술 방식도 골고루다. 그래서 각각을 읽는 재미가 있다. 청소년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면 지금 여기 있는 아이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분명 내가 청소년기일 때도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다만 잊어버려서 그렇지. 뭐, 나야 학교와 집 밖에 몰랐으니 별다른 고민을 할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좋아해줬으면 하는 생각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딸에게서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과연 내가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때는 내가 보냈던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재만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지 않으려고 이렇게 청소년 책을 읽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청소년 책에 나온 인간유형을 보면 대개 비슷비슷하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하는데, 공부는 별로지만 성격이 좋은 게다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 패턴이 있다. 즉 공부는 잘하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 공부는 별로지만 성격이 좋은 아이. 그리고 공부 잘 하는 아이 뒤에는 꼭 모든 것을 조종하는 부모가 있다. 또 다른 패턴은 쿨한 여자아이다. 그런 아이는 환경이 어렵지만 오히려 구김살이 없다. 또 남학생을 다루는 패턴도 비슷한데 내 아이가 딸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이렇게 결국은 이기적인 나를 드러낸다.)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아이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많은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이야기들이 재미없거나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많은 다양한 경우를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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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아들
도릿 오르가드 지음, 박미섭 옮김 / 검둥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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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 제3자가 보기에는 그냥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도 해보지만 당사자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잘 안다. 같은 민족인데도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문제가 드러나는데 하물며 전혀 다른 민족에다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오죽할까.

하미드가 유대인들 도시인 텔아비브에서 그저 셋방을 구할 뿐인데도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 느끼는 비참함과 두려움은 아마도 내가 책을 읽으며 막연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심하겠지. 그렇게 아랍인인 하미드는 단지 의사가 되고 싶어 공부하러 간 곳에서 유대인들과의 거리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어 유대인들은 어찌 이리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후반부에 하미드 마을에서 유대인에 대해 그들이 드러내는 적대감을 보자 이쪽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를 다시금 느꼈다. 하긴 그렇게 양편이 똑같으니까 지금까지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겠지.

우연히 어쩌면 운명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미드가 로젠 할머니 집으로 셋방을 보러 가면서 한 인간의 문제는 더 이상 거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로젠 할머니 측과 아랍인을 대표하는 하미드 측의 얼키고 설킨 문제로 확대된다. 그러면서도 하미드와 로젠은 끝내 같은 인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져버리지 않는다. 그랬기에 로젠은 비록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긴 하지만 유대인 마을에 들어온 하미드를 포용했고, 마찬가지로 아랍인 마을에 들어온 로젠 할머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간호한 것이다. 

줄곧 하미드를 중심으로 유대인이 아랍인을 차별하는 모습을 드러내기에 그 감정에 도취되다가, 샤힌 박사의 태도를 보면서 문득 현실로 돌아온다. 서늘함을 느끼면서. 그래도 인간적이고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의사가 유대인에게 보이는 적대적 감정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이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특히 당시 사정이 한창 아랍인과 유대인이 물리적 충동을 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꼭 그렇지 않았더라도 거기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서. 만약 현실에서도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세계정세를 바라보는 눈은 미국이라는 안경을 낀 채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땅에 이방인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작정 들어와서 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나도 그랬고. 아니, 어쩌면 이런 사실들에 대해 관심이 얼마나 있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그저 남의 나라 문제라는 생각과 '또 왜?'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인들의 그 정신이 오히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려는 그들의 밉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들은 이래서 싫고 저들은 저래서 잘못했다는 생각은 현실을 바꾸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들 모두를 이해하고 좀 더 좋은 해결책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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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의 인턴십 - 프랑스의 자유학기제를 다룬 도서 반올림 12
마리 오드 뮈라이유 지음, 김주열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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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호하는 출판사가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런데 '바람의아이들'도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 중 하나다. 특히 책을 낼 때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고의 내용으로 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왜 유은실 작가도 이 출판사를 통해 데뷔를 한 다음 다른 책을 내서 성공하지 않았던가. 비록 나중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냈지만. 이처럼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을 느꼈기에, 그리고 진정으로 좋은 책을 내고자 하는 것을 느꼈기에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울만 되면 대학입학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전공을 선택할 때도 자신의 적성이나 좋아하는 것을 고려하기 보다는 점수에 '맞춰서' 지원하는 경향이 많다. 말로는 항상 적성을 고려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지만 막상 점수가 나오고 범위가 결정되면 또 원래대로 되고 마는 게 현실인 것 같다. 물론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실업계냐 아니냐를 선택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보면 실업계로 가는 학생들을 배려한 제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수능을 보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로 구분된다.

그런데 프랑스는 중학교 때 자신의 적성을 알아보거나 혹은 사회생활을 경험해 보는 인턴십 제도가 있나 보다. 만약 이런 제도가 우리나라에 도입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서류상으로만 일하는 것으로 하고 실제로는 학원이나 도서실을 가지 않을까.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외국의 사례를 보고 봉사제도를 도입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어쨌든 루이는 아무 생각없이, 별로 내키지도 않는 미용실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면서 루이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루이는 학교가 그야말로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가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지만 흥미도 없고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이 그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성적이 좋을 리 없다. 아마도 루이는 흥미가 없어서 무기력해지고 스스로 주눅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연히 인턴십 생활을 하게 된 마이테 미용실에서의 일로 인해 루이는 활력을 찾고 능력을 발견한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유명한 외과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미용사가 된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루이에게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엄마와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게다가 마이테 미용실의 원장을 비롯하여 모두가 루이를 지지해 주고 아껴줬으니 얼마나 행운아인가. 현실이 모두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적성에 맞고 능력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그쪽으로 뛰어들어 결국에는 성공한다면 말이다. 또 낮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 더 없이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읽으면서 루이의 행동이나 상황을 주인공인 루이에게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루이가 자꾸 내 아이라면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랬다면 내가 루이 엄마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혹시 난 루이 아빠처럼 행동할 확률이 훨씬 높지 않을까. 이상하게(부모가 읽는다면 '당연하게'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루이와 아빠가 진정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부분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비록 늦었지만 허황된 욕심을 버리고 아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아버지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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